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에게 건네는 사과
한 인간을 단편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나는 동갑내기들보다 1년 늦게 대학에 입학했다. 그래서 내 대학 동기들은 나보다 한 살 어렸다. 하지만 청소년기를 다양한 나이대의 친구들과 함께 지낸 탓에 나는 호칭에 대한 철학이 있었다. '언니'나 '누나'라는 호칭은 내가 그들보다 윗사람이라는 걸 무의식 중에 주입하는 거라는. 그래서 내게는 '그들에게 무언가 베풀어야' 할 것을, 그들에게는 '내게 스스럼없이 행동하지 말아야' 할 것을 주입하는 거라는. 이 때문에 나는 나이가 어린 친구들에게도 나를 이름으로 불러줄 것을 요청하곤 했다. 나는 무언가를 베풀고 누군가를 챙기는 것에 익숙지 않았고, 인간 대 인간으로 사람을 만나고 싶지 윗사람 대 아랫사람으로 사람을 만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나는 나를 언니나 누나로 부르는 친구들보다 본명을 부르는 친구들과 훨씬 가깝게 지냈다.
"나 xx년생이야~" 오티날, 술자리 저편에서 그런 말이 계속 들렸다. 귀를 기울여보니 누군가가 1살 어린 동기들에게 본인은 '언니'이고 '누나'인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저 사람에게 언니라고 부르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다'.
80명 정도 되는 동기들 사이에서 동기들보다 한 살이 많은 여성은 그녀와 나뿐이었다. 우리는 그 접점으로 친해질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녀를 멀리했다. 모든 동기들은 그녀를 '언니', '누나'로 불렀고 나는 내 이름으로 불렸다. 동기들은 곧 내가 한 살이 많았다는 사실조차 까먹고 나를 편하게 대했다.
2년을 휴학한 후 다시 학교로 돌아왔을 때, 내 친구는 그녀와 친해져 있었다. 내가 말했다. "나는 걔 불편하더라. 본인이 한 살 많다는 걸 너무 어필해." 내 친구가 말했다. "야, 걔 그거 벗어난 지 오래됐어. 그때의 자신을 창피해해."
그 뒤로도 내 친구는 그녀가 가진 멋진 점과 그녀에게서 배운 것을 말해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혼란스러웠다. 내 안에서 그녀는 이미 몇 년 동안이나 나이주의에 찌든, 그래서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녀가 더 이상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내가 그녀를 싫어할 명분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미 자리 잡은 그녀를 싫어하는 마음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였다. 친구와 대화를 나누던 중, 그 친구가 다른 친구에 대해 얘기했다. 그러다가 나는 물었다. "근데 걔는 왜 그렇게 날 싫어한대?" 솔직했던 그 친구가 말했다. "네가 고1 때, 친하지도 않은 자신의 가슴을 만졌대." 나는 벙쪘다. 그 대화가 어떻게 끝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속으로 수많은 변명들이 오가던 와중에 '싫어할 만하군' 생각했던 것 같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던 변명부터 늘어놓자면, 거긴 기숙사 학교였다. 여자 기숙사는 한 방에 6명씩, 한 층에 10개 정도의 방이 있었고 아침마다 복도에서 벌거벗고 공용 샤워장으로 가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매일 살색의 향연들을 마주하다 보면 서로의 몸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은 꽤나 흔한 일이었다. 내가 벌거벗고 샤워장으로 향할 때 친한 선배들은 내 엉덩이를 툭툭 치기도 하고 친구들은 샤워 중에 내 가슴을 찌르기도 했다. 나는 그것이 친함의 표현이라고 생각했고 친하지 않은 사이에선 그런 장난 덕분에 친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나의 잘못된 생각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당연히 '친한 사람 사이에 장난으로 받아들여질 행동'과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구분할 수 있다. 친한 사람들 중에서도 어떤 사람은 특정한 것에 더 예민하고 어떤 사람은 더 즐거워하는지 구분할 수 있다. 많은 실수를 해온 덕분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언짢아하는 지점과 즐거워하는 지점을 배웠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것들을 배우기 전이었다.
아직까지도 그 일이 생각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는 '친하지 않은 사람의 가슴을 만지는'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쉽다. 그녀에게 나는 그저 무례하고 재수 없는 인간이었겠지. 그 이후에 그녀가 마주한 나는 어떻게도 좋게 보이지 않았겠지.
이 두 개의 기억은 엮여 있다. 고등학교의 그녀를 생각하면 그녀가 하나의 사건으로 나를 판단한 것이 억울하다. 그런데 나는 대학의 그녀를 하나의 사건으로 판단해 싫어했다.
아마도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을 단편적으로 판단해 싫어했을 것이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단편적으로 판단되어 미움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녀들 외에는 기억하지 못한다. 내 기억 속에 그녀들이 남아있어서 다행이다. 덕분에 나는 인간은 입체적이라는 당연한 진리를 온몸으로 깨닫는다. 어제 피해자였던 나는 오늘 가해자가 될 수도 있고 오늘 갑이었던 나는 내일 을이 될 수도 있다. ‘친하지 않은 사람의 가슴을 만졌던 나’도 ‘누군가의 한 가지 면만 보고 그 사람을 미워했던 나’도 ‘그 기억들을 꺼내 배움을 얻으려는 나’도 모두 나다. 부끄러워 숨기고 싶은 말들을 이렇게 풀어놓는 이유는 나부터 그 모든 모습의 나를 바라보고 인정하기 위해서이다.
모든 인간의 어떤 부분은 추악할 것이고 어떤 부분은 특별할 것 없을 것이며 어떤 부분은 더없이 멋질 것이다. 타인을 바라볼 때, 그리고 나 자신을 바라볼 때도 내가 이 사실을 잊지 않으면 좋겠다. 작은 퍼즐 조각 하나로 전체적인 그림을 섣불리 판단하기보단 온정을 가지고 그 작은 조각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을 여기저기 맞춰볼 수 있는 여유가 있으면 좋겠다. 다시는 그녀들을 마주할 일도 사과할 기회도 없겠지만, 나는 마음 한편에 항상 그녀들에 대한 감사를 지니고 살아갈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