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사주가 ‘한겨울의 외로운 소나무’란다.”
엄마가 어느 역술가한테 듣고 온 한마디라고 하셨다. 아무리 겨울 출생의 아빠 사주팔자라지만, 그 가운데 소나무. 그 말을 중학생 때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었다.
“거기 잘 맞추노.”
내가 기억하는 아빠 삶의 이미지도 언제나 한겨울의 외로운 소나무였다. 거기에 ‘벼랑 끝’이라는 말을 덧붙여야 할 정도로 홀로 강풍을 감내하며 서 있었다. 소나무는 겨울에 푸르긴 하지만, 모여들 있어서 별로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바위에 뿌리를 뻗고 자라난 소나무, 그런 모습이야말로 눈 쌓인 겨울속에 홀로 푸른 소나무라고 생각했다.
도시로 나온 뒤에 아빠는 영농후계자 모임과 상관없어졌다. 날이 갈수록 친구도 끊긴듯 했다. 아빠의 고등학교 동창이 어디서 치과를 차렸다는 소문을 들으시고는 30년이 지나고 나서야 찾아가 친구분에게서 잇몸 신경치료를 받았다고 하셨다. 전화번호도 모른 채 업장으로 무작정 찾아가는 사이가 과연 ‘친구’라 말할 수 있는지 의아했다. 엄마가 십몇 년이 지나도록 저주했던 존재가 바로 ‘아빠 친구’였다.
“절대 친구한테 돈 빌려주지 마래이! 빌려주는 돈은 못 받는 돈이다.”
엄마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대사다. 친구들의 배신은 부모의 깊은 상처였다. ‘아빠 친구’ 한 명은 연말을 사흘 앞두고 찾아와 “12월 31일에 돈이 들어 온다. 딱 3일만 쓰고 주겠다.”라며 거금을 빌려 쓰고 나서 연락이 끊겼다고 했다. 말일은 돼지 사료 대금 결제일이었는데 그날부로 눈덩이 빚이 시작되었다. 그후 또 다른 ‘아빠 친구’에게 보증을 쓰고 나서 한 번 더 기울어 버렸다. 어디 누구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간다는 소식도 못 들었고, 친척 결혼식 때도 술독에 빠져 못가기도 했으며, 몇 안 되는 친구와도 연락이 끊겼다. 술을 드시지 않을 때는 일만 열심히 하시고 인간관계는 없다시피 한 아빠의 삶이 '한겨울의 외로운 소나무'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아빠는 유독 나무에 집착했다. 시골집에 살 때는 묘목을 사다가 크게 키워 개복숭아와 돌배, 황매실, 살구나무에서 제법 먹을 만큼 과실도 얻어냈다. 건설 일로 인도네시아였던가 출장 갔을 때 현지인이 준 굵은 망고 한 상자는 공항에서 빼앗기고 말았지만, 안주머니 속에 숨겨오신 손가락만 한 작은 단풍나무는 안 걸렸다며 그렇게 하회탈 얼굴을 하며 투박한 고무화분에 심었다. 인도네시아 그 더운 나라에도 눈 쌓인 곳이 있는데, 그 눈을 뚫고 나온 이 단풍이야말로 기개가 대단한 녀석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엄마는 집안에 단풍(丹楓)나무를 키우면 바람 풍(風)자가 들어가는 중풍에 걸린다며 재수 없으니 당장 버리라고 했다. 했지만 아빠가 아랑곳할리가 있나. 우리나라 단풍과 똑같이 생긴 녀석이 좀 더 자라자, 오래된 우리 아파트 화단에 옮겨 심으셨다. 하지만 어느새 주변 조경과 어울리지 않은 모습을 감지한 관리인에 의해 아빠의 기개를 닮은 단풍나무는 단박에 제거되고 말았다. 그걸보고 '내 단풍 누가 훔쳐갔다'고 어찌나 분해 하셨던지.
얼마 전에 서른이 넘은 여동생이 발목을 접질려 집 앞 병원에서 반깁스하더니 나에게 물었다.
