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뮤지션을 꿈꾼 건 중학생 때였다. 어린 시절부터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던 나는 중학생 때부터 라디오를 듣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인디음악이라는 장르를 알게 되었다. '브로콜리너마저'나 '앵콜요청금지' 같은 생전 처음 보는 단어의 조합이 무척 신선했고 그 단어만큼이나 그들의 삶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안정적인 직업보다 불투명한 꿈을 위해 달려가는 삶. 그 꿈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레슨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가는 삶. 그런 삶의 태도가 무척 멋있어 보였고, 나도 그들 중 일부가 되고 싶었다. 그때부터 나는 장래희망란에 '인디뮤지션'을 적어 내는 당돌한 청소년이었고 이후 대안학교-성공회대의 길을 걸으며 그런 삶의 태도를 내제화시켰다.
그런데 성인이 되고 나를 더 알게 될수록 발견한 점은 내가 즉흥적이고 이상을 좇는 만큼이나 안정적인 루틴과 꾸준한 습관에서 큰 기쁨을 얻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불안정하고 즉흥적인 뮤지션의 삶과 규칙적이고 안정적인 교육자의 삶 중 하나만 택할 수 있다 하더라도 쉽게 전자를 선택할 수 없는. 그래서 나는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며 뮤지션이라는 부캐를 가져가기로 했다. 그렇게 12곡이나 들어간 0집을 발매했다.
그때 내가 큰 성공을 기대한 건 당연히 아니었다. 다만 인디신에서의 어느 정도 반응은 기대한 것 같다. 앨범을 내고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실망한 것을 보면. (물론 그렇게 조용한 앨범에도 대중음악의견가 서정민갑 님께서 한 지면을 할애해 앨범을 소개해주시고 웹진 izm의 editor's choice에 선정되었다는 점은 감사한 마음으로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건 어쩌면 내가 지향한 아마추어로서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나 싶다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기타를 처음 가르쳐주고 한 방에서 룸메이트로 살고 듀오로 음악을 하고 내 앨범을 레코딩, 프로듀싱, 믹싱 해주고 나와 가장 친한 친구인 최미루가 작년 첫 앨범을 냈을 때, 그의 행보는 아마추어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뮤지션스러운 인스타 피드를 꾸미고 모르는 사람들에게 공연 섭외를 받고 단독 쇼케이스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를 온전히 축하하지 못하고 속이 시끄러워지는 나를 마주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를 보며 나와 무엇이 다른지 비교했고, 나도 그 같은 뮤지션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다음 앨범을 내는 것'이었다. 앨범을 하나 더 내면 조금 더 뮤지션에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앨범 하나는 어쩌다 내는 것일 수 있지만 앨범 두 개는 진짜 뮤지션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아는 앨범을 내는 방법은 내가 첫 앨범을 낸, 전혀 뮤지션스럽지 않은 방법뿐이었다. 그렇게라도 하려는데 제동이 걸렸다.
"뮤지션이 뭐지? 나는 왜 뮤지션이 되고 싶지?"
첫 번째. 뮤지션이 뭘까. 왜 최미루는 뮤지션스럽고 나는 뮤지션스럽지 않은가? 가장 쉽게 말하자면 '투자의 양'이 다르다. 그래. 현실적으로 내 앨범과 그의 앨범에는 들어간 돈이 다르다. 뿐만 아니라 들어간 노력도 다르다. 오랫동안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 왔지만 그의 '최선'을 보고는 내 최선이 최선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최선을 다했지만 '아마추어'로서 최선을 다했다. 나는 인디뮤지션을 꿈꾼 순간부터 아마추어의 삶을 동경해 왔다. 별로 계획적이지 않고 무작정 닥치는 대로 해보고 되면 되고 아님 말라는 식의. 하지만 인디뮤지션 15년을 꿈꾼 후 이제야 깨달은 것은 바로 '인디뮤지션=아마추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내가 좋아하고 세간에 알려져 있는 인디뮤지션은 모두 프로다. 그들은 아마추어가 아니다. 아마추어 인디뮤지션도 있겠지만 그들은 내게까지 알려지지 않는다. 내가 알려지지 않은 것처럼. 그렇다면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는 무엇인가?
완전히 나만의 정의로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를 구분해 보자면 이렇다. 아마추어란 자신의 한계가 곧 결과물의 한계인 사람. 반면 프로란 더 나은 작업물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 그러니까 나는 더 나은 작업물을 만드는 데에 그렇게 큰 노력을 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했다. 내가 상상하는 어떤 지향이 있더라도 내가 그걸 할 수 없다면 과감히 포기했다. 그걸 배워볼 노력도, 도와줄 다른 누군가를 찾아볼 노력도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아마추어란 자신과 작업물 중 자신이 더 중요한 사람, 프로란 작업물이 더 중요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너무 완벽한 작업물을 만들려 하지 말고 본인의 몸을 돌보세요"라고 말하지만 그들은 프로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마추어인 나는 그 말만 듣고 내 몸만 열심히 돌봤지. 작업물은 어떻게 되어도 만족하고.
