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와 나무
얼마 전 경남 진주에서 한 달 살이를 했다. 함께 요가 수련을 하는 선생님이 한 달간 스페인으로 여행을 가면서 요가원을 비우게 되었는데, 지역살이에 관심이 있고 새로운 경험을 좋아하는 내가 그 요가원을 잠시 맡게 되었다. 요가 수업은 많으면 하루 3번이 있었고, 화요일은 새벽 수업 한 번 밖에 없는 운이 좋은 날이었다. 진주가 처음인 나는 수업이 끝난 후, 수업과 수업 사이사이에 흥미롭고 낯선 것을 보러 바지런히 밖을 나섰다. 여행 같은 일상이기도, 일상 같은 여행이기도 했던 날들. 한 달은 어언 지나갔다.
서울로 돌아오니 주변 사람들은 진주에서 무엇이 가장 좋았느냐고 물어보았다. 틈이 나면 남강으로 나가서 했던 강바라기? 아침 8시에 여는 요가원 옆 카페에서의 시간? 요가를 안내하는 경험? 좋았던 일들을 헤아려보면서 잠시 폭 잠겨있던 나는 '나무'를 말했다.
❝ 살면서 가장 큰 나무를 봤어요. 그리고 살면서 가장 자주 나무를 봤어요.
나무. 나무라니. 서울에서도 흔히 보는 나무.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나무. 나는 나무를 보았던 것이 가장 좋았다. 플라타너스, 메타세쿼이아, 벚나무, 목련나무 등등 사람들이 흔히 알고 보는 나무들이었음에도 새로운 것을 본 것처럼 나의 눈은 평소보다 더 커졌다. '아파트 14층? 15층?' 하며 듣는 사람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나무의 크기를 알려주기 위해서 진지하게 가늠한 높이를 이야기해 주었다. 한 선생님은 그런 내 모습에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나무가 큰 게 뭐가 그리 대수냐고, 대학 캠퍼스에 있는 교수회관 앞에서 남자를 만났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나는 깔깔깔 웃었다. 선생님 제가 좀 실속이 없어요. 나는 애인 대신 나무를 끌어안았고, 존경하는 눈으로 올려다보았고, 그 아래에 파란 천을 깔아놓고 서두름을 잊은 채 자주 단잠을 잤다.
돌아와서 나무 사진을 자주 봤다. 서울의 나무는 진주의 나무들을 보기 전보다 작아진 것 같다. 비좁고 바쁜 세계에서 너도 나도 자라느라 고생이 많구나, 연민의 마음이 들었다. 나무의 세계가 궁금해 나무와 관련된 책을 펼쳐 들기도 했다. 나무가 인간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몸과 마음을 어떻게 건강하게 하며, 앞으로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할지 읽으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머물렀던 진주에서 꽤나 잘 지내고 있는 내 모습에 스스로가 정말 씩씩하고 명랑하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무 덕분이었다. 나무는 어떤 상태의 나라도 만나주었다. 아무 말없이 가만히 듣고 서서 내가 감정을 스스로 정리할 수 있게 바라봐주었다. 매일 그렇게 산책을 하고 돌아오면 나는 고요해졌고 고요한 마음 안에서 둥둥, 맑게 떠오는 것들이 있었다.
두껍게 자리해 곧게 뻗은 나무의 줄기를 본 적이 있나? 한창 연화좌(파드마아사나)를 공부하고 있을 때는 나무의 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단단하며 위엄 있게, 하늘로 쭉 뻗은 줄기에서 연화좌를 한 사람을 떠올랐다. 곧은 그 사람의 허리를. 그 모습을 본 날이면 요가를 안내할 때 이렇게 말했다.
❝ 하늘로 쭉 뻗어있는 큰 나무줄기를 떠올려보세요. 내 척주가 그 나무줄기라고 생각해 보세요. 단단하고 안정감 있게 앉아서 잠시 호흡합니다.
땅속에 불쑥 나와 넘실거리는 뿌리를 본 적은? 땅을 움켜쥔 듯한 뿌리에서 느껴지는 생명력, 땅 속의 모습을 상상하면 이내 옮아오는 강인함, 신비로움. 요가 매트 위에서 안정적으로 서기 위해서는 발가락 하나하나로 바닥을 움켜쥐어야 한다는 한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다. 돌아간 요가원에서 나는 또 이렇게 말한다.
