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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질바질 Apr 04. 2024

아빠의 달력

나의 작은 부엌살림살이에 관하여_달력

결혼을 하고 집안 대소사와 집들이 몇 차례를 하고 나니 첫 연말이 성큼 다가왔다. 이유도 없이 두근거리는 연말, 나는 탁상 달력을 사보 기로 결심하였다. 누군가는 달력 사는 일이 결심까지 할 일인가 싶을 것이다. 나는 삼십 년이 조금 안 되는 해 동안 아빠 이름이 적힌 판촉용 달력 말고 다른 달력을 사용해 본 적이 손에 꼽는다. 손에 꼽는 기억 중 하나는 20대 초중반 즈음이다. 그때도 역시 아빠가 챙겨주신 달력이었는데, 스누피가 그려진 OO 보험사 달력이 예쁘다며 스티커와 함께 챙겨주셨다.     


결혼 전까지 살던 친정집에는 아빠 이름이 적힌 달력이 내 방 책상 위, 부모님 침대 머리맡, 거실 책장 위, 식탁 한 편에 늘 있었다. 달력들은 각자 맡아하는 업무도 제각각이었는데, 제일 중요한 업무를 맡고 있던 달력은 식구들의 주요 일정이 최종적으로 정리되어 있던 식탁 달력이었다. 엄마와 내가 온갖 것들을 달력에 남긴 습관이 먼저 생긴 것인지 아니면 아빠가 넉넉히 주문하고 남은 달력들을 처리하기 위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 가족은 오랫동안 아빠의 달력을 부적과 같이 집안 곳곳에 두고 사용하였다.     


“달력 몇 개 필요하니?” 아빠가 수화기 너머로 물어보신다. “한 개면 돼요." 아빠 달력으로부터 독립이 무산되어 아쉬운 마음이 들면서도 내가 사는 곳에 아빠 달력이 없는 것도 왠지 허전하다는 생각으로 대답하였다. 나는 늘 한 개면 된다고 하지만, 아빠는 늘 두 개를 챙겨 주신다. 사용이 불분명한 여분의 달력은 서랍에 넣어둔다. 짜아악, 이유 없이 선택받은 새 탁상 달력에 집안 대소사를 적은 뒤 삼각대를 접어 책상에 올려둔다.  

   

개인 정보가 중요하여 이름 밝히기도 꺼려하는 요즘, 1년이라는 긴 시간의 무게를 말없이 지탱하는 달력 삼각대에는 아빠가 다니시는 회사명, 아빠의 성함, 휴대폰 번호가 보기 좋게 적혀있다. 마케팅을 위해 개인 정보가 필요한 이들에게는 딱히 관심이 없을 듯 한 ‘종합보험회사’와 ‘손해보험 생명보험 자동차 화재 종신 연금’이 아빠 개인 정보 사이와 끝에 작게 적혀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고개를 돌리면 내 옆에 아빠의 달력이 있다. 달력을 보고 있으면 아무 생각이 없다가도 든든하기도 하고,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내가 집에서 가장 오래 머무르는 식탁 위에서 아빠는 그렇게 서 계신다. 아빠와 엄마가 내 곁에 영원하길, 그리고 아빠가 원하시는 만큼 지치지 않으실 때까지 나의 식탁 위에서 오래오래 아빠를 뵐 수 있기를 바라본다.



항상 공개되어 있는 아빠의 개인정보를 이번만큼은 보호하고 싶었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2023년 연말 즈음 써 놓은 글을 이제야 올려본다. 연말에 올렸다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래도 마음 한 편에 이 글을 올려야 된다는 생각이 있어서일까. 얼마 전에 본 이효리의 레드카펫에서 우연히 듣게 된 김필선의 '마지막 춤을 나와 함께'를 듣는데 울컥하는 마음과 왠지 모를 공감으로 나의 글과 조합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루는 습관은 결코 좋지 않지만, 가끔은 무언가에 대한 깊은 생각 또는 형성해 가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글을 쓰는 것까지 미루지는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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