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부서질 때까지' 일하겠다던 아빠

by 나예스

보이스 피싱인 줄 알았다.

“박○○님 따님 되시죠? 여긴 ○○병원 응급실입니다. 아버지가 건물에서 추락으로 많이 다치셨어요! 보호자 동의가 있어야 해서 지금 바로 오셔야 해요! 언제 도착할 수 있으세요?”

“네? 어디, 무슨 병원요? 전화 주신 분은 누구신데요?”

독립하여 서울에서 생활한 지 오래였던 나는 20대 후반, 아빠는 40대 후반이었다. 대구에 살고 계시는 아빠가 주말 오전 강원도에서 크게 다치셨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일까. 벨소리에 잠이 깨자마자 다급하게 외치는 남성의 목소리에 조금 짜증이 났다. 아빠의 휴대전화 최신 통화목록에 내 번호가 있어서 전화했다는 남성분은 자신을 ‘간호사’라고 소개했다. 나는 그 사람을 아빠의 핸드폰을 습득한 사기범이라고 여겼다. 돈을 언제 요구할 건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병원의 어디 소속이며, 옆에 아빠가 실제로는지를 차분하게 따져 물으니, 간호사분이 급기야 화를 냈다.

“지금 그런 거 얘기할 상황이 아닙니다! 환자분 지금 피 많이 흘리시는데, 보호자 없으면 아무 조치를 할 수가 없어요! 언제쯤 올 수 있어요?”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제야 거짓말 같은 현실이 전화 너머에 있다는 사실이 인지되었다.

가족을 대표해 나에게 전화가 왔으니, 대구에 있는 가족들에게도 알려야 했다. 엄마와 동생들 역시 내 전화를 받고 좀 전의 나만큼이나 놀랐다. 아빠는 경북으로 건설직 출장을 가셨다가 철골 설치 작업 중 4미터 높이에서 낙상 사고를 당하셨다. 강릉 소재의 응급의료센터가 대구보다 더 가까웠던 모양이었다. 연고도 없는 지역을 향해 황급히 고속버스를 탔다. 도착하자마자 우선은 아빠의 생사와 다친 부위들이 궁금했다. 갈비뼈와 골반, 얼굴뼈까지도 골절되었다. 무엇보다 뇌를 다쳤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다. 겨우 이 2층높이인데 어떻게 여러 군데가 골절되고 뇌를 다칠까. 왜 하필 그 장소, 그 시간 아빠였어야 했는지 운명을 탓했다. 나는 대략 아빠가 언제쯤 낫고 퇴원할 수 있을지, 언제쯤 집에 돌아갈 수 있는 건지 알고 싶었다.

몇 시간 뒤 대구에 있던 엄마와 동생들도 중환자실 앞에서 만났다.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 우리는 마땅히 쉴 곳도 없이 의자에서 사흘을 대기했다. 뇌출혈 진단과 회백색 CT영상을 보여주는데, 도대체 뭐가 출혈 흔적인지, 이게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알 길이 없었다.

“아빠가 그사이 한 번도 안 깨어나셨어요? 수술 잘 된 거 맞아요?”

“의식은 아직 안 돌아왔지만, 수술은 잘 되었습니다. 앞에서 기다리셨다가 보호자 부를 때 있으셔야 합니다.”