“언니, 나 목발 짚는 게 그렇게 힘든 건 줄 몰랐다? 옛날에 언니는 어떻게 목발 짚으면서 그 많은 짐 짊어지고, 대구까지 내려온 거야? 그게 가능해?”
20년 전 그때가 생각났다. 쉬는 날에 나는 지인들과 횟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나무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아래층까지 굴러서 도착했다. 쪽팔려서 얼른 문밖으로 도망치고 싶었으나 오른쪽 발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침이 되니 두 배로 부어올랐고, 그날부로 나는 홀 서빙직 대신 통깁스와 목발 생활을 했다. 휴직 신청한 지 10일이 지나고 나서야 대구에 있는 엄마에게 소식을 전했다. “계단이 미끄러워서 굴러 떨어졌다고요. 어. 떼굴떼굴. 한 달 후면 깁스 푸니까 걱정 안해도 된다, 마.”
하지만 당장에 엄마는, 부모 없는 타지에서 보살핌도 못 받은 채 통깁스를 하고 누워있을 딸을 생각하니 너무 가여웠던 모양이다.
“하루를 쉬더라도 편한 '내 집'에서 쉬어야지. 내일 첫기차 타고 대구 내려와라, 알겠제? 엄마가 해주는 밥 먹어야 빨리 낫는다!”
엄마가 해주는 밥이 그리울때라 갖은 난관이 을 뚫고 도전해 볼 가치가 있었다. 양쪽에 목발을 짚는데도 일주일 정도 생활할 옷가지들을 쌌다. 양쪽 어깨에 각각 유행하는 커다란 바비인형 그림의 타포린백을 짊어졌다. 짐을 기차에 싣고 타는 데도 많은 도움의 손길을 받았다. 내가 기차 출발을 1분 이상 지연시킨 것 같아 낯이 뜨거웠다. 동대구역 바깥으로 나오니 이번엔 서울보다 더한 태양에 살갗도 따가웠다. 기진맥진 겨우 도착한 집에는 평일이라 아무도 없었다. 부모님은 일터에, 동생들은 학교에 있을 시간이었다. 덜덜 돌아가는 선풍기를 틀고 누워 집안을 둘러보았다. 우리 집은 아빠의 ‘맥시멀 라이프(Maximal Life)’ 취향이 그대로 반영되어 여백이라고는 천장밖에 찾아볼 수 없었다. 죄다 수납장이고, 천장에 바짝 올려붙인 상부 장에도 무언가로 가득 차 있었다. 어릴 적 시골에 살 때는 집 안에 딱히 뭘 키우지는 않았는데, 수납장 위나 남는 공간에는 화초 아니면 나무 화분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특히 굵은 둥치의 나무를 잘라 만든 유근(流根) 공예품은 여전히 좁은 거실 중앙에서 애물단지처럼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오후에 집에 돌아온 동생들에게 서울에 대해 동경을 잔뜩 심어주었다. 여기까지 온 고생담마저 영웅담처럼 떠벌렸다. 너무 반갑고 신이 난 나머지 거실에서 석고붕대 깁스를 이용한 '묘기'를 보여 주겠다고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야, 봐봐라? 내 목발 없이 팽이처럼 돌 수 있다?”
“어떻게?”
“이렇게 뒤꿈치를 바닥에 컴퍼스처럼 고정해. 자, 그리고 잘봐. 몸을 한 바퀴, 짜라란! 악!”
“누나! 괘안나?”
“아악! 내 귀! 내 귀 찢어졌나? 피나나?”
피는 나지 않았지만, 찍힌 귓바퀴 주변으로 피멍이 들긴 했다. 뭔가에 귀를 물어뜯겨 잘린다면 딱 이런 통증일 것 같았다. 깁스한 발을 중심 삼아 팽이를 자처하며 돌던 나는 과회전 끝에 균형을 잃고 넘어지면서, 아빠가 평생토록 자랑스러워하던 유근(流根) 공예품 끝에 귓바퀴를 받아버린 것이다.
