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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난 Dec 25. 2023

감미로운 삶

백덕수의 '데뷔 못하면 죽는 병 걸림'을 보고

▪️해당 글은 웹소설 '데뷔 못하면 죽는 병 걸림',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내가 키운 S급들' 및 '저 그런 인재 아닙니다', '불사자에게는 수호자가 있었다'에 대한 다수의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해당 글은 '데뷔 못하면 죽는 병 걸림' 500화 기점으로 쓰인 글임을 밝힙니다.
▪️해당 글 속 소설에 대한 상세한 부분은 글쓴이의 기억에 의존하여 실제와 다소의 오차가 발생했을 수 있음을 알립니다.
▪️해당 글의 제목은 데뷔 못하면 죽는 병 걸림 234화의 한 구절에서 인용해 왔음을 밝힙니다.




얼마 전 오랜만에 부산코믹월드에 방문했다. 어릴 적부터 취미가 같았던 친구와 함께 했는데 웹툰의 효과인지 소설은 곁눈질로도 안 보던 애가 '데뷔 못하면 죽는 병 걸림', 속칭 데못죽을 봤다는 이야기를 했다. 약 2년 전 한창 불타올라 사랑했던 작품을 절친한 벗이 본다니 이유 없는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몰려왔다. 들뜬 마음에 주저리주저리 주접을 늘어놓으려던 순간, 문득 데못죽 내용이 흐릿해졌음을 깨달았다. 이럴 수가. 한동안 온종일 방에 박혀 그것만 보고 그것만 이야기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흐릿해지다니. 이게 사랑이고, 삶인가. 불현듯 슬픔이 들이닥쳤다. 그때는 이야기할 친구가 없었는데 이제는 기억이 없다니 허무함과 속상함에 결심한다. 데못죽을 처음부터 다시 보기로.


때마침 데못죽 2부 단행본이 나오던 시기라 홧김에 1부, 2부 세트를 주문했다. 세트는 그 값에 걸맞게 총 6권으로 구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우스패드, 키링, 포토카드 등 다양한 굿즈가 포함되어 있었다. 우습게도 가슴이 떨렸다. 기억은 흐릿해졌어도 그들을 사랑했던 것만은, 그 감정만은 남아 여전히 심장이 뛰었다.


이번에는 내용을 보다 명확하게 이해하고 기억하고자 필기를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일반 서적을 읽을 때는 늘 필기를 해놓고 그렇게 좋아하는 웹소설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게 오히려 신기하다. 캐릭터 분석도 동시에 진행하기 위해 전체적인 스토리라인, 각 등장인물별 주요 회차 및 성격, 특징, 특정 대사 및 사건을 통해 느낀 점들을 꼼꼼히 필기해 갔다.


데못죽은 현대판타지 아이돌물이다. 주인공 '류건우'는 공시를 준비하던 청년으로 오랜 공시생활에도 불구하고 낙방하자 분노와 슬픔에 술을 마신다. 그런데 이게 웬 걸. 잠에서 깨어났더니 웬 비쩍 마른 곱상한 어린애가 되어있는 것이다. 류건우는 놀라운 기지를 발휘하여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몸에 빙의하였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건우가 빙의한 몸의 주인은 '박문대'라는 이름의 소년으로, 어릴 적 부모님을 여의고 학교 생활이 평탄치 않아 자퇴한 뒤 자살을 기도한다. 류건우는 해당 시도 후에 박문대의 몸에 들어온 것이다. 이상한 점은 류건우와 박문대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생판 남이라는 점이다. 더더군다나 깨어난 류건우에게는 푸른 창이 보이는데, 그 기묘한 창은 '아이돌로 데뷔하지 못할 시 죽는다'고 명시하고 있는 게 아니겠나. 류건우는 아이돌을 꿈꾼 적도 없는 제게 이게 무슨 일인지 황당해하면서도 일단 미션을 행하기로 한다.


'데못죽'은 박문대(류건우)가 아이돌로 데뷔하고 활동하면서 겪는 다양한 사건, 사고들, 그로 인한 성장을 다루고 있다. 박문대와 유사하게 어릴 적 부모님을 여의고 평탄치 못한 삶을 살아온 건우가 같은 그룹 멤버들과 동고동락하며 이전 삶에서는 잊고 지냈던 즐거움을 느끼고, 사랑받고, 사랑하며 새롭게 세상을 구축해 나간다.


