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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울새 Mar 03. 2023

오곡 크럼블 마들렌

2023년 2월 첫째 주의 마들렌

오랜만에 피호두를 샀다.

내가 어렸을 땐 피호두가 흔했다. 동네에선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이 드르륵드르륵 소리를 내며 한 손에 호두 두 알을 연신 돌리시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고, 보통 호두라는 건 껍질이 있는 피호두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껍질을 벗긴 탈각 호두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더니, 요즘은 굳이 찾아보지 않는다면 일상에서 피호두를 흔하게 보기는 힘든 것 같다.

지금은 탈각 호두가 대중화되어 껍질이 벗겨진 채 유통되는 게 더 익숙하지만, 사실 호두는 지방 함량이 상당히 높은 편이기 때문에 산패하기 쉬워서 껍질을 벗기지 않은 피호두 상태로 구매를 하는 게 바람직하다.

하지만 요즘은 해외에서 워낙 저렴하게 탈각 호두가 수입되는 데다 피호두의 껍질을 일일이 까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서 나 역시도 호두가 필요할 땐 탈각 호두를 구매해서 냉동실에 넣어놓고 사용하곤 했는데, 마트에 갔다가 정말 오랜만에 피호두가 눈에 띄어서 반가운 마음으로 피호두를 구매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주는 당연히 피호두를 주제로 마들렌을 만들 생각이었는데, 며칠 후 뉴스를 보다가 마트에 괜히 피호두를 가져다 놓은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다.

바로 정월대보름이 코앞이었던 것이다.

정월대보름은 피호두처럼 조용히 점점 자취를 감춰가고 있는 우리 명절이다. 농경을 기본으로 하며 달을 기준으로 시간을 계산하던 우리 문화에서 새해의 첫 보름달이 뜨는 정월대보름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고 한다.

원래는 설 명절만큼이나 성대한 잔치를 벌이던 명절 중 하나였지만, 현대 사회로 접어들면서 농경 사회가 약화하다 보니 농사와 관련된 여러 미신을 믿는 사람이 줄어들었고 무엇보다 설 명절과 보름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서 자연스레 규모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영양 섭취가 좋아지면서 오곡밥이나 묵은 나물 같은 절식의 의미가 퇴색되었고, 그나마 남아있던 부럼 깨기 문화도 탈각 견과류의 등장과 함께 점점 그 자리를 잃어가면서 요즘은 정월대보름을 굳이 챙기는 사람도 줄어가고 있는 것 같다.

나 역시 정월대보름을 챙겨본 지 몇 년은 된 것 같은데, 피호두와 함께 정월대보름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오랜만에 호두를 깨고 정월대보름을 기념하는 마들렌을 만들며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하기로 했다. 그렇게 오늘 만든 마들렌은 오곡밥의 기운을 담은 오곡 크럼블 마들렌이다.



오곡밥은 정월대보름의 대표적인 절식 중 하나이다. 찹쌀, 붉은팥, 검은콩, 차조, 찰수수 등 우리나라 전통 색상인 오방색을 나타내는 곡물을 먹음으로써 오행의 기운을 골고루 받아 건강히 지내라는 의미와 한 해 농사의 풍년을 기리는 마음을 담고 있다.

원래 정월대보름의 전통적인 대표 절식은 찹쌀과 대추, 밤, 잣 등을 넣어 만든 약밥인데, 옛 서민들은 대추나 밤, 잣 등의 재료를 구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 오곡밥을 지어먹기 시작했고, 지금은 오곡밥이 정월대보름의 대표적인 절식이 되었다.

정월대보름이라는 걸 늦게 눈치채는 바람에 아쉽게도 오곡밥의 다섯 가지 곡식을 준비하지는 못해서 대신 오방색의 구색에 맞춰 붉은색의 팥과 푸른색의 깻잎, 백색의 아몬드와 황색의 단호박 그리고 흑색의 검은깨를 섞어 오색 크럼블을 만들기로 했다.

마들렌 반죽에는 부럼의 일종인 호두와 땅콩을 잘게 다져서 섞어주었다. 호두의 경우 오랜만에 신선한 피호두를 구매한 만큼 잘게 다져서 넣은 호두 외에도 호두 프랄리네를 만들어 섞어서 호두의 고소한 감칠맛을 한층 끌어올렸다.

사실 오곡 크럼블을 만드는 게 오곡 크럼블 마들렌의 핵심이었는데, 크럼블의 양이 많지 않아서 기본 크럼블을 베이스로 만들어 각각의 재료를 섞어주었더니 각자 다른 수분량 때문에 원하는 물성이 나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결국, 크럼블을 한 알 한 알 손으로 빚어내는 엄청난 노동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다행히 완성된 마들렌은 촉촉하면서도 부드러운 살결과 호두 특유의 고소함을 진하게 느낄 수 있어서 아주 만족스러웠는데, 오곡 크럼블은 각각의 크럼블마다 풍미의 진함이 달라서 일부 크럼블의 맛이 너무 약하게 느껴지는 데다 오븐 속에서 전체적으로 색도 바래버려서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어쨌든 오늘은 아침부터 경쾌한 소리를 내며 피호두를 깨고, 오후엔 오곡 크럼블 마들렌을 먹으며 한 해의 안녕을 빌어보았다.

다들 평온한 한 해를 보낼 수 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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