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이지만 어떤 일들은 어제처럼 생생하다. 건설현장 추락사고를 당한 아빠가 뇌출혈 수술 후 의식이 돌아와서 처음 가족 얼굴을 마주했다. 한 번 기적을 선물 받은 사람은, 그다음 기적도 바랄 수밖에 없는 걸까? 깨어나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20분간만 허락받은 면회에서 우리 가족은 다시 한번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술부위 주변으로 아무렇게나 급히 밀어 놓은 머리, 열렸다가 닫혔던 두피 절개선 위에 박혀 있는 몇 방의 타카 심, 혼란과 두려움이 맺힌 아빠의 눈빛, 모두의 얼굴을 대하며 어눌한 목소리로 겨우 '몰라요'라고 말하는 아빠의 입술. 수술은 잘 된 게 맞다는데 깨어난 아빠는 왜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는가. 의료진에게 '지금은 인지력이 다 돌아오지 않았으며 차츰 나아지긴 하겠지만 좋아지는 것도 한계는 있다'라는 말을 들었다.
며칠 후 아빠는 대구 집에서 가까운 2차 병원으로 이송하게 되었다. 계속 강원도 병원에 씻지도 못하고 잠자리도 없이 온 가족이 있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병원에서 연결받은 민간 이송 구급차는 총알택시 같은 위력을 보여줬다. 엄마는 택시 탈 때 기사에게 얘기했던 것처럼, '긴급 환자이송 911'이라 쓰여있는 구급차의 운전을 맡은 분에게도 "메다기 다시 눌러 주세요." 했다. 미터당 요금을 지불하는 형태였다. 도대체 얼마가 나올까 하는 걱정도 생겼다. 택시와 다른 점은 환자용 침대에 아빠를 눕힌 채 수액과 산소를 공급하며 응급처치를 맡은 분이 아빠의 상태를 옆에서 체크하며 이동한다는 점이었다.
눈앞에서 모세의 기적이 펼쳐졌다. 막힘 구간에 들어서자 우리를 태운 차량에서 만화 같은 사이렌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간헐적인 신호음에 따라 단 한대도 빠져나갈 수 없었던 2차선 도로 사이가 이리저리 벌어지며 양보의 경관이 펼쳐지자 나는 울컥 목이 메었다. 이 도로 위에서 환자보다 위중한 존재는 없으니 어서 가서 치료 잘 받으라, 그렇게들 응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그재그로 지나갈 때는 아빠 뇌가 흔들리는 것이 걱정되어 애간장을 태웠다. 이렇게 긴 시간 흔들리는 차에 계셔도 되는 것인지 뇌를 걱정하는 동시에 10만 원을 훌쩍 넘긴 요금 미터기를 곁눈질로 살폈다. 아빠는 언제까지 우리를 못 알아볼까. 이제 일도 못하실 텐데 막내는 아직 고등학생인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강원도에서 대구까지 사설 구급차 이용료는 20만 원 정도가 나왔다.
전원 하는 병원에 바로 입원할 세팅이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동안 의원급 이상의 병원에 가본 적이 없어서 몰랐다. 응급실은 병실로 올라가자는 그 한마디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뜬눈으로 전쟁터에서 밤을 지새우는 곳이란 것을. 응급실에서 가장 보기 힘들었던 장면은 수술로 며칠간 식사를 못 하신 아빠에게 미음을 공급하기 위한 호스를 코에 삽입하는 과정이었다.
"환자분, 금방 끝날 거예요. 꿀떡꿀떡 삼키세요, 꾸울떡."
저 호스를 어떻게 꿀떡꿀떡 삼킨단 말인가. 아빠는 코를 통해 목으로 거의 다 들어간 콧줄을 냉큼 뽑아버렸다. 팔을 꽉 잡으시라고 해서 잡긴 했지만 아빠는 우리 집에서 힘이 제일 센 사람이었다. 화가 난 아빠와 달리 응급구조사는 안타까운 표정과 단호한 명랑함으로 아빠를 진정시키고 다른 의료진에게 손목 보호 끈으로 고정을 요청한 뒤에 삽관에 성공했다.
"어, 잘하시네요, 그렇죠, 꿀떡꿀떡. 끝났습니다."
환자의 원망을 받으며 마취제 없이 환자를 구조해야 하는 그 일도 사명감 없이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다친 부위 수만큼이나 다양한 진료과의 의사가 다녀갔고, 복사해 간 진료기록 CD와 상관없이 다양한 방식의 촬영이 새로 시작되었다. 다른 환자들과 보호자들의 지옥을 함께 공유하며 환한 응급실 보조의자에서 꼬박 날을 샜다.
