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사랑과 결혼, 그리고 마지막 인사

by 나예스

아빠의 '그 노트'가 아니었다면 엄마와 아빠는 결혼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간혹 아빠의 낡은 무선 노트를 보곤 했다. 내가 12살 때쯤 책장 앨범 사이에 꽂혀 있던 얇은 노트를 발견하고 아빠의 무용담을 듣고나서부터 기록의 중요성을 인지했다. 내가 노트에 끄적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된 것도 어쩌면 아빠의 노트에서 출발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한껏 힘주어 쓴 아빠의 청춘 기록이 있었다. 한때 아빠의 고뇌하는 마음이 담긴, 스무 살의 기록 말이다. 볼펜으로 지그재그를 그어 그린 소나무도 있었다. 부모님이 부부싸움을 할 때면 난 도저히 엄마와 아빠가 사랑을 했었던 사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그래서 아빠가 술을 드시지 않는 기간에 물어보았다.

"아빠, 근데요. 아빠는 엄마의 어디가 좋아서 결혼했어요?"

"그런 건, 와?"

"결혼을 엄청 일찍 하셨잖아요. 예뻤어요?"

나는 눈을 반짝이며 아빠를 빤히 봤다.

" 지끄므."

아빠는 대답하기 난처한 질문을 하거나 웃어넘기려 할 때 가끔 '지끄므'라고 했다. 단어가 사투리인지, 외계어인지 알 수는 없어도 그런 상황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가끔 할머니 앞에서 까불까불 웃겨보려 할 때 할머니는 웃음을 참으며 "지랄한다." 하시며 고개를 돌려 마저 웃으셨다. 아빠가 "지끄므."라는 말과 함께 눈가에 참새발 같은 잔주름을 잡힐 때면 '나 좀 재치 있었나? 아빠 설마 방금 부끄럼 타신 건가?' 하고 배시시 웃곤 했다.


"제주도 가믄 바가 안 있더나?..."

'안 있더나?'는 있더라는 말이다. 아빠가 긴 이야기를 꺼낼 때 들이는 뜸이었다. 막연하게 바닷가 한 장면을 떠올렸다. 고개를 들어 왼쪽 허공을 응시하는 아빠 첫사랑 이야기의 서막이 열리는 듯했다.

"여기는 죄다 산 아이가. 제주도에 바닷가 가면 사방 천지가 뻥 뚫린 기라. 앞에 파도가 바닷가로 막 오는데 저 - 끝에. 머리가 허리까지 오는 인어공주가 떠억 하니 서 있는 기라."

"인어공주요?"

나의 막연한 상상 속 바닷가 풍경에 가리비를 착용한 인어공주가 꼬리지느러미를 딛고 사뿐히 서 있었다.

"긴 생머리가 바닷바람에 촤악 흩날리는데. 고마 뿅 갔다 아이가."


아빠는 낭만적인 바닷가에서 발견한 아가씨의 뒷모습에 반한 거였다. 엄마, 아빠가 사이좋았던 시절을 얘기하니 안도감이 들었다. 청년이었던 아빠는 엄마와 만나기로 한 날 제주도 한 다방에 노트 한 권만을 들고 갔다고 했다.

"저라는 사람을 아실라믄 이거를 보면 참고가 될 겁니다. 뭐, 이런 사람입니다. 그거 들고 가이소, 했지."

"그래서 엄마가 뭐래요?"

"말이 어디 필요 있노? 필적 좋고 뭐, 이 소나무에 대한 시, 스무 살, 스물한 살에 쓴 일기, 이 사람 알이 꽉 찼구나, 생각했겠지. 대번에 뿅 갔부렀어."

그러니까 아빠는, 바닷가에서 인어공주 뒷 자태에 뿅 갔던 것처럼 엄마 역시 노트를 보고 단번에 뿅 가서 결과적으로 서로의 눈에서 하트뿅뿅이 나왔단 말인가. 어쩐지 영 미덥지 않았다. 엄마를 통한 검열이 필요했다.


역시, 양쪽 말을 다 들어봐야 다더니, 엄마는 좀 더 다른 얘기를 했다. 옆집 돈사에 반찬을 나르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양돈 실습 직원인 아빠가 일 끝나고 다방에서 할 얘기가 있다고 해서 갔다는 말로 아빠의 허풍을 단번에 덮었다. 느닷없이 노트를 건네주길래 넘겨보기는 했으나 그렇게까지 반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집안의 순서를 지키느라 나와 남동생까지 세상에 나오고 나서야 결혼식을 올렸다는 걸 보니 엄마 말 역시 100% 사실이라 보긴 어려웠다.


