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저 요번 대학 방학 때 잠깐 서울에 한번 가 보려고요.”
스무살, 대학 여름방학을 앞둔 나의 통보였다.
“서울? 서울은 왜.”
“나중에 호텔로 취업하려면 서울로 갈 확률이 높은데, 보는 눈도 키우고 서울 생활을 잘할 수 있을지 한번 경험해보려고요.”
“…….”
“저도 이제 성인이잖아요.”
“…….”
아빠는 주로 무언으로 대화를 끝냈다. 깊게 고심하는 중일 수도 있고 할 말을 참는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땐 아마 내 의견에 반대하는 의미였을 거다.
초등학교 때부터 전교 1,2등을 다투었다는 아빠조차도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격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농업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양돈업 사업의 꿈을 가진 그는 성인이 되자마자 제주도 돼지 농가에서 일을 배웠다. 그런 아빠의 딸이 수능을 1년 남겨두었을 때도 직업반 조리학교에 들어간 청개구리였으니, 이번에 반대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지 말라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반대한다면 결심한 것을 내가 더 열렬히 했을 것을 아셨는지 아빠는 침묵을 지켰다. 일단 화두는 던져놨으니 되었다. 다음날 아빠대신 엄마가 펄쩍 뛰셨다.
"가시나가 겁도 없이 서울은 무슨 서울이고! 코 베어간다. 가긴 어딜 간다 하노?안 된다!"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엄마의 잔소리일 뿐이었다. 아빠를 봤다. 옆으로 누워 손을 머리에 받치고 채널을 하릴없이 돌리고 계셨다. 우리 집은 결국 아빠의 허락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으니까 나는 아빠가 대답을 해주실 때까지 애타는 마음을 감추며 기다렸다. 사흘이 지났다.
“서울 한번 갔다 와 봐라. 거 조심해라.”
“아빠. 고맙습니다.”
호텔조리과로 입학했던 나는 여름방학이 되자마자 아빠의 집을 떠났다. 내가 남자였으면 군대부터 갔을지도 모르겠다. 미성년자였을 때는 어쩔 수 없이 그 집에 살았지만,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 되었으니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는 패기가 있었고 학기중 떡볶이집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대학가 인근에 보증금 없이 월 30만 원 하는 하숙집을 구할 수 있었다.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하니 TV에서 종종 보았던 서울역 시계탑이 보였다. 그 시계가 서울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을 주었다.
‘하숙집이라면 언젠가 TV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에서 보았던 장면 비슷하겠지. 누군가 밥을 차려주고 거실 소파에서 남녀 할 것 없이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는 장면. 어떤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게 될까?’
실태는 달랐다. 세 칸짜리 방이 있는 2층이었다. 낯설고 숫기 없는 남자들이 각각 방에서 고시 공부를 하고, 작은 공용 거실 겸 주방은 먹고 산 흔적이 없었다. 거실 역할을 하는 주방에는 전원을 누르면 굵은 철 열선이 소용돌이 모양으로 발갛게 달아올라야 사용하는 방식의 ‘전기 곤로’가 있었다. 가스레인지보다 화재 위험은 적어 보였지만 골동품 비주얼의 곤로는 밥해 먹을 의욕이 뚝 떨어지게 하는 아이템이었다. 굵은 모기향 위에 라면을 끓이는 기분이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내가 경험한 하숙집은 문을 잠그고 각자 사는 단칸방 고시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단 대학 방학 두 달 동안 서울에서 버티려면 아르바이트 월급이 많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성인 운운하며 따낸 한 달짜리 자유인데, 돈이 떨어져서 내려가는 창피한 일만은 절대 없어야 했다. 인터넷이 활발하지 않았을 때이기도 했고, PC방에 돈 내고 가서 구인 정보를 보는 것도 부담스러워, ‘벼룩시장’이라는 무료 거리신문을 가져와 구인 정보를 많이 살폈다. 그중에 강남구에 있는 선릉역의 한 삼겹살집이 눈에 들어왔다.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12시간을 일하면 내가 대구에서는 받아 본 적 없는 월급을 타게 되고, 휴무일 월 4회 동안 마음껏 서울의 번화가를 누벼볼 것이었다. 대구는 홀 서빙직이 한 달에 두 번 휴무일 때였으니, 네 번 휴무는 엄청난 복지혜택이었다.
