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은 죄책감의 건축적 양상입니다.
« 빌딩은 내부를 갖는 동시에 외부를 갖는다. 서구 건축에서는, 건물의 외부는 내부가 확증하는 것을 그 내부에 대해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 둘 사이의 도덕적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인간적인 가정이 있어 왔다. » (렘쿨하스, 정신착란증의 뉴욕 - 뇌엽절제술 중)
렘 쿨하스가 말하는 도덕적 관계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먼저 도덕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도덕은 좋은 것과 나쁜 것 또는 올바른 것과 그른 것에 대한 가치 규범을 가리킵니다 (손기태. 고요한 폭풍, 스피노자. p. 86 ). 도덕적 규범은 주로 도덕적 행동을 장려하는 계율로 나타납니다. 도덕적 사람은 계율을 지키지 못하면 죄책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는 이미 생긴 죄책감을 털어 버리거나 생길지도 모를 죄책감을 미리 피하기 위해 도덕적 행동을 합니다. 죄책감은 도덕적 행동의 내적 동기입니다. 죄책감이 생기는 이유는 사람의 양심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 양심의 기준이 신의 명령이든 또는 이성의 판단이든 양심은 초월적 명령을 지각하는 기관 또는 장치입니다. 정리하면 양심은 초월적인 것의 내면화이고 죄책감은 양심의 심적 발현입니다.
초월적인 것을 개인적으로 내면화한다는 점에서 도덕은 인간적입니다. 그러므로 도덕적 관계 설정이 인간 중심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렘 쿨하스의 주장은 타당합니다. 이런 개인의 도덕에 대한 고찰은 건축에도 적용 가능합니다. 렘 쿨하스가 말하는 서구 건축의 특성은 근대 합리주의적 건축에서 잘 드러납니다. « 입면은 평면의 번역이다 » 라는 근대 건축의 공리는 렘 쿨하스가 말하는 건물의 외부가 내부를 드러낸다 또는 드러 내야 한다는 것을 잘 표현합니다. 이는 개인의 도덕적 행동은 그의 양심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렇게 보면 건물의 외부는 개인의 도덕적 행동에 해당됩니다. 또 그 내부는 개인의 양심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그 둘 사이 어딘가에 죄책감의 건축적 양상이 있을 것입니다.
주목할 점은 « 도덕적 행동이 양심의 발현이다. » 라고 말할 때 죄책감이라는 부정적 정서가 은폐된다는 점입니다. 그 대신 발현된 양심으로부터 생기는 뿌듯함이 자리 잡습니다. 비슷하게 건물 외부가 내부를 드러 낼 때 외부는 « 내부가 확증하는 것 »을 은폐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 표현된 내부, 즉 외부로부터 어떤 순수성 또는 투명성이 생깁니다. 중요한 것은 이 « 확증하는 것 »이 바로 « 죄책감 » 건축적 양상이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도덕에서 양심에 해당되는 건축의 내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릅니다. 고대 로마 건축에서는 게니우스 로키, 즉 장소의 정령, 유럽 중세 건축에서는 신의 은총, 그리고 근대 합리주의 건축에서는 이성 또는 합리성 일 것입니다. 합리주의 건축의 외부는 바로 이 합리성을 드러내기 위해 백색의 건축적 표피 (르 꼬르뷔지에) 또는 투명한 외피 (미스 반 데어 로헤) 가 되었습니다. 합리적 내부는 평면으로 재현되고 합리적 외부는 입면으로 재현됩니다. 그리고 이 둘을 연계는 건축의 본성상 3차원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 둘 사이에 합리적 공간이 자리 잡습니다. 건축은 이 공간을 통해 인간 행동의 합리적 대용인 기능을 평면에 수용합니다. 또 건축은 공간을 통해 기능적 합리성을 선명하고 투명하게 입면에 투사합니다. 이렇게 보면 렘 쿨하스가 말하는 « 내부가 확증하는 것 »이 곧 공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공간이 죄책감에 해당된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공간은 죄책감의 건축적 양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