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짜리 마음의 빚

by 나예스

‘칠전팔기’가 아닌, 15전 16기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응시했던 ‘양식조리 기능사’ 자격증 실기시험을 12년 동안 무려 열다섯 번 떨어지고 열여섯 번째에 합격했다.


내가 보부상같이 조리도구를 싸서 둘러메고 조리시험장에 가는 횟수가 거듭되니 고등학교 친구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 자격증이 그렇게 따기 어려운 거냐고. 이번에야말로 넌 합격할 수 있을 거라고. 12년 후 드디어 양식조리 기능사 실기시험에 합격했을 때, 사무실 직원이 물어왔다. 갑자기 양식 자격증은 왜 땄냐고.


조리사와 홀 서비스직 모두 서서 하는 일이었기에 21살에 다리 골절상으로 충격받은 이후 사무직과 회계 업무로 진로를 바꾼 지 오래인 상태였다. 서양 음식 조리사 꿈나무들에겐 꼭 필요한, 그러나 나에겐 쓸모없지만 간절한 조리기능사 자격증을 결혼한 지 3년이 지나서야 드디어 따냈다. 그 자격증은 그냥 자격증이 아니었다. 아빠에 대한 마음의 빚이었다. 그 빚을 상환한 것이다!


대구 동성로 시내에 자리한 조리학원. 거기가 내 고등학교 3학년 교실이었다. 대구 각지의 학교에서 제법 속 좀 썩였겠다 싶은 친구들이 몰려들었다. 친한 친구들이 수능 공부하는 동안 나는 진로를 달리 했다. 조리사 공부와 아르바이트로 사회 물을 좀 더 일찍 먹은 셈이다. 한식조리기능사 메뉴 실습을 병행하면서 응시한 조리 필기시험을 단숨에 통과했으나 문제는 실기시험이었다. 학원에서 그날 배운 것은 누구보다 잘했지만, 조리 순서를 외워 시험장에 가기만 하면 심장이 요동치고 머리는 새하얗게, 반대로 얼굴은 터질 듯 검붉게 타올랐고, 손까지 바들바들 떨렸다. 당시에는 요리를 이해하고 간 게 아니었다. 연습도 거의 없이 그저 순서를 외워서 매번 화학 실험하듯 치렀으니, 조리 시험을 망치고 오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는 걸 그때의 나는 몰랐다.


수능준비 대신 기술을 선택한 나에게 아빠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셨다. 아빠의 삶은 늘 '모'아니면 '도'였다. ‘모’와‘도’ 사이를 단계도 없이 훌쩍 뛰어넘는 사람이었다. 병원 의사가 가망 없다던 두 손가락도 다친 손가락을 철봉에 걸어 매달리는 지독한 운동으로 살려냈고, 그 손가락으로 치른 자격증 실기시험을 99점으로 합격한 사람이었다. 그런 의지의 사나이, 난 그런 아빠의 딸이니까 종목은 달라도 60점만 넘기면 되는 실기시험 합격 정도는 손쉽게 할 거라고 착각했다. 메타인지가 부족한 내가 놓치고 있던 것이 있었다. 아빠에겐 있고 나에게는 없는 것, 그것은 바로 ‘오기와 자신감’이었다.


너무 쉽게 기죽었고 포기 또한 빠른 나였다. 수학과 영어가 그랬던 것처럼 좀 자신 없는 종목을 만나면 ‘난 그거 못하는 사람’이라고 나의 한계를 정해 버렸다. 내가 높게 세운 마음속 '빨간 벽'에 스스로 갇힌 채 우물을 파고 있었다. 한국산업인력공단 건물로 또다시 들어설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길 바랐다. 거듭되는 시험에도 떨림이 멈추질 않았고 청심환도 소용없었다. 번호표를 받는 대기실에서부터 좀 전에 갔던 화장실을 또 다녀오고, 대기실 의자에 다시 앉으면 겨우 진정된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었으니, 조리시험장에선 말해서 뭣하랴.


탈락할 수밖에 없었던 외부 환경과 순간의 긴장성 실수를 합리화했다. 친구들에게 얼마나 많은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는지 모른다. 가족에게도 물론이었다.