그러니까 나는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 인디 뮤지션'이 되고 싶었던 거고 만약 지금도 그렇게 되고 싶다면 지금보다 몇십 배로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이다. 간단하다.
두 번째. 나는 왜 뮤지션이 되고 싶지?
맨 앞의 이야기와 이어진다. 어린 시절 내가 뮤지션이 되고 싶었던 건 쉽게 말하자면 멋있어서였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내 삶의 방식이 달라지면서도 왜 여전히 어린 시절의 꿈을 빚처럼 갚고 있는가?
이 질문에 내가 주로 내놓던 답은 이것이다. 일상에서 예민하게 노래가 될만한 이야기를 찾는 과정이 나를 매 순간 깨어있게 하고 그 감각을 평생 가지고 살고 싶어서. 그러나 그건 노래를 만드는 사람에 해당하지 노래를 만들어서 부르고 그걸 남들에게 가닿게까지 하는 이유에는 충분치 않다. 게다가 그건 사실 음악이 아니어도 된다. 글이어도, 그림이어도, 영화여도, 그 어떤 형태의 창작물이어도 된다. 즉, 그건 뮤지션이 아니라 예술가가 되고 싶은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앨범을 만들면서도 "음악이 아니어도 돼."라고 말했다. 꼭 음악일 필요는 없어. 나를 깨어있게 할 무언가이기만 하다면. 그런데 굳이 왜 음악을 하냐고 묻는다면, 그냥 어릴 때부터 해왔고 어릴 때부터 꿈이었으니까. 만약 내가 어릴 때부터 춤을 췄다면 그 표현이 춤일 것이고 어릴 때부터 글을 썼다면 그 표현이 글일 것이라고.
더 솔직해져 보자. 내가 뮤지션을 포기하지 못하는 가장 솔직한 이유는, 내가 나 자신을 너무 오랫동안 뮤지션으로 정체화했기 때문이다. 앨범을 내기 한참 전부터 나는 나를 '예비 뮤지션'으로 정체화했고 그중에서도 '예비 인디뮤지션'으로 정체화했다. 그러니까 내게서 '뮤지션'이라는 타이틀을 떼면 내가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다.
내 정의에 따르면 나는 내가 꿈꾸던 '인디 뮤지션'이 되는 것에 실패했다. 이제야 알았지만 내가 꿈꾼 건 '프로' 인디 뮤지션이고 나는 '아마추어' 인디 뮤지션(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고민이 될 정도니까) 일뿐이니까. 만약 내가 아이돌이나 유명한 가수를 꿈꿨다면 성공보다 실패의 가능성이 훨씬 커 실패를 상상이라도 해봤겠지만 나는 그에 비해 훨씬 적은 사람들이 꿈꾸는 인디뮤지션을 꿈꾸었기에 실패를 상상해 본 적도 없다. 그렇게 큰 유명세를 바란 것도 아닌데. 모두가 아이돌을 꿈꿀 때 혼자 오래도록 인디 뮤지션을 꿈꿨는데. 억울해.
그러면 이제 '프로 인디 뮤지션'을 꿈꾸면 되지. 그래, 만약 되고 싶다면 위에서 말한 것처럼 지금보다 몇십 배로 열심히 하면 된다. 미루도 프로 인디 뮤지션이 되었으니 그에게서 도움을 구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내 현실에서 당장 프로 인디 뮤지션이 될 정도로 음악에 투자할 시간과 마음이 있는가? 더 이상 나는 학생도 아니고 하루의 많은 시간을 일하는 데 보내고 책임져야 할 것들이 생겼는데. 이제 막 현실에 발 붙이고 커리어를 일궈나가기 시작한 내가 이 일상을 포기할 수 있는가? 솔직히 없다. 그러면 남은 건 하나다. 나는 이제 프로 인디 뮤지션이 되는 걸 포기한다.
며칠 동안 고민을 하고 글을 쓰며 많이 울었다. 아주아주 오래 짝사랑하던 상대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걸 지켜보는 듯한 기분이기도 했고 사랑하는 누군가를 다시는 갈 수 없는 곳에 놓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혼자 돌아오는 기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들기도 한다. 길을 잃었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 더 이상 원래 알던 길을 찾으려 하지 않고 새로운 풍경을 살펴볼 여유가 생기는 것처럼.
앞으로 내가 어떤 길로 가게 될지 전혀 예측되지 않는다. 다만 변하지 않는 사실은 나는 원체 흥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 글은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할 수 있고 그림은 더 섬세한 아름다움을 전달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음악이 전달하는 흥을 대체할 수 있는 건 없다는 것. 지쳐 쓰러져 핸드폰을 멍하니 보고 있을 시간에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부르니 신이 나더라. 그게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잊고 있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신나는 시간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