서울에 있는 요양병원에서 다시 당뇨 조절이 잘 안되어 인슐린 주사를 맞기 시작했지만, 많이 걸으시면서부터 병원의 고충이 커졌다. 쓰레기를 주워 오기 위해 산책을 나가신다고 하소연을 했다. 캐리어 3개를 주워오고 옷가지며 빈통을 모셨다. 공동병실이 물건으로 지저분해지는데 손을 못 대게 한다는 거였다. 아빠의 고충도 커보였다. 밥이 이전 병원보다 맛없고 걷지도 못하는 노인들 뿐이라 분위기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이럴 거면 대구에 있는 그전 병원에 다시 가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나의 고충은 따로 있었다. 아빠가 서울로 전원한 후 부쩍 자주 '엄마'의 안부를 물었 때문이다. 대화중에 불쑥 불쑥 물으셨다.

"그라믄, 엄마는 요새 어디 있노? 서울에 있나?"

"아빠. 엄마는 수도권에서 일하시면서 잘 살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수도권이면 서울이가? 내 안 보고 싶다고 하드나...?"

"...안 보고 싶대요. 그러니까 아빠는 저희랑 손주 보면서 낙을 찾으세요."

그렇게 둘러대면 아빠는 "여기서 멀지 않을 건데." 하시며 미련을 나타내셨다.


엄마를 만날 때 조심스레 얘기를 꺼냈다.

"엄마. 이제 세월도 지났고, 아빠 힘도 별로 없고, 한 번만 병원에 우리랑 같이 가서 만나 주면 안 되나? 아빠는 엄마랑 이혼할 걸 기억도 못하니까. 그냥 끝인사라 생각하고. 간호사들 다 있을 거니까 무슨 일 안 생긴다."

한 번의 거절 후, 엄마도 병원에 함께 가서 병원 1층 접견실 같은 곳에 자리를 마련했다.

엄마를 본 아빠의 눈이 밝아지는 듯하다가 이내 흔들렸다.

"내, 이런 모습이라가... 내가 미안하다. 지금 서울에서 사나?"

"많이 늙었네. 어떻게 사고 났는지 기억은 나?내한테 어떻게 했는지는."

아빠는 여전히 자신 없는 표정으로 눈을 맞추지도 못했다. 다만,

"서울에서 딴 남자 만나서 잘 살고 있나?"

아빠는 다만 엄마의 옆자리에 누군가가 있는지가 궁금했던 걸까. 신경 써서 두른 스카프와 가방, 오랜만에 바른 립스틱을 한 엄마는 차분하고 강단 있게 말씀하셨다.

"나예 아빠, 나도 내 인생 잘 살 테니 건강히 잘 살아라. 나도 할 만큼 했고, 사고는 운이 나빴지만 그래도 살았으니 앞으로도 치료 잘 받아. 날 찾지도 말고. 내 그 말하려고 왔으니."

아빠는 침묵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엄마는 2분 정도 더 기다린 후 여동생과 함께 병원을 나갔다. 긴장 속에 준비했던 접선이 쓸쓸하고 싱겁게 끝났다. 질문에 대한 답도 못 얻고, 붙잡지도 않고 그렇게 아내를 보냈다. 아빠의 심경을 헤아릴 수 없는 나는 무거운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말을 걸었다.

"아빠. 엄마는 다른 사람은 안 만날 것 같아요. 지쳤대요. 아빠는 몇 년 만에 엄마 얼굴 보니까 어때요?"

"피둥피둥 살쪘지. 별로다."

눈빛과 어울리지 않는 대답이었다. 아빠를 3년간 간병할 때보는 엄마의 살 빠졌지만 아빠가 그렇게 말씀하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로 육칠 년도 더 지났지만 아빠가 다시는 엄마를 찾는 일이 없었다. 다른 모든 기억이 사라져도 내가 아빠의 첫째 딸이라는 것과, 두번 다시 아내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만은 잊지 않은 것 같았다.


아빠가 '엄마'라고 부르는 사람은 이제 '나의 엄마'가 아니라, 아빠의 실제 엄마인 '할머니'였다. 그저 아빠의 엄마, 나의 할머니한테 한번 가봐라고 전화 하신다. 90세 넘은 할머니는 밤낮 60세 넘은 아빠 걱정만으로 평생을 보내고 계신다. 찾아뵐 때마다 할머니가 늘 하시는 말씀이 있다.

"니도 니 아 낳아봐서 알겠지마는..."

그렇게 말씀을 끝내 못 이으시고 우신다. 아빠도 누군가가 애가 닳게 키운 자식이었다. 부모와 자식의 혈연은 유리가 박힌 실처럼 아팠다.


나의 아빠와 엄마가 병원 1층 의자에서 이혼 후 몇년 만에, 그리고 몇분안에 비로소 다시 남이 되는 의식을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