전화 통화 후 선릉역에 내렸다. 하늘 사방이 빌딩으로 꽉 막힌 이곳 서울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막막하고 답답했다. 50대 정도 되어 보이는 부부가 운영하는 듯한 고깃집이었는데, 남자 사장님께 면접을 봤다. 대학생이 잠깐 아르바이트하기 위해 4대 보험에 가입하는 종일반 직원으로 일하겠다고 하면 채용되지 않을 것이 뻔했다. 휴학생이라 해도 상황이 비슷할 것 같다고 여긴 나는 약간의 거짓말을 꾸몄다. 휴학이나 자퇴를 한 건 아니었지만 다음 학기 등록금을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저 대학교 다음 학기 등록금이 없고 집안 형편이 대학을 보내줄 형편이 아니기도 해서 자퇴했다고 둘러대고는 고개를 숙여보였다. 사장님으로부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앞길이 창창한 스무 살인데, 내 딸 같은 나이인데, 왜 ‘이런 곳’에서 일하려고 해요? 우리야 고맙지만 이런 ‘동네 식당’말고, 좀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봐요."
컴맹이라 사무직을 구할 생각은 못 하겠다며 오직 자신 있는 일이자 할 줄 아는 일은 홀서빙밖에 없다고, 서비스 정신이 투철하고 성실하며 힘도 세다고 취업 의지를 보였지만 그 사장님은 나를 돌려보냈다.
대학에서 리포트를 자필로 써서 낸 유일한 학생이라며 교수님이 A+ 점수를 줬었지만, 컴퓨터를 다룰 줄 몰랐던 그때는 정말 내 인생의 직업이 홀서빙이나 주방보조로 끝나는 게 당연한 미래일 줄 알았다. 고깃집에서 나와 다시 빌딩 사이로 뚫린 조그만 하늘을 바라봤다.
‘고깃값도 비싸고, 인건비도 비싼 여기 사람들은 딸 같은 사람에게 홀서빙이란 직업은 험하고 안타까워 말리는 일이구나.’
학기 중에 아르바이트하던 보쌈집에 엄마가 얼마 뒤 직원으로 들어와서 같이 일한 적도 있던 나에게는 이런 부자 동네 사람들의 다른 삶의 태도와 여유가 신선했다.
‘그래, 학생다워 보이는 아르바이트해야겠어!’
명동에 당시 유행하는 예쁜 생과일주스 카페 ‘캔모아’라는 곳에 아르바이트생으로 들어갔다. 미니 싱크대 옆으로 계속 쌓이는 유리컵 설거지와 좁은 바닥에 쭈그려 앉아 스테인리스 볼에 부은 생크림 원액을 팔과 어깨가 빠지도록 젓는 일이었다. 사흘 만에 해고되었다. 3일 동안 6개의 유리컵을 깨 먹었으니, 내가 일해서 가게에 이바지한 금액보다 가게가 더 큰 손실을 봤다는 것이다. 유리컵을 겹쳐서 놔둔 사람의 잘못만은 아니었기에 사장님의 주장이 이해되었다. 나를 한 달 연속 고용했다면 아마 유리컵이 없어서 손님에게 음료를 팔 수 없었을 테니까.
남은 방학 동안 설렁탕 가게에서 반나절 일하며 생계를 잇는 동안 나도 부모님도 딱히 전화 통화를 하지 않았다. 서울 가서 야심 차게 대학 등록금을 벌어서 내려갈 줄 알았는데 번 돈으로 입에 풀칠하기도 빠듯했기 때문에 전화가 오지 않는 것에 크게 안도했다. 아빠로부터 안부 전화가 한 통 온 적이 있긴 했다.
“서울이가? 좀 어떻노? 있을 만하나?”
포부에 비해 초라한 현실에 있던 나는 “예.” 그리고 “할만해요.” 같은 추상적인 단답형의 대답이었으니, 실상 부녀간에 생사 확인 외에 주고받은 안부는 없었다.
서울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 아빠가 무언가를 물어보실까 봐, 그 질문에 거짓말하고 싶지는 않아서 며칠 피해다녔다. 아빠가 거실로 나온다 싶으면 나는 내 방으로 쏙 들어가 방문을 닫았다.
“가보니, 서울은 어떻드노?”라는 질문에 좋았다고, 신기한 것들이 많고, 사람도 두 배로 많고, 월급도 세다고 좋은 점을 말했다. 역시 나는 서울 체질이라며, 2학년 때 조기 취업을 서울로 하고 싶다고 얘기했다. 역시 아빠는 묵언이었다.
맏딸로서 부모님께 그나마 신용이 두터웠던 내가 제 마음대로 자유를 만끽하는 동안, 두 명의 동생은 각각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던 중이었으므로 아버지로부터 탈출할 수 없었다. 엄마가 하루 열두 시간을 홀서빙하여 돈 벌어오는 동안 그새 직장 일로 속상해서, 아니면 나의 독립 시도가 마음에 쓰여서 술독에 빠진 아빠의 뒤치다꺼리를 두 동생이 맡았을 것이다.
