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이었다. 통화 속 아빠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급히 회사 연차를 내고 아침 기차를 타고 아빠 집에 도착했다. 아빠는 엉덩방아를 찧어 멍 투성이에다 어디에 박았는지 이마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었다. 바닥에는 핏자국이 여기저기에 나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119를 불렀다. 들것을 들고 오신 소방관들은 대소변 냄새에 코를 싸쥐며 들것에 싣기 전에 좀 닦아달라고 해서 물티슈로 닦고 바지를 입혀 실었다.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여러 질문을 이어갔다. 환자분과의 관계, 왜 아버지가 이렇게 되었는지, 몇 시 몇 분에 도착했는지, 언제부터 이랬던 건지. 나도 경황이 없었고 오자마자 전화한 거라 했다. 할머니나 아빠의 형제들이 자주 왕래하며 아빠를 살피고 있었지만 내가 직접 챙기지 못하는 시간도 많았다. 구급차에 같이 타고 아버지가 자주 입원했었던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그쪽에 환자 기록이 있다고 하니 꽤나 먼 거리였는데도 갈 수 있었다.
응급실에서 급한 조치를 하고 피검사를 하고, 아빠의 의식이 돌아왔다. 동생들에게 호출하고, 의사에게 상태 설명을 들을 때 다시 한번 혼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사람이 이 지경으로 되도록 놔둔단 말입니까! 자식 맞아요? 영양도 불충분하고 당뇨 케톤산증입니다."
"네? 그럼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이름 모를 혈액 검사 수치들을 접하고, 상황을 설명할 겨를도 없이 따가운 시선과 질문을 마주하며 다시 한번 오도 가도 못한 심정에 발이 묶였다. 급기야 곧이어 급성 폐렴까지 생겨 폐에 빠르게 물이 차고 있다고 했다. 아빠는 물에서 건져 올린 물고기처럼 급박하게 숨을 몰아쉬고 계셨다. 거기가 중환자실이었던 것 같다.
"지금 당장 돌아가실 수 있으니 인공호흡기를 달 건지 말 건지 세 분 상의하셔서 알려 주세요. 급성폐렴에 당뇨 케톤산증까지 와서 환자분 얼마 못 버티실 겁니다."
인공호흡기라면 내가 출산할 때 썼던 산소마스크를 일컫는 건 줄 알고 망설임 없이 동의 사인을 하려고 할 때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거 한 번 동의하면, 환자 스스로 호흡할 수 있기 전까지는 못 뺍니다. 기도에 삽관하는 거예요."
일이 급박하게 전개되었다. 왜 상태가 이 지경까지 되었는지, 왜 더 일찍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자책하게 되었다. 또다시 아빠가 당장이라도 돌아가실 지도 모르는 위험에 처했다. 아빠로부터 나온 내가, 아빠에게 세상을 끈질기게 살아가는 법을 배워온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겨우 인공호흡기 사용 여부란 말인가. 아빠가 추락사고로 뇌수술에 들어갔을 때 그렇게 아빠보고 아직 돌아가시면 안 된다며 기도하는 마음이었는데, 그 후로 몇 년이 지나도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었고, 제대로 보살피지도 못한 것 같은 마음이 밀려왔다.
"다시 좋아져서 인공호흡기 떼는 경우가 있나요?"
"평생 식물인간처럼 누워 있으실 수도 있고, 인공호흡기를 떼는 경우도 있긴 있어요."
"그럼 인공호흡기 지금 안 하면요? 그렇게 해도 살 수가 있을까요?"
"기적적으로 돌아오실 수도 있겠지만, 희박합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죄책감이 밀려왔다. 이제 인공호흡 장치를 기도에 삽관한다면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아무 희망도 없어 보이는 기존 삶에서, 아빠 의지와 상관없이 신체의 시간이 다할 날까지 고통 속에 산 송장으로 누워 있을 연명치료의 삶으로 전환되는 것일 수 있는데, 그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빠가 병원 입원을 거부해 왔던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었다. 동생들과 갈등하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인공호흡기... 안 달겠습니다."
