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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마음 Oct 31. 2024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설렁설렁 대충 살자


포르투갈 여행을 시작하며 우리는 한 가지를 약속했어요. 뭐든지 애쓰지 말고 대충 하기로. 꼭 보러 가야 하는 장소가 있는 것도, 꼭 먹어야 하는 음식이 있는 것도, 꼭 나가야 하는 시간도 정하지 않기로 했죠. 쉬고 싶은 날은 나가지 않아도 되었고, 배가 고프지 않으면 먹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이베리아 반도까지 날아와 그래도 되나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여행은 내가 있는 곳에서 멀어져 낯선 곳에서 나를 낯설어지게 만드는 일이니까요.


저와 지금사진 작가님은 매우 강박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무엇이든 빼곡히 기록해둬야 하고, 찾기 쉽게 정리해둬야 하는 직업적 영향도 없지 않겠지만 대화를 나눠보니 둘 다 타고난 성향인 것 같았어요. 심지어 냉장고 안의 음료를 모양 맞추고 열 맞춰 정리하기까지 하는 약간은 병 적인 강박이 있죠. 일을 할 때도 데드라인 시간 안에 꼭 맞춰야 하는 성격이고, 완벽함을 추구하다 보니 아무도 요구하지 않았으나 스스로를 유별나게 괴롭혀 넉다운을 시키기도 합니다. 물론 그 누구도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 힘듦을 자초하는 병입니다. 그러나 지노그림 작가님은 업무적으로는 매우 깐깐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상당히 유연합니다. 대충대충의 아이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런 우리가 여행 중 대화를 통해 여행에서 뿐만 아니라 여행 이후의 삶에서도 대충 살자고 선언했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죽을 것처럼 여겼던 일들도 다 지나가고, 안될 것 같은 일들도 어떻게든 해결되고, 어차피 안될 일은 무슨 수를 써도 안되기 마련이거든요. 그러니 대충 살아도 인생에 아주 큰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어차피 될 일은 되고, 안될 일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것처럼 안되기 때문이죠.



두런두런 이런 대화를 나누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틀었습니다. 10월 5일 ‘배철수의 음악캠프‘ 오프닝 맨트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누구도 저에게 최선의 것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는데 제가 스스로 최선의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덕였어요. 박연준 작가의 고백이었다고 합니다. (중략) 제가 그래서 매일매일 최선을 다하지 않잖아요. 특히 라디오는 매일매일 일상이 되는데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얼마 못 갑니다. 힘들어서.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잖아요. 약간 설렁설렁할 때도 있어야죠. “


차 안에서 이 멘트를 들은 우리는 무릎을 탁 쳤습니다.

“봐요. 설렁설렁해서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오래 할 수 있었던 거예요.”

“맞아. 매일 열과 성을 다해 열심히 했으면 젠작 그만뒀을 거야.”


어쩌면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최선을 다하는 것보다 어깨에 힘을 빼고 설렁설렁하는 유연함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인생은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장거리 달리기니까요. 그런데 이 말도 마음에 안 들더라고요. 꼭 달려야 할까요? 누군가는 걸을 수 있고, 누군가는 멈출 수 있잖아요. 걷다 뛰다 할 수도 있고요. 누군가가 정해놓은 틀에 갇혀있는 나의 생각부터 정리하는 것이 시급했습니다.



일상의 나를 돌아보니 억지로 하는 것이 많았습니다. 하기 싫은 일을 거절하지 못하고 끌어안고 끙끙거릴 때도 많았고, 배가 고프지 않은데 점심시간이라 사람들과 함께 억지로 밥을 먹은 적도 많았죠. 싫은 것들을 표현하지 않고 인상을 찌푸린 채로 꾸역꾸역 해내면서,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완벽함을 추구하며 힘에 부칠 때에도 그것이 열심히 사는 것이고, 나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맞는 일이라 여기며 가끔은 가짜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 안에 남은 것은 쓴 뿌리들이었죠.


지금 나의 삶에서 대충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 생각해 봤습니다. 정의를 내려야 실천할 수 있으니까요. 생각들이 꼬리를 문 채로 여행을 하는 중 도시들마다 마주하게 되는 공원이나 산책로의 사람들을 보며 천천히 생각이 정리되었습니다.


좋아하는 것들만 내 곁에 가득 넘치게 두고 살기로 말이죠. 좋아하는 사람, 좋아하는 음악, 좋아하는 책, 좋아하는 전시, 좋아하는 옷,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곳으로 떠나는 여행,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 좋아하는 커피, 좋아하는 취미까지. 이것들을 온전히 마음껏 누리기에도 인생은 아주 짧거든요. 좋아하는 것들을 마음에 꾹꾹 눌러 담아, 그것을 느끼는 시간들이 늘어날수록 내 인생을 힘껏 사랑할 힘이 생길 겁니다. 애정하는 시간들이 겹겹이 쌓여 소중하고 행복한 것들이 차고 넘치는 삶이 될 테죠.


더 이상 억지로 힘든 것들을 해내며, 가짜 웃음을 짓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제가 있던 자리에서 떠난 그곳이 말해주었어요. 그렇게 꾸역꾸역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공원의 바람이 귀를 간질이며 속삭여 주었습니다. 길을 가다 꽃도 보고, 바람도 느끼고, 아무것도 아닌 실없는 농담도 주고받으며 조금 느리게, 조금 편안하게 지내도 된다고. 그냥 좀 설렁설렁 대충 살아도 된다고. 어디서 무얼 하든 큰 요동없이 애쓰지 않아도 되는 삶이기를 가만가만히 바라보는 밤입니다.



Photographer 지금사진

Painter 지노그림

Writer 지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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