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보기 위해 남기는 상처

by 나예스

아빠가 입원한 동안 4살었던 아이와 께 아빠 집의 핏자국을 지우러 가기 위해 기차를 탔다. 동생은 피를 보면 쇼크가 오기 때문에 내가 아빠 집에 지우러 갔다. 아이에게 여주고 싶지 않은 광경이지만 맡길 곳이 없어 함께 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주말에 휴무가 있고 남편도 엄마도 주말에 일을 기 때문이다.


아빠 집으로 수세미, 행주, 과산화수소, 락스, 돗자리, 욕실슬리퍼를 미리 배송시켜 두었다. 현관 앞에 높이 쌓인 박스를 개봉해서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먼지 쌓인 집의 내 방이었던 곳에 캐릭터 돗자리를 펴고, 아이에게 마스크를 씌우고, 새로 산 노래하는 동화책을 개봉해 주며 말했다.

"아들, 엄마 집청소를 해야 해서, 이거 보고 눌러서 노래 따라 부르고 있어."

"응."

아이는 그 방에 있지 않고 자꾸 나를 쫓아다녔다.

"엄마, 왜 할아버지 집에 할아버지 없어?"

"아프셔서 병원에 계셔."

"엄마 이거 뭐야? 똥이야?"

"피. 할아버지가 넘어지셔서 피가 좀 났었나 봐."

"엄마! 여기도 피! 여기도 피, 빨리빨리!"

아이는 어진 핏자국을 보면서도 독 예민하게 반응했다. 아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며 약품과 수세미와 걸레로 핏자국을 지웠다. 눈에 보일까 말까 한 덜 지워진 자국까지 찾아 지적했다. 그리고 11살인 지금까지 핏자국 한 방울만 봐도 소름 끼쳐한다. 그날의 장면을 아이가 아직도 기억하는 것이 마음에 남는다.


대학병원에서 아버지가 자꾸 넘어지셔서 낙상 위험이 있다며 정신과 병동 입원이 어렵다고 했다. 협력병원으로 공동간병인 병실이 있는 정신과 병동으로 전원을 했다. 아버지에게 휴대폰을 드려 상시로 전화할 수 있게 했더니, 밥이 너무 맛있다며 안부 전화도 잘하셨지만, 며칠이 지나고 나자 역시 퇴원시키라고 성을 내셨다. 이제 직장도 슬슬 알아보실 거라며 연장이 잘 있는지 집에 가봐야 한다고 했다. 지금 집에 가시면 그때처럼 쓰러질 수도 있다고, 인슐린 주사 하루에 두세 대도 맞으며 당뇨 관리도 받아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수간호사님이 전화도 주시면서 상태도 말씀 주다. 언제부턴가 먹는 약만으로도 당조절이 된다고, 혈당 체크를 위해 바늘로 손가락을 찌를 때마다 아빠의 성질이 감당이 안된다고도 했다. 치매 패치를 등에 붙이면 더 진행되는 것을 막아주는 효과도 있을 거라 해서 패치형 치료제와 영양식도 추가로 넣어 달라고 주문했고, 밥을 엄청나게 잘 드신다고도 전해 들으며 다행이라 여겼다. 다만 모든 음식을 국에 말아 짬뽕밥으로 드시는 것만은 변함없었다. 맛을 느끼며 먹는 게 아니라 그저 먹어내야 하는 사람처럼. 병원에서는 무엇보다 술과 담배를 못하시는 것이 가장 안심이 되었다. 술은 위험요소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니까.


대구까지 먼 거리를 왕래하는 게 어려워서 내가 있는 서울 병원을 알아봤다. 상 위험이 있는 환자를 받아주는 정신과 병동을 구하는 게 하늘의 별따기였다.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 전화를 돌리면서도 정보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버스를 타고 지나가며 보이는 것은 죄다 요양병원이었다. 부모를 의탁하는 사람이 저렇게도 많다는 사실을 간판들을 보며 알았다. 저분들의 자식들은 모두 나와 같은 죄책감과 불편함을 품고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요양병원도 몇 군데 알아본 끝에 공동간병인이 있는 요양병원으로 전원 요양 회송서를 보냈다. 병원에 도착해 간판을 보신 아빠는 사무치게 탄식하며 주먹으로 힘없이 나의 어깨를 쥐어박으셨다.

"뭔데? 여긴 죽으러 가는 곳 아니가! 니, 진짜로 너무 한다."

그때의 아빠의 나약해진 주먹과 온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울상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만큼 나에게도 아픈 상처다. 나는 가까운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도로 아빠를 살려보려 하는 거였지만 아빠로서는 정반대로 느꼈을 것이다. 차라리 정신과 병동보다 요양병원이 낫다고 여기실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이곳에 계시면 나와 여동생, 사위와 손주가 자주 찾아뵐 수 있다고, 대구에 아빠 혼자 있으면 자주 찾아뵙기 어렵다고. 낙상 위험 때문에 갈 수 있는 병원이 많지 않았다고, 더 나은 병원을 알아보겠노라고, 아빠는 집에 혼자 계실 수 없는 상태라고 설득했다.


병원 실장은 데려만 오면 다 알아서 입원될 것처럼 얘기했지만, 막상 도착하기로 한 시간에는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외근 중이라며 보호자가 직접 설득해야 한다고 했다. 의지할 곳 없는 나, 세상 혼자인 아빠. 여러 대화 끝에 아빠가 입원을 승낙하셨다. 실제로 아빠 병실까지 가는 중에 언뜻 스친 병실들 중 아빠보다 젊거나 잘 걷는 환자는 없어 보였다. 아빠가 생각하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소독약 냄새에 속이 메스꺼웠다.


퇴근 후에 간식을 사들고 가고, 자주 가족들과 뵈러 갔다. 출입이 자유로워 아빠는 스스로 병원 주변 공원에 산책을 하며 다리에 힘을 실었다. 면회를 가면 마치 마당 앞에 마중 나온 듯이 병원 앞 공원에 이미 모자를 쓰고 나와 계시는 아빠와 간식을 나눠 먹기도 했다. 조절이 잘 안되어 간식도 조절했다. 걷기 운동을 할 수 있는 상황으로 다리가 회복되는 것도 다행이었고, 운동을 마치면 다시 병실로 들어가서 식사를 하시는 아빠도 다행이었다.


아빠의 시간은 멈춘 듯한데 아이는 빠르게 자랐다. 할아버지 뵈러 가는 날이라고 하면 아이는 물었다.

"엄마, 왜 할아버지는 병원에 있어요?"

"응, 건물을 짓다가 떨어지는 사고로 뇌를 다치셨거든... 그래서 기억을 못 하셔. 뇌를 크게 다치면 다른 사람 도움 없이 혼자 있는 건 어렵거든. 너무 답답하시겠지만 지금은 우리가 자주 찾아가는 수밖에 없어."

"나도 뇌 안 다치게 해야겠어요."

그 후로 아이는 골목을 달리다 넘어지는 찰나에도 머리가 땅에 박지 않게 고개를 바짝 들었다. 머리 안 다치려고 손바닥을 짚었다며 쓸려서 모래가 박힌 손바닥을 보여주며 기뻐했다. 그 모습이 안타깝고, 죄책감이 들었다. 아빠 집에 남은 피를 닦던 날 뒤로 핏자국만 보면 질색하는 아이도 안타까웠고, 필사적으로 뇌를 지키겠다는 태도를 보면서도 다행보다는 안타까움이 컸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 스쳐 지나갔다. 같은 병이라도 부모일 때와 자식일 때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을 떠올리면서도, 끝내 그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