거기서 나는 아빠를 마음속으로 떠나보냈다.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서 또다시 산다면 아빠의 의지로 얻은 운명이라 생각했다. 불쌍한 아빠. 불효녀. 아빠는 끝없이 산소가 부족하다는 듯 숨을 들이마시고 있었고 , 우리는 만약의 경우 앞에서 유언이라도 들을 양으로 아빠를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아빠는 아무 말씀 없이 나를 봤다. 온 힘을 모아 내 손을 꽉 잡고 숨만 내쉴 뿐이었다.
"아빠, 죄송해요. 아빠, 일어나세요. 아빠는 할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은 못해도 아빠는 할 수 있어요!"
아빠는 고개를 돌려 눈을 감고 계속 숨 가쁘게 호흡했다. 나와 동생들은 중환자실에서 나온 뒤 각자의 상념, 각자의 기억 속에 잠겨 말없이 허공을 바라봤다.
나는 9살 때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엄마가 아빠의 손찌검과 술버릇에 못 이겨, 아기였던 여동생만 데리고 집을 나간 지 며칠 안 되었을 때였다. 아빠는 어린 나와 남동생을 트럭 옆자리에 나란히 태우고 시골길을 달렸다. 트럭이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고, 차 안에는 술냄새가 진동했다. 뜯지도 않은 새 포장지의 낚시 놀이세트를 우리 손에 쥐어 주셨다.
"더는 살 필요 없다. 자양 댐에 가서 다 같이 죽어뿌자!"
속이 빈 다양한 색의 플라스틱 물고기, 문어, 오징어 모형들. 그중에 나는 해마를 손에 꼭 쥐고 울었다.
"잘못했어요! 아빠! 안 죽고 싶어요!"
때마침 마을 입구를 빠져나가려 할 때 굴착기 한 대가 들어오는 바람에 우리 차가 후진을 하다가 포장 옆 자갈길로 바퀴가 빠지면서 뒹굴었다. 자갈이 충격을 흡수해서 그런지 부상은 없었고, 트럭은 옆으로 쓰러져 조수석 창문에 내가 누워 있었다. 너무 놀라서 바로 일어섰다. 밭일하던 사람들이 보고 달려와 함께 차를 일으켜 세웠다. 다리 밑으로 굴러 떨어졌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운이 좋았다고 입을 모아 말씀하시는 걸 듣고 다리 아래를 내려다봤다. 다시 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 책상 위 벽에 계좌번호를 적어두고 갔던 엄마는 일주일 만에 되돌아왔다. 그 후로 엄마는 아빠와 우리 사이의 방패가 되어 주었다. 한번 버림받았지만 다시 돌아와 주신 덕에 다시 댐으로 향하는 일도 없었고 그 숱한 뒤치다꺼리를 해 주시고 억척스럽게 무엇이든 막아내며 심적, 경제적 버팀목이 되었던 엄마였다. 차마 두 아이가 눈에 밟혀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엄마는 아빠랑 싸울 때마다 이혼하자고 받아쳤었다. 그때마다 진짜로 그럴까 봐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모른다. 우리 셋 모두가 성인 될 때까지 참았다가 이혼한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아빠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폐 한쪽 3분의 1이 섬유화 되었지만 일상생활에서 호흡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을 만큼으로 돌아왔다. 영양 상태도 회복 되었다. 역시 아빠였다. 아빠는 이 정도 가지고 돌아가실 분이 아니지. 아빠는 손가락도 살렸고, 뇌출혈 이후에도 살았고, 내 결혼식 날도 손잡고 걸으셨으니까.
그리고 이 일로 나에겐 또 하나의 믿음이 생겼다. 다 같이 죽자고 한 적도 있고, 자해한 적도 있지만 내 손을 꼭 잡으며 숨을 몰아쉬는 순간에도 아빠는 절대로 죽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아빠의 운명이 다하는 날까지, 내가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살려보겠다고 생각했다. 나와 동생들은 아빠를 감당할 수 없다. 이렇게 호되게 겪은 후에도 아빠의 인권이나 자유를 빼앗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아빠가 원하는 '내 집'에 보내는 건 방치와 유기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안전한 병원에서라도 아빠를 모셔서 살려야 한다. 그저 아빠를 위험한 상황에서 구하고 싶었다. 구급대원이 나에게 했던 질문들을 듣고 나니 집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모든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두려웠다.
이제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했다. 그리고 아빠가 쓰러지기 전, 집안 곳곳에 남았던 핏자국을 지우러 갈 일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