“아니, 이번 메뉴는 진짜 붙을 수 있었다고. ‘감자 크림수프’를 하얗게 완성해야 하는 거였거든. 근데 한 개밖에 없는 가스레인지 화구에 뭐가 잔뜩 눌어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않는 거야. 자리 좀 바꿔 달라고 손들었지. 감독관이 보고 ‘알겠다’ 더니, 그냥 바로 시험 시작했잖아! 화구 반쪽은 아예 불이 안 나와서 수프가 끓지도 않는데 나머지 반은 바글바글 바닥 눌어붙고 난리 났지. 한쪽만 횃불처럼 불타올랐다니까. 아, 난 왜 맨날 이상한 자리만 당첨되는 건지 모르겠다.”

“어쩜 그렇게 시험 운이 없냐, 이?”

엄마가 위로의 맞장구로 포문을 여셨다. 나와 같은 요리학원에서 한식조리기능사를 취득한 엄마는 맞장구에 약 오르는 잔소리를 1대 3 배합으로 반죽해서 들려주셨다.

“근데 니 왜 떨어지는 줄 아나? 엄마가 가르쳐 줄까 말까? 뒷정리를 안 해서 그렇다, 알긋나? 깔끔하게 치워가면서 해야지, 위생 점수 무시 못 한데이. 말 나온 김에 니 방 정리 좀 해라.”

“아, 엄마는 무슨 뒷정리 타령만 하노! 만들 시간도 부족한데.”

엄마의 잔소리에 맞대응했다. 아빠 앞에선 꼼짝도 못 했으면서 엄마한테는 잘도 소리쳤다.


머릿속에 조리 과정이 다 있었다면 우왕좌왕하다 시간 초과로 작품을 덜 익혀 내서 실격된 적이 없어야 했다. 시간 초과뿐일까. 나의 핑계리스트는 무궁무진했다. 지급된 재료 한 가지를 빼먹거나, 칼을 바닥에 떨어뜨리거나, 손을 크게 베여 정신이 무너지거나, 냄비를 안 챙겨간 날에 나무 손잡이가 계속 돌아가는 냄비를 만나거나, 프라이팬에 코팅이 벗겨져서 오믈렛을 망치거나 하는 식이었다. 한식조리기능사를 네 번 만에 취득한 후에도 계속 양식, 중식, 일식 모든 시험마다 최소 두 번 이상의 불합격이 이어졌다. 듣는 사람이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반드시 있었지만, 결국 비루한 패자의 변명일 뿐이었다.


또다시 맞이한 어느 회차의 조리 시험 전날 아빠는 응원의 말씀은 없었다. 그저 일정 체크만 하실 뿐이었다.

“결과는 언제고? 일찍 들어가 자라. 칼은 잘 드나? 함 보자.

잠자리에 누워 뒤척이고 있으니 욕실에서 쇠를 다듬는 회전기계인 '그라인더'로 칼날을 다듬는 소리가 들렸다. 오밤중에 '쎄에에' 하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잠시 나더니 스극스극 숫돌로 마무리하는 소리를 듣다가 잠이 들었다. 눈을 떠 보니 내 칼 손잡이에 힘들게 팠을 이름이 새겨져 있고, 칼 등에는 언뜻 봐서는 티가 안 나는 음각으로 일 센티미터마다 점 5개 새겨 주셔서 감독관의 눈을 피해 재료 길이를 잴 때 요긴했다. 언제 적 썼던 건지 알 수 없는 책받침 바깥에 가죽을 덧대어 재봉틀로 박음질한 칼집을 만들어 주셨다. 잡이 쪽에는 찍찍이까지 달려있어 칼이 잘 봉인되어 있었다.


한 마디 생색도 없이. 완벽한 이 칼집 덕에 책가방에 넣고 뛰어도 가방이 구멍 날 걱정 없었고, 늦은 시간 귀가할 때 어두운 골목길에서도 내 등에 식칼을 안정감 있게 메고 있다고 생각하니 세상 안심이 되었다. 40여 명의 조리학원 학생 중에 이런 튼튼한 칼집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자긍심에 가슴이 절로 펴졌다. 시험장만 다녀오면 어김없이 어깨가 접히고 말았지만.


