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초겨울에 나는 갑상선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무런 증상이 없었지만 나이도 마흔쯤이 되었으니 건강을 한 번 짚고 넘어가자는 생각으로 한 건강검진이었다. 복부초음파와 갑상선 초음파 검사를 추가했을 뿐인데 쓸개에는 담석이 가득 차 있었고, '갑상선 유두암'으로 양측에 모두 작은 혹이, 암세포가 있었다.
수술 날짜를 3달이나 기다리고 연차휴가를 낸 후 수술 바로 이틀 전인 토요일에 병원으로부터 갑작스럽게 의료파업 통보전화를 받았다. 월요일이었던 내 수술은 기약 없이 밀려버렸다. 속이 타는 시간을 보내고 3달을 더 기다리니 일부 수술 일정이 재개되어 재작년 초에 수술할 수 있었다. 드디어 이 두려운 녀석을 내 몸에서 떼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전날에 내 수술에 대한 싸인을 스스로 하고 나서 아침 첫 순서였다. 이동침대에 누워 긴 복도와 엘리베이터를 지나 수술방 앞 침대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분주하게 의료진들이 내 옆을 스쳐가는 동안 천장을 멍하니 보고 누운 채 20분이 지난 듯했다.
‘설마 전신 마취 후 이대로 깨어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야? 남편에게 내 공인인증서 비밀번호라도 알려주고 와야 했나? 아들과 엄마한테 어젯밤에 전화라도 할 걸 그랬나? 나 없을 때 아빠 입원비는 누가 송금하지? 작가라는 꿈은? 집에 수많은 내 책들과 필사 노트, 짐들은 누가 치우게 되는 거지? 그게 다 부질없는 것들이었을까?’
대답 없는 질문을 천장에 마구 쏘아 올렸다. 병원 수술 대기실 천장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내용의 성경구절이 큼지막하게 적혀있었다. 오래전에 잊은 종교가 떠올랐다.
'참 나약한 인간이구나. 교회에 다니지 않은지 20년이 지났는데도 수술대에 누우니 그 문장이 잠시나마 위안이 되다니. '
만에 하나, 이대로 수술 중에 가 버리면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살아온 세월이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걱정과 연민을 나누어 주어도 이 심정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오직 나뿐이었다. 의료 기술이 좋아졌다지만, 만에 하나의 확률을 떠올리니 사무치게 외로웠다. 또다시 살고 싶었다. 후회 없이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병실 천장, 고개를 돌리니 남편의 얼굴이 보였다. 살았다, 내가. 입원실에 보호자는 한 명만 출입할 수 있어, 남편은 아들 육아를 엄마에게 맡긴 후에 올 수 있었다. 수술 부위가 몹시도 아팠다. 말은 거의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고통스럽다. 그렇다면 다시 삶이다. 삶은 고통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고통. 고통은 소나무다. 평생 사무치는 외로움의 고통을 안고 살아갔던 한겨울의 벼랑 끝 소나무. 아빠의 외로움을 떠올려 보았다. 정말로 아빠는 죽음을 목전에 둘 때마다 다시 살고 싶어 했다. 목숨이 여러 개인 사람처럼 몇 번의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다녀오는 동안 나도 몰랐던 믿음이 생겼다.
"아빠는 죽지 않는다."
아빠는 나와 마찬가지로 누구보다 이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열심히 몸을 움직이고, 생각하고, 연구하고,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들고, 살렸다. 그러다 고독이 찾아왔다. 외로움과 괴로움이 커지면 술에 기대고 말았다. 과도한 음주로 가족을 고통과 위험에 빠지게 하는 건 절대 정당화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빠는 그렇게 괴로움을 술로 무뎌지게 해서라도 잘 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판단력과 기억력이 약해 내가 암수술했던 사실은커녕, 내가 자식을 낳았다는 사실조차 당신께서는 종종 잊는다.
얼마 전에 아빠가 폐렴을 또 앓았을 때 내과병동으로 옮긴 뒤 남동생이 찾아갔을 때 아빠가 하셨던 말씀을 전해 들었다.
"내 여기 얼마나 있었노?"
"한 15년쯤 병원에서 지내셨어요."
"좋은 세월 다 까먹었구나."
