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소녀
"나 갱년기야! 짜증 나게 하지 마!"
갱년기라는 무기는 상황이 불리할 때마다 내미는 조커 같았어요. 아직 성호르몬의 분비가 급감하기에는 애매한 나이니까요. 그런데 춥다고 이불을 등에 두르다 금세 식은땀을 흘리며 창문을 열어 젖히거나, 작은 불의에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낯선 아내를 볼 때는 정말인가 헷갈리기도 해요. 어찌 됐든 아내의 주장이 확고하기에 임신했을 때보다 잘해야겠다는 다짐도 합니다. 본인도 힘들 테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다짐해도 날 선 말투와 짜증 담긴 눈총의 반복은 단단히 먹은 마음을 뒤엎을 만큼 차갑고 서운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다짐해도 날 선 말투와 짜증 섞인 눈총은 단단히 먹은 마음을 뒤흔듭니다. 심지어 예전 같았으면 웃음으로 넘겼을 가벼운 장난에도 “하지 마! 하지 말라고 했지!”하며 송곳니를 드러내면, 갱년기고 뭐고 애정이 식은 듯해 서늘해집니다. 이십 년을 함께했으니 사랑은 욕심일지 몰라도 예전의 따뜻한 눈빛과 몽실했던 손길만은 그립습니다. 정말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 숨도 크게 쉬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던 때, 둘째에게 제 마음을 슬쩍 비추었어요.
"요즘 엄마는 아빠가 싫은가 봐."
6학년 아이를 의지해 내 푸념이 아내에게 전달되기를 바랐지요. 그런 아빠에게 딸은 놀라운 답을 주었습니다.
"아빠, 엄마는 아빠가 싫은 게 아니고 걱정하는 거잖아!"
그렇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밉거나 싫어서 그런게 아닙니다. 아이의 눈에 비친 엄마는 아빠를 염려합니다. 때로는 엄마처럼 친구처럼 넘어지지 말라고 쓰러지지 말라고 다독여 부축합니다. 보더콜리가 결코 양을 물지 않는 것처럼 엄마는 조금 사납긴 해도 아빠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아이는 자라고 아빠 엄마는 나이 듭니다.
늙는다는 건 많은 부분 다시 어려지는 거예요. 느려지고 약해지며 둔해지고 줄어듭니다. 머리는 알지만 몸으로 해결할 수 없기에 조바심과 노파심도 자랍니다. 경험은 우려를 낳고 지식은 걱정을 불러요. 남편과 아내는 이렇게 늙으며 어려집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잔소리로 여기던 십 대처럼 아내의 염려를 악의로 해석하기도 하면서 말이지요.
그러나 조금 지나 더 많이 어려지면 타인의 눈에 소년처럼 예쁠 수는 없겠지만 아내에게만은 밉지 않을 순수로 남고 싶습니다. 우리는 찬란한 시대를 걸었고 예민했으며 약해졌지만, 모든 순간 함께였습니다. 주름은 짙어지고 멜라닌은 줄어들지만 부부만이 가진 추억이라는 마법이 세월의 저주를 풀어 서로의 눈에 가장 아름다운 청춘을 돌려 주리라 믿어요.
저기 시장에서 호떡 두 개 종이컵에 담아선 아내의 미소에서 그날의 소녀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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