사고로 뇌가 손상된 아빠는 인지력과 기억력, 지남력뿐 아니라 충동 조절 장애까지 생겼다. 그런 아빠를 '신경외과' 병동에서는 감당하기 어려워했다. 아빠는 자신의 몸에 들어오는 어떤 이물질도 용납할 수 없었나 보다. 어떤 간호사는 수액 라인이 막혀 바늘 자리를 바꾸려다 위험 신호로 인지한 아빠에 의해 손목이 비틀렸다. 봉변을 당한 간호사는 얼마나 서러웠을까. 밥을 떠먹여 주려는 엄마의 손목도 아빠는 순식간에 꺾었다. 도대체 그런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좀 전에 했던 자신의 행동을 기억하지 못하는 환자의 돌발 행동과 낙상을 막기 위해 신경외과 의료진 셋이 밤마다 사지를 묶어야 했고, 그 환자는 링거를 줄 째 뽑거나 소변줄도 뽑아버렸기에 종종 낮에도 묶어야 했다. 나는 사지가 침대 철봉에 초록색 끈으로 묶인 아빠를 볼 때마다 이곳이 종합병원이 맞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자초지종을 듣고 나면 철없는 생각이었고, 병원에 폐를 끼치고 있는 중이었으며 결박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엄마는 아빠의 병상을 밤낮 지켰다. 나는 가끔 주말에 기차를 타고 대구로 가서 간병하던 엄마를 집으로 보내 교대해 주었다. 아빠가 휠체어를 탄 채 휴게실 TV를 보고 있을 때 나는 호기롭게 엄마를 집으로 쫓아 보냈다. 아빠에게 나를 알아보시겠느냐, 큰누나 아니고 큰딸이다, 이거 기억나느냐 등의 일방적인 대화를 시도하다가 1시간도 안 되어 진땀을 뺐다. 공포의 밥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아빠는 병실로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으셨다. 식판을 들고 휴게실 아빠의 휠체어 앞으로 왔다. 어린아이처럼 혼자서 밥을 먹을 수 없는 아빠의 입에 한 숟갈을 먹여보려 했다.
"아빠, 아 해보세요. 아, 네? 아빠?"
밥 먹이는 일이 그렇게 힘든 거였나? 입속으로 밥이 들어가기 직전일 때마다 요리조리 고개를 돌리며 거부하는 바람에 10분째 아빠 밥 한 숟가락도 못 먹인 나는 울상이 되었다. 내가 마음에 안 드시는 것인지, 엄마는 언제 오시는 건지 시간은 왜 이것밖에 안 지났는지. 정말로 엄마가 못 잔 잠을 집에서 푹 주무시고 늦게 오시기라도 한다면 나는 그때까지 아빠를 굶기고 있어야 할 판이었다.
반나절 같은 1시간 30분이 흘렀다. 엄마가 새 칫솔과 비누, 그새 만든 반찬거리를 만들어 들고 되돌아오셨다. 구세주였다. 집에 가서 청소까지 하고 한 순간도 쉬지 못한 게 뻔히 보였지만 평소 아쉬웠던 필요물품을 셀프로 공급한 엄마의 표정은 태양같이 밝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밥시간 맞춰 온다는 게 버스가 어찌나 안 오는지. 아빠 보는 거 쉬울 줄 알았지? 엄마가 어떻게 먹이는지 자, 봐라.”
"안 먹는다!"
“아이고! 저게 뭐고?”
고집부리던 시선을 돌리는 데 성공한 엄마는 그새 아빠가 입술에 힘을 풀고 방심한 찰나, 얼른 고봉으로 쌓은 밥숟가락을 잇사이로 떠밀어 넣어주었다.
"맛있제?"
아빠는 엄마를 잠시 흘겨보는가 싶더니 정말 복스럽게 씹어 삼켰다. 정답을 알고 있는 엄마의 여유는 감탄이 절로 나오게 했다. 그렇게 병원에서 내 부모는 팔자에 없는 금실 좋은 부부로 불렸다. 그러나 때가 되니 다른 작은 병원을 권유받았다. 다루기 힘든 환자였나 보다. 치료해도 상태가 여기에서 더 좋아지기 어렵다는 설명을 듣고 다른 병원도 돌았지만 유독 아빠의 퇴원만 자주 찾아오는 것 같았다. 퇴원 후 집에서 위태로운 시간을 보내다가 입원하면 얼마 후 다른 병원으로 쫓겨났다.
재입원 전 퇴원 했을 때마다 집에서의 생활은 남은 가족들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아빠는 캄캄한 새벽에 습관처럼 지갑과 집문서와 차키를 요구했다고 했다. 아빠가 잃고 싶지 않은 게 뭔지는 가족 모두가 알았지만, 아빠의 손에 쥐어져서는 안 될 일이었다. 주무시던 엄마의 목이 졸려서 경찰을 부르기도 했다고 했다. 위험했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그럭저럭 살아갔던 한 가정의 일상이 박살 났다.
뇌를 크게 다친 환자의 24시간 돌봄이 더 중요한가, 24시간을 돌보면서도 위협을 받아야 하는 가족의 안위가 더 중요한가? 환자는 다친 것이 가족에게 죄를 지은 것인가? 가족은 환자를 돌보지 못하면 죄인인가?
괴로웠다. 양 쪽 다 혼돈 속에 피해자로 남았을 뿐이었다. 엄마는 억새같이 버티며 24시간 보호자이자 간병인으로서 세 번의 겨울이 지나는 동안 가족 철새처럼 병원을 옮겨 다니며 살았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바뀌는 6인실 다른 환자의 간병사들과 '언니동생'하는 사이가 되어 요령 있게 부탁하기도 했다.
"언니야, 내 화장실 좀 다녀올게. 자고 있으니까 잠깐만 봐줘이?"
나의 여동생은 종종 엄마와 하룻밤씩 교대해 주기도 했다. 엄마의 하룻밤을 체험한 후 동생은 병원 보호자용 간이침대에서 한숨도 못 잤다며, 엄마의 노고에 감사함과 안쓰런 마음을 느꼈다고 했다. 엄마가 잃어버린 3년 동안 치열하게 해 왔던 그 일을 나는 절대로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새 나도 서울사람이 다 되어 결혼식을 앞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