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 항아리에 아빠를

by 나예스

아빠 연세 쉰도 안 되었을 때, 그리고 내 나이 서른도 안 되었을 때부터 나는 아빠의 보호자가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빠와 내 역할이 바뀌었다. 하필이면 대구에 거주하시는 아빠 말고도 내가 지켜야 할 가정이 서울에 생겼을 때부터였다. 엄마는 3년가량 아 보호자로서 원에서 간병을 하며 산업 재해 심사를 통해 재해연금이 다달이 나오도록 해 두셨다. 그리고 이혼한 엄마는 비로소 연분 없는 대구에 안녕을 고했다. 서울의 내 신혼집에서 한 달간 엄마와 여동생은 집을 구하며 거주하다가 전셋집을 구해 나갔다.


서울에 시집간 후에도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던 나는 아빠집 근처에 사시는 할머니가 자주 왕래 해주셔서 한동안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고모들도 할머니를 챙기러 들르시면서 아빠를 챙겨 주셨다. 아빠는 무엇보다 당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기억을 못 하셨다. 전화를 걸어 내게 물으셨다.

"엄마는 어디 갔노? 내가 이혼을 했다고? 내 기억이 하낫도 안 나는데."

해 왔던 행동에 대한 후회 대신 기억이 나지 않는 아빠의 목소리가 어리둥절했다. 그래. 아빠는 전두엽도 다쳤지. 피해자는 있어도 가해자는 없는 알츠하이머는 아빠에 대한 연민을 더욱 키우게 했다.


아빠의 통장은 할머니가 맡아 주셨다. 장기적으로 입원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아빠 역시 편한 아빠의 집에 있길 강경하게 원하셨다. 문제는 지적장애인이 된 후 혼자 생활하기 어려운 상태라는 것이다. 연세는 노인이 되려면 멀었고, 시 산재 보상을 받는 환자는 주민센터의 간병이나 돌봄 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고 했으며, 간병비는 턱없이 부족했다. 현실적으로 밤낮 구분이 없는 아빠에게 24시간 간병인을 상시로 붙인다는 것은 답이 나오지 않는 일이었다.


적막한 집에 혼자 남은 빠의 선택은 역시 술을 마시는 것과 목공일을 취미 삼아 하시는 것밖에 없었나 보다. 이웃들이 아빠 때문에 불안해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빠 집을 근거리에서 매일 왕래하던 할머니도 기력이 없어지고 있었다. 사람이 줄어든 집안에는 주워온 재활용품과 가전기기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자식 셋 중 누구도 아빠와 함께 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야말로 내 삶 없어지고 오로지 간병과 감당, 위험요소만 있는 삶이 예견되었다.


어느새 우리도 아이를 낳았다. 세 돌이 지날 때까지도 통잠을 단 세 번밖에 자지 않고 밤에 여러 번 깨는 아이를 양육하며 직장에 다녔다. 아이가 울어 2시간마다 깨는 나도 잠이 부족했지만, 남동생이 2교대 일을 마치자마자 아빠를 데리고 응급실에서 밤을 지새우는 고통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새벽 2시에 아기를 달래며 재우려는 나에게 전화가 왔다.

"누나, 전화 끊으면 안된데이! 나 혼자서는 감당이 안된다. 여기 못 오제? 잠을 못 자서 나도 미치겠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노? 머리가 하얘서 의사가 오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빠는 응급실에 가고 입원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혈당 조절이 안 되기도 했고, 집안에서 나무뿌리 공예품인지 어딘지에 박아 다치기도 했다. 남동생은 피를 보면 쇼크가 왔다. 차량도 없는 내가 서울에서 아기를 안고 달래는 새벽 시간에 대구의 응급실 남동생과 속삭이는 목소리로 통화하며 몇 시간을 보내는 밤은 너무나 힘이 들었다.


근심하는 나에게 남편이 고맙게도 말을 건넸다.

"차라리 아버님을 서울로 데려 오는 건 어떨까? 우리 집은 방이 없으니까, 우리 집 근처에 월세방이라도 하나 마련 해 드리면 오며 가며 살필 수 있잖아."