한식과 양식은 정식 과목이었지만 중식과 일식은 추가 비용을 내고 듣는 일종의 '사설 방과 후 수업'이었다. ‘합격할 때까지’란 명목으로 제법 많은 학원비를 내고 수업을 듣는 몇 안 되는 학생 중에 나도 끼어 있었다. 습 태도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우등생이었는데, 자꾸만 시험에 떨어지니 면목이 없어졌다.


아빠는 나를 책망하지 않았다. 잔소리 하나 없이 그저 잊을만하면 다음 시험은 언제냐고 물어보실 뿐이었다. 아빠의 카드 빚으로 마련한 학원비에 보답하지 못한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다 술독에 빠진 아빠가 있는 집이 지긋지긋해서 성인이 된 후 더 멀리멀리, 아빠로부터 달아도 1년에 한 번 꼴로 상기시켜 주시는 아빠의 은근한 집착을 피할 수 없었다.

“요즘은 서울에서 무슨 일 하노? 돈은 있나?”

“예, 돈은 있어요. 자리 잡았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돈 떨어지면 내려오라 할까 봐 돈이 있다고 대답했다. 계속 조리와는 상관없는 일을 하며 20대 후반을 살아가는데도 3분도 안 되는 통화 끝에 꼭 이런 말씀을 내 귀에 입력해 주시는 것이다.

“그라믄, 양식 조리 시험 준비는 안 하고 있나?”


이따금 괜한 죄책감이 들어 연습도 거의 없이 시험 접수를 했다. 문제작이 30여 가지밖에 안 되는 양식조리 기능사 실기시험이었는데, 15번이나 떨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실기 책에만 의존해서 요령도 없이, 조리에 대해 이해도 안 된 채로 시험응시료만 기부해 왔다. 그러다 서울에서 직장 퇴근 후 조리학원에서 올바른 방법으로 처음부터 다시 배웠다. 모든 양식 메뉴를 한 번씩 배우고 얼마 후 시험에 응시했다. 50분 동안 한 개의 가스레인지로 두 개의 음식을 완성해 내야 하는 과제에서 여유롭게 ‘뒷정리’까지 했는데도 10분이나 남기고 시험장에서 나왔다.


엄마의 말씀도 옳았다. 조리 과정 중에 '뒷정리'를 하면서도 막힘없이, 여유 있게 다음 단계로 갔다. 얼굴의 홍조도 없었다. 12년 만에 드디어 마지막 실기시험을 친 날, 시험장을 나오면서 이미 합격한 걸 몸과 마음이 알고 있었다.

‘이거구나. 그동안 했던 건 다 시늉이었고, 이렇게 해야 합격이구나.’

편안하게 발표일을 기다렸다가 실제로 ‘합격’ 글자를 봤을 때 핸드폰을 들었다.

“아빠! 저 양식 조리 기능사요! 드디어 합격했어요!”

“합격했다고? 그래, 축하한다.”

오랫동안 입원한 아빠한테 뛸 듯이 기뻐하며 자랑했으나 반응은 미지근했다. 언제나처럼 아빠 방식의 차분한 축하였다. 이제 와서 합격이 무슨 소용인가 싶은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12년짜리 마음의 빚을 ‘합격’으로 일괄 상환한 날부터 나는 뭐든,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종일 힘들고 바쁜 날, 그럼에도 제대로 된 결과가 없는 하루 끝에서도 용기가 생겼다.

‘양식도 따고 나니 하다못해 자신감이라도 올라갔는데, 지금 이 뻘짓도 다 쓸데가 있겠지.’

능력이 모자라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마음을 다잡았다.

‘양식도 16번이나 도전했는데 겨우 이 정도로 무너지겠어?’

내가 부모였다면 여러 번 떨어졌을 때 이번이 몇 번째냐, 돈이 썩어 나는 줄 아느냐, 못 붙으면 어떡할 거냐 협박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험 전날에 묵묵히 칼을 갈아주시던 심야의 아빠는 닦달 하나 없이 훌륭한 응원을 해 주셨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았던 그 모습은 합격 여부에 상관없이 자식에게 큰 울림을 주셨다. 그 색 바랜 자격증 공부에 아빠의 집착이 보태져서 나는 부질없어 보이는 일에도 조금 더 도전해 보는, 오기와 끈기가 있는 어른이가 되었다.


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