의료진은 말을 아꼈다. 수술이 성공했더라도 어떤 이유로 깨어나기 힘들 수도 있었고, 예후가 어떻게 될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중환자실은 들어간 이유보다 거기에서 생기는 급성 폐렴이 더 위험할 수도 있는 곳이었다. 닫힌 유리문 위‘집중치료실’글자를 낯설게 바라보다가 건설현장 소장님께 자초지종을 들었다. 그날따라 비가 올 것 같아서 빨리 공장 철골 작업을 마무리 짓자는 호출을 받아 아빠도 투입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작업 중 밟고 있던 판이 빠지면서 2층 높이에서 떨어진 것을 멀리 있던 크레인 기사가 봤다고 했다. 보호자인 우리는 언제 이름이 불릴지 모르는 상태라 밥도 교대로 먹고, 쪽잠을 자며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설상가상으로 엄마는 새벽에 잠깐 병원 의자에서 가로로 누워 눈 붙인 사이 가방을 도둑맞았다. 몇 시간 뒤 남자 화장실 쓰레기통에서 엄마의 가방과 지갑이 발견되었다. 언제나 일생에 몇 번 없을 큰 사건을 겪는 순간마다 정신을 놓친 사람을 노리는 도둑이 있기 마련이었다.


아빠를 유리문 앞에서 기다린 지 이틀이 넘어가자, 그동안 아빠에 대한 기억이 구간반복되는 파노라마처럼 흘러가기 시작했다. 술에 절어 반 시체처럼 생활하는 날들, 밤만 되면 발악하는 위협적인 순간들을 숱하게 봐왔다. 이렇게 사는 건 무의미했고 쓸모없는 인간처럼 보였다. 어릴 적부터 나는, 아빠가 부모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행하시는 걸 몸소 겪으며 자랐다. 소주가 아빠를 삼키고 있을 때면 슬픈 사춘기의 나는 냉정한 마음이 일었다. 아빠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불효녀인 나를 혐오하면서 말이다.


무엇보다 아빠가 등학생이었던 내게 했던 말씀이 계속 맴돌았다.

"아빠는 이 손으로, 몸 부서고 뼈가 가루가 될 때까지 일해서 우리 식구 먹여 살릴 기다."

그 비장한 선언은 사고로 잘렸던 가운뎃손가락 끝이 둥글어지고, 잘릴 뻔했던 약지와 새끼손가락도 제법 많이 펴졌던 겨울에 하시던 말씀이었다. 용접할 때 손이 시리다며 힘겹게 펴 보이시면서. 우리를 위해서라면 몸이 부서질 때까지 일할 거라고 다짐하던 말씀, 왜 하필 그런 말을 하셨을까. 나는 단 한번 들었고, 엄마나 동생들은 아예 못 들었을지도 모르는 그 말을 아빠는 출근길마다 생각한 건 아닐까. 언제든 닥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는 서로 다른 현장에서 아빠는 손가락뿐 아니라 뇌출혈과 갈비뼈, 폐와 얼굴뼈에, 골반뼈까지 다고 말았다.


정말로 몸이 부서져버린 아빠가 눈뜨시기를 간곡히 기다리며, 내 머릿속에는 원망했던 짧은 기억이 지나간 자리에 좋았던 모습들이 거대하게 들어찼다. 어린 내 눈에 비친, 눈가에 잔주름 가득히 머금고 웃던 아빠의 눈, 냇가에서 통발을 놓으며 물고기가 잡히는 원리를 설명해 주던 생활지식인, 용접마스크를 쓰기 전에 '이쪽 보면 실명한다'라고 엄포를 놓으며 썰매를 만들었던 자랑스러운 나의 맥가이버. 의미를 찾고 새기고 또 새겼던 그 추억들이 아빠에게로 다시 마음이 향하게 만드는 힘이었다.


‘이대로 아빠가 다시 깨어나지 못하면 어떡하지?’

아빠를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사고가 죽음 코앞까지 몰아붙일 때 가족을 떠나보낼 마음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있을까. 의식 없는 채로 억울해하고 아파하고 있을 아빠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인생의 마지막날 떠날 준비가 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성인이 된 후 타지에서 독립한답시고 아빠와 거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로 육칠 년이 지나버렸을 때였다. 아빠는 아직 너무 젊었다. 나는 소리 없이 외치고 아빠를 마음으로 꽉 붙잡았다.

'아빠, 이렇게는 안 돼요. 제발 죽지 마세요!'

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