그 말을 들은 순간 가슴이 저려 왔다. 그 시간이 아빠에게서 사라진 시간인지 우리가 간신히 붙잡아 둔 시간인지 쉽게 정의할 수 없었다. 다만 그 시간 동안 아빠는 여러 번 쓰러졌고, 우리는 여러 번 아빠를 놓칠 뻔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시간을 누구의 탓으로도 돌리지 않기로 했다.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버텨온 시간이라고 믿기로 했다.
동생이 다녀가고 내가 전화 걸었을 때 아빠가 말씀하셨다.
"내 마지막 가는 길에 전화 줘서 고맙다."
"아빠, 무슨 말씀이세요, 더한 폐렴도 견뎠는데 이거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지금 낫고 계세요. 고생하셨어요."
그리고 곧이어 아빠의 혈액 검사에서 나온 전립선 검사수치를 설명들었다. 수치 4가 넘어가도 큰 병원에서 추가 검사를 해야 한다는데 무려 18이었다. 아빠의 오랜만에 정신이 든 것 같은 말씀이 유언처럼 느껴졌다. 대학병원 외래진료를 잡고 검사와 진료를 보면서 다시 한번 안도하는 마음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 달 간격으로 두 번의 혈액 검사에서 지극히 정상인 2~3 사이의 수치가 나왔기 때문이다. 폐렴일 때 소변줄 때문에 압력이 높아져서 그런 것 같다는 수간호사의 설명과 대학병원 의사의 대답이었다.
아빠는 서울의 병원에서 들리는 서울말이 도저히 정이 안 든다고 하셨다. 고향 말씨를 쓰는 대구의 병원으로 가고 싶다 하셔서 대구에 있는 개방 병동에 계신다. 밥이 입맛에 맞으신지, 양이 부족하진 않은지 확인하고 간식도 꼼꼼하게 체크해서 보내드린다. 체중과 인지력 상태 체크, 그리고 당뇨 관리를 세심하게 해주는 것 같다. 수간호사님과 통화할 때마다 보살피는 마음이 느껴진다. 오랜 세월 아빠가 입원할 때마다, 퇴원시키라고 분노하실 때마다 죄의식에 사로잡혔다. 눈이 벌게진 아빠에게 목이 졸리는 악몽을 꾸며 심장을 진정시키던 새벽도 있었다. 끝내 아빠의 고집대로 집에 모셔다 드리면 얼마 후 응급실을 통해 중환자실을 가길 반복했다. 스스로 살아갈 힘을 잃고, 때로는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돌볼 용기도, 밤낮 간병인을 들일 여력도 없는 보호자가 나였다.
병원에서조차 남이 버린 쓰레기를 차곡차곡 모으고, 그것을 못 가져가게 화내는 아빠의 모습을 보며 오래도록 생각해 왔다. 뇌가 제 기능을 못 하는 상황에서도 인간의 쓸모를 찾을 수 있을까. 가족에 대한 기억을 잃어 가고, 자유롭지 못한 환경을 살아가도 과연 ‘인간의 삶’이라 할 수 있을까.
요즘엔 아빠의 독기가 완전히 빠진 모습이다. 며칠 동안 전화를 안 받기도 하고, 심야든 낮이든 10분 전 통화를 잊고 하루에 여러 번씩 전화를 걸어 같은 말만 하시기도 한다.
“아빠는 잘 지내고 있으니까 염려하지 마라.”
아빠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그에게서 배운 것은 포기하지 않는 ‘삶의 의지’였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사고로 쓰러져도, 병원 침대에서도 아빠는 끝내 일어서려 했다. 그 모든 절망적인 순간들 속에서도 아빠는 살고 싶어 했다. 어쩌면 그것이 아빠가 내게 물려준 가장 소중한 유산이다.
책을 읽다 보면 종종 삶에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강요받는 느낌을 받았다.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 그 이유가 있어야만 살 가치가 있는가. 도무지 태어난 명분과 소명 의식을 찾기가 어려웠다. 나는 세계를 구할 영웅도 아니고 위대한 사람도 아니다. 내가 세상에 나누어줄 수 있는 게 뭔지도 몰랐다.
아빠를 오랫동안 겪고, 지켜보고, 내가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경계에서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단출한 한마디였다.
"살고 싶다."
그리고 뒤따라오는 생각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의미가 있었다.
"잘 살고 싶다."
인생이란 것은 쓸모와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다. 아빠처럼, 나처럼. 우리는 모두 언제든 마음먹고 다시 잘 살아볼 수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아빠는 죽지 않는다. 아빠 안에 있는 삶에 대한 사랑과 의지는 절대 죽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내 안에서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