❝ 뿌리를 땅에 단단하게 내려놓은 나무를 떠올려보세요. 내 발가락 하나하나가 뿌리라고 생각하고 땅을 움켜쥐세요. 그렇게 견고하고 단단하게 서봅니다.
길게 뻗은 나무들 사이를 지날 때면 나도 괜스레 그 옆에서 나무의 흉내를 내기 위해 나무자세(브릭샤아사나)를 해보고 싶어진다. 혼자서는 잘 용기가 나지 않다가 지인이 옆에 있을 때 한 번 시도해 보았다. 위로 비죽하게 뻗은 메타세쿼이아 길 중앙에 서서 자세를 취했다. 한 발로 선 후 중심을 잡는다. 가슴 앞에서 합장을 한 후 몸이 안정되었음을 느낄 때 천천히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린다. 바람에 가지가 흔들리듯 자연스레 흔들리는 몸을 놓아둔다. 사방으로 뻗은 잎에서 기체가 들고나가듯 나도 밖으로 드러난 피부 전체로 호흡을 해본다.
이번에는 나무들이 모인 산이 되어볼까. 어느 날은 서서하는 아사나(동작)을 하기 전 집중을 위해 산자세(다타아사나)를 했다. 산자세를 할 때면 뭐랄까, 내가 훨씬 큰 존재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 집중하며 서서 팔을 몸통에 조금 떨어트렸을 뿐인데 말이다. 매트 위를 벗어나 자리한, 수많은 나무들이 몸에 돋아난, 수없을 생명을 차곡차곡 품은, 진짜 산이 됨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잠자코 산이 됨을 느낄 때면 목아래에서부터 머리로 전율이 올라와서 잠시 몸을 부르르 떤다. 하루는 산자세 중에 봄과 함께 찾아온 불에 속절없이 타는 나무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 안타까움이 쉬이 잊히질 않아서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다가 산불로 잃어버린 삶의 터전을 회복하기 위한 기부요가를 기획했다. 애인을 만나기에 한 달의 시간은 너무 짧았으나 나무가 내 일상으로 들어오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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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뿌리를 위로 향하고,
가지를 아래로 향한 불사의 보리수를 말한다.
그 잎은 베다의 찬가다.
이것을 아는 자는 베다를 아는 자이다.
그 가지들은 아래위로 뻗어 있고,
요소(구나)가 영양을 주고, 감각대상들은 가지들이다.
이것의 뿌리는 세속적인 사람들의 행위와 불가분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아래로도 뻗어 있다.
그래서 한번 가면 돌아오지 않을 곳, 그곳을 찾아야 한다
'최초의 활동이 흘러나온
그 원초적인 정신에 귀의합니다'
<바가바드기타 중 일부, 요가근본경전(이태영)>
오랜 요가의 경전에는 인간이 나무와 같다는 구절이 나온다. 발가락이 뿌리라고 생각하라는 나의 안내말과 위로 길게 뻗은 팔이 가지 같았던 나무자세를 할 때와 달리 '뿌리를 위로 향하고 가지를 아래로 향한 나무'라고 인간을 말한다. <쿤달리니 요가>의 저자 이태영 선생님은 이 구절에서 인간은 '거꾸로 서는 나무'라 해석하고 이것이 인간의 실상이라고 말한다. 생명력의 원리인 '쉬바'는 머리에 있으므로 머릿속에 머무는 쉬바는 원리이고, 생명의 근원이고, 한 생명의 주재이고, 대우주와 상통할 수 있는 개체에 머물러 있는 신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은 뇌에 있으며, 이 뇌로부터 모든 원리와 힘이 나온다. 이점에서 뇌는 뿌리의 역할과 맞닿는다.
공교롭게도 거꾸로 서는 머리서기자세(살람바시르사아사나)는 '체위 중의 왕'이라 불린다. 직립생활을 하게 된 인간에게 오는 부작용인 척추나 무릎 등의 뼈와 관절의 질환, 위하수나 체액의 부조화에 그만큼 좋은 자세이기 때문인데, 이는 단순히 물리적인 효과 때문만은 아니다.