“그놈의 나무뿌리 몇 사람을 다치게 하노.”
집에 오자마자 다친 딸을 보고 화가 난 엄마는 당장 안 보이는 데로 치우라 했지만, 집에는 마땅히 치워 놓을만 한 여백이 없었다. 아빠는 노고와 혼을 갈아 넣어 직접 완성 시킨 공예품을 놔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예전에 여동생은 그 장식품 위에 놓인 브라운관 텔레비전이 떨어져 이마에 대왕만 한 혹이 생긴 적이 있었고, 아빠도 술 취해 비틀거리다가 가지에 머리를 박기도 했었다. 엄마는 딸이 무사히 대구에 도착한 것은 다행으로 여겼지만,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시느라 바쁘셨다. 머물렀던 일주일 중 엄마가 휴무였던 딱 하루는 차려주는 밥을 먹고, 조심성 없음을 탓하는 잔소리를 들었다. 난 괜히 내려왔다며 맞받아쳤다. 남은 며칠은 빈집에서 퍼렇게 된 귀를 문지르며 선풍기 앞에 누워있다가, 기진맥진 나무 목발을 짚고 다시 서울행 무궁화호에 올랐다.
또 시간이 한참 흘러 재건축으로 집을 비워줘야 할 때 얼마라도 중고로 팔릴 줄 알았던 이 귀하고 쓸모없는 나무뿌리는 결국 폐기물 업체에서 일괄 수거해갔다. 아빠의 나무에 대한 집착은 나에게도 유전되었다. 중학생 때부터 나는 용돈을 모아 작은 허브를 키우고 죽이기를 반복했었다. 지금 우리 집 발코니에는 화초와 각종 나무 화분이 들어차 있다. 매해 화초 뿌리를 파먹는 ‘뿌리 파리’와 전쟁을 치르고도 자꾸만 식물을 사들인다. 거실에 원목 재질의 내 책상과 아들 책상이 나란히 붙어 있다. 안방에 있는 침대마저도 원목이다. 식탁은 뉴질랜드 소나무 나뭇결을 살려 자른 6인용 우드 슬랩이다. 나는 이 거실 한가운데를 차지한 나무 식탁이 너무 자랑스러워서 집안 모든 가구 중 딱 하나만 남겨야 한다면 이 식탁을 고를 거라는 다짐을 할 정도다. 거실 중앙에 있는 나무란 점에서 아빠의 나무와 닮았다.
엄마는 귀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기에, 원목 너무 좋아하지 말라고 했다. 유튜브에서 보니, 집에 죽은 나무가 있으면 귀신이 든다고 했다. 요즘은 귀신보다 유튜브를 더 믿는 눈치다. 풍수지리상으로도 좋지 않으며 특히 남이 쓰던 것을 가져올 때는 반드시 가구의 바닥 면에 ‘왕(王)’ 자를 종이에 써 붙이고, 일주일은 뒀다가 떼야 한다고 했다. 손없는 날을 따져가며 치밀하게 가구를 들이는 조심성과 집을 반짝반짝 가꾸는 엄마의 청소 습관을 내가 닮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무래도 나는 아빠의 잡동사니 수집력과 나무를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이상한 본능을 닮은 것 같다.
아빠에게 ‘나무’는 무엇이었을까? 삶의 무게를 버티게 해주는 뿌리였을까, 아니면 말을 대신한 친구였을까. 알 수 없다. 나에게 나무는 무엇인가? 집안을 둘러본다. 나무는 내가 살던 고향, 초록의 자연에 대한 갈망이자 말없이 공존하는 굳건한 생명력이다. 오늘도 나무를 가지치기하고, 나무로 된 가구를 곁에 두고 나무로 만든 책을 읽고 산다. 그리고 문득, 마당에서 담배를 피워 문 채로 감나무에 호스 물줄기를 쏘면서 조용히 나무를 바라보시던 아빠, 귤껍질을 모아 손수 만든 거름을 화분 흙 아래에 깔아두던 아빠의 모습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