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에 뛰어다니는 강아지 같아. 잔잔한 호수의 오리 같아.
친구한테 불투명한 상자 하나를 받았다.
"늦은 생일 선물 겸 졸업 선물이야!"
상자 안에는 총 26개의 봉투가 들어 있었다.
"전부 편지야. 내가 수기로 썼어"
총 26개의 편지였다.
첫 번째 봉투에 왜 이 편지들을 썼는지, 언제 읽으면 되는지, 무슨 내용인지 등 설명이 적혀있었다.
힘이 들거나, 혼자라는 생각이 들거나, 심심하거나, 눈앞에 보이면 편지 읽기
그리고 읽은 편지는 밑에 체크표시로 읽음 표시하기.
_ 말재주가 없어서 책과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해서 내 마음을 전해!
사랑을 담아 민지가. _
누군가의 마음을 받는다는 건 이런 거구나. 새삼 또 새롭게 느껴지고 새삼 벅차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받아본 게 이번에 처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마음을 받을 때면 항상 리셋되어 새삼 새롭고 벅차고 놀랍다.
편지를 받은 그날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어떻게 이러지?"라는 말만 계속 반복했었다.
사실 내가 친구에게 생일 선물을 주거나 편지를 주면 자주 들었던 말이었다.
그땐 아무 생각 없이 "왜? 생일이니깐. 그냥 편지 쓴 건데 왜?"라고 답하며 그런 질문을 하는 친구가 살짝 이해되지 않았다. 그저 "감동받아서 그렇게 말하는 건가"라고 생각한 게 다였다.
그 입장이 되어보니 아니었다.
정말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어떻게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지?
어떻게 왜 나한테 이러지?
이런 질문들이 저절로 생겼다.
그래서 그 상자를 볼 때마다 의문이 들고 벅찼다.
누군가의 마음을 받는다는 건 그만큼 고맙고 새롭고 벅차지만 그만큼 무거운 것 같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고 아무에게도 마음을 받지 않기를 염두하며 살았다.
아무에게도 상처받지 않고 아무에게도 상처 주고 싶지 않았으니깐.
물론 살다 보면 마음처럼 되지 않았지만...
최대한 그러고자 생각했었다.
그런 나에게 예상치 못한 마음이 올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주지 않고 마음을 받지 않기로 한 나에게는 그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치 풀밭에 뛰어노는 강아지 같아서.
잔잔한 호수 위에 떠다니는 오리 같아서.
풀밭에 뛰어노는 강아지가 된 적은 없었지만 풀밭에 뛰어노는 강아지를 보고 외면한 적도 없었다.
그 모습이 귀엽고 무해해서?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의 무해함에 그 순간만은 나도 같이 무해해지는 것 같아서 좋았다.
왠지 모르게 정화되는 느낌이라서 좋았다.
무해함을 알게 해 주어서 좋았다.
무해해질 수 있어서 좋았다.
아무에게도 기대하지 않아 실망도 기쁨도 없었는데, 때론 그 무해함이 모든 걸 덮는 것 같았다.
그 무해함으로 그 순간만큼이라도 생각이 없어지고 재지 않아서 좋았다.
어쩌면 아무에게도 기대하지 않고 마음 주지 않고 마음 받지 않기로 염두한 건 상처받기 싫고 상처 주기 싫고 상처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렇게 되길 바랐다.
모두들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마음을 주고 마음을 쓴다는 게 아무 생각 없이 뛰어다니는 강아지 같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사람들이 있어 무해해질 수 있었고, 따스함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사람들과 그런 마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것도 나의 욕심
많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도 나의 욕심이지만
그저 그런 사람이 주변에 있어 고마울 뿐이다.
ps. 내 주변에 사람이 많지 않은데 그중에서도 그녀는 참 따스한 사람이야.
그녀 덕분에 그날 덩달아 마음이 무해해졌고 평온해졌고 따뜻해졌어.
그녀 덕분에 나에게 소중한 물건이 생기게 되었어. 그런 물건을 만들어줘서 고마워.
이 물건 덕분에 누군가의 따스함과 무해함을 잊지 않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