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 사고로 뇌출혈 수술하셨던 아빠가 언젠가부터 내 얼굴도 알아보실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아빠가 어릴 적 기억은 잘 나는데 최근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병원에서 하루 세 끼니의 밥을 드시고도 종일 굶었다고 하시고,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고 집에 가고 싶다고도 하셨다. 아빠의 상태가 더 좋아지기는 어려워 보였으나 위급한 시기를 넘긴 지 1년 반이 흘러서 오랜 연애 끝의 결혼식도 준비하게 되었다. 아빠가 저런데, 내가 꼭 지금 결혼식을 해야 할까?
'아빠가 저런데', 그건 어릴 적 명절마다 들어온 말이었다.
"느그 아빠는 저러고 있는데, 느그는 뭐가 좋아가 시시덕거리고 있노!"
할아버지의 속상한 고함이었다. 아빠가 명절을 목전에 두고 술을 드시기 시작하면 명절 때는 걸어서 5분 거리의 할아버지 댁에 들르지도 않고 집에서 취해 있었다. 부모가 속 썩이지 않는 양지바르게 큰 사촌들이 부러웠다. 술을 좋아하는 친척들이 있긴 했어도 명절 때는 다 웃는 얼굴로 할아버지 댁에서 모였다. 아빠만 아빠의 부모와 남매들을 뒤로한 채 술과 잠만을 택했다. 아빠의 자식 삼 남매는 눈칫밥을 먹으며, 사촌들과 놀다 웃는 것도 상황 따라 참아야 했다.
아빠가 불행하게도 '저러고' 있으니까 너희들은 행복한 웃음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은근한 강요였다. 부모가 잘해야 그 자식도 예뻐 보이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아빠는 아빠고, 나는 나고, 내 동생들은 내 동생들인데 아빠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안마를 도맡아 했다. 친척 중 누구도 하지 않는 안마를, 인정받기 위해서.
"어이구 시원테이, 아 손이 와 이리 꼼꼼하노. 니가 큰 아다. 니가 소자다. 나중에 안마사 해라. "
"네, 저는 안마사 되려고요."
그때 들은 그 말이 얼마나 큰 소질 발견이었으며 장래희망이었던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시원하다며 얼굴에 만개한 웃음을 보일 때만큼은 나는 '다 컸다'는 소리와 효녀라는 의미의 '소자'라고 불렸다. 그 말이 듣고 싶어서 손이 정말로 하나도 아프지 않은 척을 했었다.
아빠가 저러고 있어도 내 인생은 내 인생이었다. 아빠 상태가 더 이상 좋아지기가 어렵다면 결혼식은 빠를수록 적기였다. 다만 걱정은 있었다. 아빠가 서울까지 오셔서 혼주석에서 돌발 행동 없이 얌전히 있으실 수 있을까. 신부입장은... 혼자 해야겠지.
"큰 딸이 결혼한다고? 그러면 내가 가야 안 되겠나."
동생이 언니의 한 달 뒤 결혼 소식을 알리자, 아빠는 그렇게 말씀하시며 매일 휠체어를 떼는 연습을 했다고 했다. 내가 가야지, 하시며. 병원 복도 벽 쪽에 길게 난 손잡이를 잡고 엄마와 함께 걷는 연습을 한 달 하시더니 결혼식날 내 손을 잡고 신부 입장을 하는 기적을 보여주셨다. 반보 씩 조금 천천히 걸으셨지만 잘하셨다. 아빠의 살아가는 힘은 이런 목표의식에 있는 것은 아닐까? 아빠의 의지와 집념에 다시 한번 감탄했고, 감동도 했다.
이틀 외출 후 다시 병원으로 복귀하고 나서는 다시 한동안 휠체어를 타시다가, 차츰 다시 걷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문제가 생겼다. 병원의 야외 정원을 산책하시면서 남들이 피던 담배꽁초와 다 쓴 라이터를 몽땅 주워 환자복 주머니에 불룩하게 담으셨던 것이다. 고집 센 아빠는 쓰레기를 줍는 게 아니라 금은보화를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데 아무도 담배를 안 주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어떤 날에는 보호자인 엄마와 온 병원이 잠든 사이 병원을 빠져나가 위험천만한 도로 한 중간으로 가셔서 택시를 잡으셨다. 택시 기사가 '정말로 큰일 날 뻔했다'는 말과 함께 환자복에 적힌 병원이름을 보고 제보해 줘서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고 했다. 병원에서 관리하기 힘든 환자는 또다시 퇴원 후 타 병원에 가라는 권유를 받았다.