선언한 대로 나는 대학 졸업반에서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조기 취업에 성공했다. 호텔 조리와 서비스를 전공한 학생이 조기 취업으로 가기에 바람직한 곳은 호텔 주방이나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다. 먼저 1학년 방학 때 호텔로 실습을 다녀온 동기가 전해준 말은 이름있는 호텔에서 종일 양파를 끝도 없이 까거나 산처럼 쌓인 냉동 새우의 껍질을 깠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무언가를 까지 않기 위해 서울에 있는 '아웃백 스테이크 하우스'에 취업했다. 하지만 영어로 주문서를 받아 적고 테이블 서비스하는 역할은 나에게 적합하지 않았나 보다. 몇 번 고객 응대할 기회를 얻었지만, 지방색이 있는 억양과 긴장성 실수들이 늘어나자, 단순 노무 포지션으로 추락했다. 점장님은 직원인 나를 놔두고, 나와 같은 날에 아르바이트로 들어왔던 대학생에게 그 위대한 서버(고객 관리와 주문) 역할을 줬다. 서비스를 배운 호텔 캡틴 전공자로서 몹시 자존심 상해도 별수 없었다. 나는 1층 주방에서 무거운 요리들을 계단으로 3층까지 나르는 일에 당첨되었다. 비싼 등록금을 주고 배운 서비스나 조리 한번 실습해 보지 못하고 벌받는 기분으로 고된 수행을 했다.
그러다가 진정한 나의 특기를 모두가 알아보았는데, 다름아닌 ‘짬 처리 담당’이었다. 배달 속도가 더디었던 나는 뭐 하나라도 인정받고 싶었기에, 주방 초입에 배치된 날에 고객이 남긴 음식을 맨손으로 음식물 수거함에 거침없이 쓸어 넣었다. 역시 단순 노무가 적성이었던 건지, 전국에서 점심시간 매출이 가장 높다는 지점의 홀과 주방의 경계에서 극찬을 듣기 시작했다.
“제니퍼!(닉네임) 제니퍼가 여기 맡아 주니까, 그릇이 안 쌓여서 정말 고마워. 손이 진짜 빠르네. 막힌 주방이 골치 아팠는데. 잘 부탁해!”
짬 처리를 하기 위해 이름 값하는 대학 대신 ‘호텔조리과’의 전통이 깊다는 대학에 수시 원서를 넣은 것이 아니었다. 이 일을 직업으로 삼기 위해 고등학교 3학년 때 떡볶이집 아르바이트와 직원으로 일해 대학 등록금을 모은 것이 아니었단 말이다. 아웃백에서 짬처리는 내게 ‘빛 좋은 개살구’였다.
그 일은 얼마 하지 못하고 다시 설렁탕 체인점의 다른 지점에 들어갔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십분 단위로 깐깐하게 디자인된 노동을 하는 것보다 직원 복지를 우선으로 생각했던 설렁탕 프랜차이즈가 못해도 3배 이상 자랑스러웠다. 근무처에서 배운 것을 쓴 리포트를 대학에 제출하고 조기 취업으로 재학을 인정받아 졸업했다.
나와, 연년생인 남동생이 성인이 되어 입학과 휴학, 군대와 입원, 자취생활을 이어나가는 긴 세월 동안은 7살 터울의 막내 여동생이 아빠와 홀로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다. 평소에는 성실하고 사람 좋은 미소의 아빠 입속으로 소주 한 잔만 들어가면 그날로부터 우리 가족은 한 두달 암흑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때 여동생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아빠가 여동생방 유리 미닫이 문을 향해 아무 이유 없이 칼을 툭, 툭 던졌다고 했다. 거실에서 과도보다 약간 더 큰 칼을 아빠는 힘없이 던졌을지 몰라도, 그 정황은 너무나 위험했다. 여동생은 문을 걸어 잠그고 아파트 2층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향나무 조경수에 걸렸다가 떨어져서 다리가 긁혔을 뿐, 다른 곳이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고 했다. 더 어린 시절 아빠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몇 번 받았던 나는 여동생의 위험 신호를 가벼운 해프닝 대하듯이 무디게 반응했다. 무릎과 팔꿈치는 약 바르면 되니까, 그 정도이길 천만 다행이라며. 하지만 마음이 크게 다친 동생에겐 그날 일이 상처로 남았다. 천고가 요즘아파트만큼 높지 않았다 해도, 향나무가 있다 해도 나는 뛰어내릴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의지가 되지 못했던 언니였던 게 동생에게 너무 미안하다.
나는 서울로 향하면서 아빠로부터 탈출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탈출이 아니라 회피였는지도 모른다. 정말로 ‘탈출’이 필요했던 사람은 여동생이었다. 죽을 만큼 무서웠으니 살기 위해 뛰어내렸을 것이다. 취했을 때의 기억이 없었던 아빠는 또 깨어나면 일상을 그런대로 잘 살아갔을까? 하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의 감옥은 쉽게 탈출할 수도 없었고, 탈출한들 해방감을 느끼지 못해 자발적으로 회귀하게 되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