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최면에 걸리지 않았다
오래전 어느 시골 마을, 최면에 걸린 할아버지가 살았습니다.
농사가 끝나면 할아버지는 언제나 막걸리 집으로 발길을 돌려요. 막걸리 한 잔에 흥겹게 돌아온 할아버지에게 할머니는 애써 차린 밥상을 내밀지요. 할아버지는 따뜻한 밥에 쉰 김치 한 조각 얹어 먹으며
"캬~ 그 막걸리 집 김치는 정말 맛이 끝내주는데 말이야!"
"우리 할멈 김치는 왜 그 맛이 안 날까?"라고 아쉬움을 표합니다.
아내는 그런 남편의 입을 한 대 쥐어박고 싶지요.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할아버지의 레퍼토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참다못한 할머니가 막걸리 가게에서 김치 한 포기를 얻어와서는 저녁 상에 올려놓아요. 그 사실을 알리 없는 할아버지는 김치를 씹으며 또다시 안타까워해요.
"캬~ 오늘 막걸리 집 김치는 푹 삭아 감칠맛이 끝내주더군..."
"그런데 할멈 김치는 왜 그런 깊은 맛이 없을까?"
"..."
어린 시절 이야기 속 할아버지처럼 황당한 최면에 걸린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었어요. 아내의 요리를 이웃과 비교하여 무시하거나 무안하게 만드는 사람 말이에요. 그들을 보며 내 아내의 음식은 무조건 칭찬하자고 결심했지요. 그것이 내 입으로 들어오는 음식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며 만든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했으니까요.
아내의 첫 요리는 낙지볶음이었습니다. 사실 이전의 다짐이 없었더라면 칭찬은커녕 한 입도 넘기지 못했을 거예요. 낙지가 양념물에 발만 담그고 헤엄을 치는 맛이었으니까요. 그 어떤 맛도 느낄 수 없는 고무를 씹는 것 같았지요. 하지만 엄지 손가락을 아내의 얼굴에 들이밀며 한 그릇, 아니 두 그릇 뚝딱 비워냈습니다. 아내는 맛있게(?) 먹는 남편을 그저 흐뭇한 모습으로 바라보았어요. 그다음은 볶음밥이었는데 한 입 넣으니 야채가 익지 않아 서걱거렸고 너무 짜다 못해 쓸 정도였어요. 그러나 저는 웃으며 말끔히 비웠고 그다음, 또 그다음은 물론 지금까지 아내의 어떤 요리에도 토를 달거나 평가한 번 내려본 적 없어요.
그렇다면 아내의 요리 실력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은 내로라하는 맛집을 찾아봐도 아내의 실력에 미치지 못해요. 정말이지 아내의 요리보다 맛있는 외식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으니까요. 옛날 막걸리 먹던 할아버지는 분명 어리석은 최면에 걸려 김치맛을 분간하지 못했어요. 스스로 걸어 놓은 최면 때문에 막걸릿집 김치가 그토록 맛있었던 거지요. 하지만 저는 최면에 걸린 게 아닙니다. 정말이에요. 저는 바보가 아니니까요. 그래서 매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을 먹습니다.
"여보 당신 요리가 최고야. 정말 멀리 찾아온 보람이 없군."
"그러게 오빠, 내일 내가 다시 끓여 줄게."
"정말 기대되는걸!"
"맞아 아빠, 역시 엄마 요리가 최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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