신혼여행이 끝나자마자 엄마는 내가 일하는 시간에 계속 전화를 걸어 30분이고 1시간이고 아빠의 감당키 어려운 기행을 얘기했다. 집에서 통제하기 힘든 걸 넘어 자주 위협을 받아 경찰을 불러야 했던 엄마에게는 '첫딸의 결혼식'이 버틸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나 보다. 날마다 나에게 이혼 허락을 구했다. 내 결혼 끝나자마자 부모 이혼이라니. 아빠는 뇌를 다친 환자인데 아빠를 버리고 이혼을 한다니. 엄마 마음을 잘 타일러 주면 시기를 잘 넘길 줄 알았는데, 엄마는 시댁의 응원대신 험담까지 들었다고 했고, 아빠의 보호자는 피해자가 된 지 오래였다. 아빠는 술을 안 드셔도 만취상태와 같은 환자였다. 엄마와 여동생이 받는 위협의 정도가 심해지면서 나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매일같이 이혼 허락을 구하는 전화를 건 지 한 달이 다 되어 갈 무렵이었다.
"엄마, 그럼 이혼해라.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자식의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다. 지금까지 한 것만 해도 대단한 거지."
합의 이혼은 4주도 안 되어 끝이 났다. 당장 주거지를 분리해도 좋다는 법원의 설명이 있었다. 엄마는 내가 있는 서울로 오고 싶어 했다. 빛의 속도로 신혼집 빌라 문 앞에 7개의 택배박스가 배달되었다. 이삿짐이었다. 전셋집을 구할 때까지 우리 집에서 머물게 된 것이다.
새로운 가정이 생긴다는 건 기존 가정에 신경을 더 적게 쓰게 된다는 의미다. 자식을 결혼으로 독립시킨다는 건 그때부터 부모가 독립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난 결혼으로 하나의 가정을 만들고, 부모의 이혼으로 책임져야 할 두 가정이 곧바로 생겼다. 엄마와 여동생의 서울에서의 독립을 돕고, 혼자가 된 아빠의 대구에서의 안전한 일상을 신경 써야 했다. 남동생은 그때 자기 신변 하나도 감당키 어려운 상황이었으므로 나의 어깨는 무거웠다. 아빠가 있는 도시에 아빠의 직계가족은 하나도 없고, 아빠의 형제들이 돌아가며 돌봐주시거나 입원을 도와주셨다. 친척들의 모든 연락은 나에게 왔다.
부모의 이혼으로 아빠 옆 엄마의 '난 자리'는 확장하는 블랙홀이었다. 엄마는 아빠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고, 우리 집은 임시 해방촌이었다. 아빠를 신경 쓰느라 힘들어질 때마다 나는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엄마는 이제 법적으로 아빠 일에 관해서는 완벽한 타인이었다.
'이렇게 나한테 아빠를 다 떠넘기려고 매일같이 허락을 구한 거였어?'
우리 집 한 방에서 엄마와 동생이 같이 산 지 한 달이 되니 집 근처에 작은 다가구 주택 전셋집도 구할 수 있었다. 21살에 결혼하신 후 할 만큼 다 해서 미련 없이 아빠 곁을 떠난 엄마는 이제야 자신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적어도 활기를 찾은 듯 보였다. 그러나 함께 사는 여동생은 엄마가 지난밤에도 아빠에게 목을 졸리는 꿈을 꾸면서 자신의 목을 잡으며 잠꼬대를 하더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엄마의 고통과 트라우마에도 내가 너무 모른 체 하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성인이 되길 기다렸다가 상경했던 사람이라 남아있던 가족들이 겪었던 고통을 겪지 못했다. 어릴 적 아빠와의 추억이나 감상적으로 떠올리며 불쌍한 사람이라 생각했지, 보호자의 이름으로 남아있다가 이제야 해방된 다른 가족의 고통을 상대적으로 가벼이 여겼다.
아빠가 '저러고' 있다고 해서 나머지 가족이 모두 '그러고' 있어야 한 건 아닌데. 아빠가 사고로 뇌를 다치지 않고 술만 드시며 '저러고' 있었어도 이때와 같은 아빠에게 편향된 마음이 들었을까? 아니었다. 동생들보다 조금 더 많은 추억을 기억했던 나는 아빠에게 닥친 불행한 사고 이후 모든 것을 미화시키며 지옥 같은 다른 가족의 현실을 외면해 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