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자와 눈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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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윤슬

설날 하루 전, 부모님 댁이 있는 지역은 대설경보가 내렸다.

실제로 눈이 많이 왔다. 눈이 내리다 그치고 다시 눈보라가 몰아치고 해가 잠깐 나왔다가 다시 눈이 내렸다.

티브이의 정오 뉴스에서는 전국적인 폭설로 설 연휴 귀성길 정체가 더 심해졌다는 소식이 흘러나왔고,

KTX 열차들도 눈길에 속력을 못 내서 지연 운행되고 있었다.


못해도 20cm 넘게 눈이 내린 날,

설을 하루 앞둔 날 나는

서울 가는 기차를 탈 예정이었다.


하루만 연차를 내면 설 연휴 전 주말부터 그 다음주 주말까지 꽤 오랜 날을 쉴 수 있었다.

그 긴 시간 동안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필요한 말이 아니면 엄마아빠에게 좀처럼 말을 붙이지 않는 동생

그런 동생의 눈치를 보는 부모님

그런 부모님 눈치와 동생의 기분을 동시에 살피는 나

동생은 나랑 둘이 있을 때 보다 부모님과 함께 있을 때 더 말수가 적어졌다.

엄마 아빠와 함께 있는 시간이 불편한 거 같았다.

동생은 다 같이 카페에 가도 가져간 책만 읽었다.

엄마는 동생이 대화에 참여하길 원했고, 말을 걸었지만

동생은 엄마의 마음처럼 움직여 주지 않았다.

나는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며 불편함을 느꼈다.


이런 분위기를 어느 정도 예상했던 터였고,

연휴 중반부터는 가까운 해외여행을 계획했다.

생각만으로 그쳤을 수 있었던 여행이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친구가 흔쾌히 본인이 연차를 낼 테니 같이 여행하자고 해서 성사되었다.


한편으로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죄책감이 들었고,

가족과의 시간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현실이

참담했다.


도망치고 싶은 이 마음을 엄마 아빠나 동생이 눈치챘을까?

괜히 미안한 마음에 예매해 둔 기차를 타기 전까지 동생과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눈이 이렇게나 많이 오는 날을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았다.




오후에도 여전히 눈이 펑펑 오고 있었다.

스키 장갑을 챙기고, 안 나가겠다는 동생을 데리고 나왔다.

귀여운 동네 사람들이 놀이터에 이미 내 키보다 더 큰 삼단 눈사람을 만들어 놓았다.

눈사람을 보고 동생이 웃었다. 웃는 동생을 보니 나도 좋았다.

그 웃음에 약간의 안도감과 데리고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글루를 만드는 가족들도 있었다.

놀이터 한편에서 우리도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내가 만든 눈덩이가 더 커서 그 위에 동생이 만든 눈덩이를 올렸다.

나뭇잎을 주워다가 눈을 만들었다.

동생이 당근으로 코를 만들었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도 당근을 가져왔으면 좋았겠다고 호들갑을 떨며 맞장구쳤다.

맞장구치는 나의 모습이 약간 과장스럽다고 스스로 느꼈지만,

동생이 의견을 낸 게 반가웠다.




동생과 눈사람을 만들고 나니

겨울왕국의 주인공인 자매, 엘사와 안나, 그리고 영화의 타이틀곡이 떠올랐다.


-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 OST 'Do you want to build a snowman?' 중 -

Do you wanna build a snowman?

같이 눈사람 만들래?

Come on. Let's go and play.

이리 와 같이 놀자.

I never see you anymore.

이제는 너를 볼 수 없어.

Come out the door.

문 밖으로 나와봐.

It's like you've gone away.

마치 너가 떠나버린 거 같아.

We used to be best buddies.

우린 가장 친한 친구였는데.

And now we're not.

이제는 아니야.

I wish you would tell me why.

나한테 이유라도 말해줘.

Do you wanna build a snowman?

같이 눈사람 만들래?

It doesn't have to be a snowman.

꼭 눈사람이 아니어도 돼.


나와 동생을 둘러싼 현재의 상황이 투영되어서인지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이 저렸다.

이 노래가 이렇게 슬픈 노래였나? 몇 해 전 영화를 볼 때는 느끼지 못한 슬픔이었다.

대단할 것은 없어도 나의 자랑이었던 동생이

거짓말로 우리 모두를 속여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동생에 대한 신뢰가 깨졌고, 내가 알고 있던 애가 맞는지 동생에 대한 모든 것이 불확실하게 느껴졌다.

마치 이제는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밖에, 동생은 그 벽 안에.


... 햇빛에 눈이 녹듯 이 보이지 않는 벽도 녹아 없어질 수 있을까?


동생과 함께 만든 눈사람,

내가 동생과 하는 사소한 모든 일들이

동생이 삶에 대한, 자신에 대한 의지를 북돋는 일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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