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첫째 주의 마들렌
오랜만에 피호두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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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땐 피호두가 흔했다. 동네에선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이 드르륵드르륵 소리를 내며 한 손에 호두 두 알을 연신 돌리시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고, 보통 호두라는 건 껍질이 있는 피호두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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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껍질을 벗긴 탈각 호두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더니, 요즘은 굳이 찾아보지 않는다면 일상에서 피호두를 흔하게 보기는 힘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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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탈각 호두가 대중화되어 껍질이 벗겨진 채 유통되는 게 더 익숙하지만, 사실 호두는 지방 함량이 상당히 높은 편이기 때문에 산패하기 쉬워서 껍질을 벗기지 않은 피호두 상태로 구매를 하는 게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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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요즘은 해외에서 워낙 저렴하게 탈각 호두가 수입되는 데다 피호두의 껍질을 일일이 까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서 나 역시도 호두가 필요할 땐 탈각 호두를 구매해서 냉동실에 넣어놓고 사용하곤 했는데, 마트에 갔다가 정말 오랜만에 피호두가 눈에 띄어서 반가운 마음으로 피호두를 구매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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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번 주는 당연히 피호두를 주제로 마들렌을 만들 생각이었는데, 며칠 후 뉴스를 보다가 마트에 괜히 피호두를 가져다 놓은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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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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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정월대보름이 코앞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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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대보름은 피호두처럼 조용히 점점 자취를 감춰가고 있는 우리 명절이다. 농경을 기본으로 하며 달을 기준으로 시간을 계산하던 우리 문화에서 새해의 첫 보름달이 뜨는 정월대보름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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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설 명절만큼이나 성대한 잔치를 벌이던 명절 중 하나였지만, 현대 사회로 접어들면서 농경 사회가 약화하다 보니 농사와 관련된 여러 미신을 믿는 사람이 줄어들었고 무엇보다 설 명절과 보름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서 자연스레 규모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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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영양 섭취가 좋아지면서 오곡밥이나 묵은 나물 같은 절식의 의미가 퇴색되었고, 그나마 남아있던 부럼 깨기 문화도 탈각 견과류의 등장과 함께 점점 그 자리를 잃어가면서 요즘은 정월대보름을 굳이 챙기는 사람도 줄어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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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정월대보름을 챙겨본 지 몇 년은 된 것 같은데, 피호두와 함께 정월대보름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오랜만에 호두를 깨고 정월대보름을 기념하는 마들렌을 만들며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하기로 했다. 그렇게 오늘 만든 마들렌은 오곡밥의 기운을 담은 오곡 크럼블 마들렌이다.
오곡밥은 정월대보름의 대표적인 절식 중 하나이다. 찹쌀, 붉은팥, 검은콩, 차조, 찰수수 등 우리나라 전통 색상인 오방색을 나타내는 곡물을 먹음으로써 오행의 기운을 골고루 받아 건강히 지내라는 의미와 한 해 농사의 풍년을 기리는 마음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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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정월대보름의 전통적인 대표 절식은 찹쌀과 대추, 밤, 잣 등을 넣어 만든 약밥인데, 옛 서민들은 대추나 밤, 잣 등의 재료를 구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 오곡밥을 지어먹기 시작했고, 지금은 오곡밥이 정월대보름의 대표적인 절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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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대보름이라는 걸 늦게 눈치채는 바람에 아쉽게도 오곡밥의 다섯 가지 곡식을 준비하지는 못해서 대신 오방색의 구색에 맞춰 붉은색의 팥과 푸른색의 깻잎, 백색의 아몬드와 황색의 단호박 그리고 흑색의 검은깨를 섞어 오색 크럼블을 만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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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들렌 반죽에는 부럼의 일종인 호두와 땅콩을 잘게 다져서 섞어주었다. 호두의 경우 오랜만에 신선한 피호두를 구매한 만큼 잘게 다져서 넣은 호두 외에도 호두 프랄리네를 만들어 섞어서 호두의 고소한 감칠맛을 한층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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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오곡 크럼블을 만드는 게 오곡 크럼블 마들렌의 핵심이었는데, 크럼블의 양이 많지 않아서 기본 크럼블을 베이스로 만들어 각각의 재료를 섞어주었더니 각자 다른 수분량 때문에 원하는 물성이 나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결국, 크럼블을 한 알 한 알 손으로 빚어내는 엄청난 노동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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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완성된 마들렌은 촉촉하면서도 부드러운 살결과 호두 특유의 고소함을 진하게 느낄 수 있어서 아주 만족스러웠는데, 오곡 크럼블은 각각의 크럼블마다 풍미의 진함이 달라서 일부 크럼블의 맛이 너무 약하게 느껴지는 데다 오븐 속에서 전체적으로 색도 바래버려서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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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오늘은 아침부터 경쾌한 소리를 내며 피호두를 깨고, 오후엔 오곡 크럼블 마들렌을 먹으며 한 해의 안녕을 빌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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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평온한 한 해를 보낼 수 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