하타요가 생리학에서 태양은 가슴의 '프라나'기를 의미하고, 달은 하복부에 있는 '아파나'기를 의미한다. 하타요가는 이 프라나와 아파나의 결합이고, 이 두 기가 배꼽 뒤에서 만나면 뱃속의 불(jatharagni)이라는 생명의 근원인 진기(眞氣)가 생성된다. 거꾸로 서기를 통해서 위로만 올라가는 성질의 불을 아래로 내리고, 아래로 내려가는 성질의 물을 위로 올리는 '수승화강(水昇火降)'이 가능하게 된다. 진기의 생성은 하타요가의 기본 목적이고 하타요가의 최종 목적은 회음에 잠자고 있는 쉬바 신의 아내인 여신 샥티, 즉 활동적인 생명력인 '쿤탈리니'를 각성하여 뇌에 있는 생명력의 원리인 쉬바신을 만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 거꾸로 선 나무’와 같다는 문장을 만날 때면 기쁘다. 내가 지닌 가치들을 품는 글 같기 때문이다. 요가하는 사람으로서 수련의 방향을 나무에 빗대어 쉽게 설명한 것, ‘자연’인 인간의 존재성이 드러나며 자연과 연결되는 문장이라 느끼기 때문이다.
자연과의 연결이 희미해진 현대사회에서 나무는 쉽게 수단이 된다. 나무는 인간의 건강을 위해 피톤치드를 내뿜거나 여름의 더위를 식히기 위해 그늘을 크게 드리우거나 책상이나 침대를 만드는 재료가 되는 것처럼 어떤 역할이나 수단으로 여겨지곤 한다. 요즘 거리에서는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지나치게 전정을 한 나무들을 볼 수 있다. 처음엔 나무에게 꼭 필요한 이유일 거라 생각했는데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벌레가 생겨 사람이나 차체에 피해가 덜 가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는 서글펐다. 익숙하지만 익숙해지지 않는 서글픔. 그것 역시 중요한 이유라는 것을 알지만 지나친 전정은 나무의 에너지 생산 능력을 훼손하고 줄기에 화상까지 입힐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한 선택일까 하는 삐딱한 의문이 올라온다. 옷을 벗겨놓은 듯, 지나친 전정으로 보기 민망할 정도가 된 나무는 실은 이 모습을 만들어놓은 같은 인간에게 느낀 부끄러움이 아니었을까. 일자리 창출이나 관광 유치 등의 이유로 골프장 건설은 쉽게 공약이 되고 나무는 쉽게 베이고 있다.
식물학자 자크 타상은 책 <나무처럼 생각하기>에서 우리의 이런 시각을 전면으로 바꾼다. '인간의 기나긴 여정 동안 인간과 세계를 연결해 준 것은 나무'라며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곳은 나무의 서식지이자 점령지'라고 말한다. 더불어 '왜 나무가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지, 어떻게 하면 나무에게서 더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진실의 베일을 벗기기에는 부족한 과학의 한계를 너머 나무와 함께 다시 감성으로 향하자'라고 주장한다.
푸르른 5월이다. 새록의 잎이 드리우는 그늘에 벌러덩 눕기 좋은, 청청한 잎들이 바람이 흐르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는, 서두르게 덮어두었던 사사로운 일들을 흘려보내는, 이 청량한 행복만으로도 삶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드는, 이 순간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생각나는, 그런 5월이다. 나는 이제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진주 말고 또 어느 지역에 크나큰 나무가 있는지, 나무에서 위로를 받은 적이 있는지, 나무 덕분에 어느 시절을 잘 보냈던 적이 있는지 혹은 함께 놀았던 즐거운 추억이 있는지, 사람들이 깜짝 놀랄 나무의 신비를 알고 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실은 나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을 정보를 진지하게 가늠하며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 이를 만난다면 나는 더없이 행복할 것 같다. 나무는 어디서나 있다. 나무는 우리에게 삶에 영감을 주고 방향을 알려준다. 그리고 나무를 빗댄 요가의 표현을 통해서 우리가 나무와 다르지 않음을 배울 수 있다. 느낄 수 있다. 날이 더 더워지기 전에 일단 나무 아래에 여념 없이 누워보자.
또 어느 때고 요가하는 자리에서 나는 이렇게 안내할 것이다.
❝ 자 머리서기자세를 하겠습니다. 머리서기를 한 후에는 뇌의 신경들이 머릿속에서 나와 바닥으로 뻗어나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마치 나무의 큰 뿌리처럼요. 그렇게 안정감 있게 서볼게요. 아직 머리서기가 안된다고요? 오, 큰 나무로 한창 자라고 계시네요, 곧 단단하게 거꾸로 설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알려드릴게요.
<그림> 달리씨 @dalisee55
<사진> 한빛(오복파크) @ohbokpark
<참고도서>
- 쿤달리니요가(이태영)
- 하타요가 개정판 (이태영)
- 나무처럼 생각하기 (자크 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