십수 년을 살던 곳이기에 '내 집'이란 인지가 되어 있었지, 서울로 모시고 오면 분명 내가 어릴 때 길을 잃은 것처럼 아빠도 길을 수시로 잃을 게 분명했다. 회사 일 하다가 집에 뛰쳐 가야 할 확률, 휴대폰을 놔두고 다니시는 아빠를 잃어 온 동네를 수소문하고 다닐 확률, 아빠가 집을 잃거나 비밀번호를 모를 확률 등을 생각하니 정신이 어질 해졌다.

"마음은 정말 고맙지만 간단한 일이 아니야. 우리는 아빠 성질을 절대 못 이겨. 분명 집에서 무슨 일이 생기거나, 아빠를 돌본다고 우리 생활은 없어지고 말 거야. 그리고 우리 아기한테 아빠가 실수로 무슨 해라도 끼치면 어떻게 해..."

"그럼 어쩔 수 없이 평생 병원 생활 해야 될까?..."

"나도 모르겠어. 이게 맞나 싶어. 나도 괴로워!"


뇌를 다쳐 신경외과 진료를 마치고, 뇌가 영구 손상 된 상태로 자리를 잡으면 그다음은 정신과 입원이었다. 아빠는 요양병원에 가기엔 너무 젊고 힘이 넘쳤다. 아버지가 술에 만취해 정신을 잃고 있을 때 할머니와 남동생의 싸인으로 대학병원 정신과에 보호 입원을 하게 되었다. 쾌적한 시설에 살인적인 병원비와 24시간 간병인의 간병비를 며칠마다 입금해 주다 보면 한 달도 안 되어 500만 원 이상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다시 상태가 좋아지면 집에 와서 또다시 술을 드시고 다시 입원이 반복되었다.


1화에서 얘기했듯이 내 가장 오래전 기억은 6살 때 슬리퍼 신은 발로 뱀을 잡겠다고 밟다가 아빠가 구해 준 일이었다. 아빠는 직접 만든 '뱀 집게'로 잡아서 내 키만큼 깊은 뱀 항아리에 가두었다. 시골 내 집 마당을 지나가는 뱀은 보기만 하도 겁이 나는 존재였다. 내 연한 살갗의 발을 물려했던 유혈목이는 하마터면 나를 죽였을지도 모른다. 혹시 물리기라도 한다면 당장 쓸 수 있는 약도 없서 뱀이 항아리에 들어가면 난 안전하다고 느꼈다. 지만 뱀으로서는 길을 잘못 들어 봉변을 당한 것이었다.


내 괴로움은 아빠를 '뱀 항아리'에 넣은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아빠가 입원하면 나는 한동안 걱정을 줄일 수 있었다. 안전한 아빠, 전한 이웃, 사고를 막기 위해 나대신 감당해주는 시설, 대학병원 정신과 병동에서는 개인 휴대폰이 주어지지 않아 보호자가 전화를 걸어야 통화가 가능했다. 처음 한 두 번 통화할 때 아빠는 반가워하시다가 이내 지겨워지셔서 소리를 치셨다. 나를 왜 여기 가두냐고, 나는 내 집에 가겠노라고. 그러면 나는 며칠이고 침울해졌다. 퇴원을 하면 또다시 예견되는 일들이 떠올랐다.


아빠의 강경한 원대로 퇴원을 했고, 고맙게도 반찬을 사다 주시는 고모들이 있었다. 아빠에게 체크카드로 밥을 사드시라고 거듭 말씀드리며 국밥집에서 승인된 알림 문자를 보며 안심했다. 러다 마트 결제 문자만 왔다. 혹시 또 술만 드시는 건가 해서 전화했다. 목소리에 별로 힘이 없었다. 다음날 저녁에도 전화했다. "이만 끊자, 괜찮다."라고 말씀하시는 아빠의 숨이 가빠지고 계셨다. 황급히 연차를 내고 이른 아침에 KTX를 탔다. 아빠 집에 도착해보니, 일이 터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