'데못죽'은 아이돌 소설 중 뛰어난 현실고증으로 칭찬받는다. 단순히 아이돌이 춤 잘 추고 노래 잘 불러서 사랑받기만 한다는 내용이 아니다. 아이돌에게 관심이 없거나 가볍게 좋아하는 사람들은 미처 눈치채지 못할 그들의 고통과 고민, 그 업계의 생태를 정교하게 다룬다. 덕분에 가끔은 내가 지금 판타지 소설을 읽고 있는 건지, 기업경영서를 읽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고는 한다. 단순히 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에 약간의 씁쓸함을 느끼기도 하고, 아직 보호받아야 할 미성년자들이 느껴야 할 지독한 압박에 안타깝기도 하다. 아이돌 또한 사람이기에 누구나 겪을 만한 고민에 공감하기도 한다. 박문대와 그의 그룹은 서바이벌로 데뷔했기에 더더욱 두드러지는 '증명'이라는 면모가 특히 그러했다. 그들은 데뷔 전에도, 데뷔 후에도 늘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만 한다. 몸관리, 댄스, 노래뿐 아니라 평상시 언행, 지식, 유머러스함마저도. 그런데 사실 누구나 그렇지 않은가. 공인에게 강하게 적용되긴 하나, 일반인 또한 늘 자신을 증명하며 살아가야 한다. 온 세상이 CCTV가 된 현대에는 더더욱. 생명은 그 자체로 귀한 것이며, 누군가의 생을 감히 가치라는 이름으로 평가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상대를 가늠하고 측정해야 한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쓰다.


데못죽은 여러 인물의 이야기를 다각도로 드러내어 세상을 노래한다. 때문에 이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이 내게는 저마다 다른 빛으로 특별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중 주인공인 박문대(류건우)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건우는 다정한 사람이다. 처음에 그는 박문대를 기억하지 못했지만 사실 그 둘은 아는 사이, 그것도 특별한 관계였다. 저 편의 과거에서 박문대는 결국 죽지 못하고 멍하니 거리를 활보한다. 류건우는 그런 그를 발견하고 별말 없이 그에게 밥을 사준다. 힘없이 국밥을 떠먹는 어린애의 모습에 건우는 답지 않게 먼저 입을 연다. 어디서 구직을 해야 할지, 어떤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 누구도 박문대에게 알려준 적 없던 '삶'을 알려준다. 류건우는 스스로 깨우쳐야만 했던 것들을.


무심하게 알려준 그 사실들이, 아니, 그 다정함이 박문대가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든다. 그게 몸서리치게 좋다. 류건우가 박문대에게 준 것은, 사실 그 자신이 그토록 바라왔던, 그러나 끝내 얻지 못했던 것일 테니까. 저가 받지 못했기에 누군가에게는 주고 싶다는 마음이, 그 올곧음에 입술이 떨렸다. 현대 판타지의 주인공들을 좋아한다. '내가 키운 S급들'의 한유진도, '불사자게에게는 수호자가 있었다'의 레이븐도,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의 조의신도, 모두 저가 아팠기에 저와 함께 있는 아이들은 아프지 않길 바라는 어른들이라 좋다. 스스로의 고통이 복수심이나 시기심이 아닌 선의로 치환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나 또한 그런 어른이 되길 간절히 바라왔어서, 그래서인지 이상하게 그들의 생을 들여다보면 눈물이 나는가 보다.


그런데 슬프게도, 박문대에게 삶을 심어준 류건우 자신은 괜찮지 않았다. 아마 지쳤던 것 같다. 어릴 적부터 느껴야 했던 홀로 서야 한다는 중압감, 의지할 곳 없다는 외로움과 부모님의 곁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무력감과 탈력감. 결국 그는 자살을 기도하게 된다.


그냥, 별로 살맛이 안 났다.
 감흥이 없었다.
삶이 일방적으로 피곤했다.
특별히 나쁠 건 없으나, 좋을 것도 없다.

-데뷔 못하면 죽는 병 걸림 252화-




류건우의 숨이 끊어지기 직전, 그는 그를 방문한 박문대에 의해 구조된다. 가까스로 생명은 건졌으나 의식불명이 이어지는 나날 건우의 회복을 바라던 박문대는 녹슨 난간이 쓰러지며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이야기는 처음, 류건우가 박문대의 몸에 들어간 시점으로 향하게 된다. 그렇다. 류건우가 일부 기억을 잃은 채 회귀하게 된 이유, 이상한 미션을 받으며 삶을 종용받은 이유, 이 모든 이야기의 시발점은 류건우가 행복하길 바란 박문대의 소망이었던 것이다.


이후 여러 사건을 겪으며 진짜 박문대와 시야를 공유할 수 있게 된 류건우가 콘서트 무대 위, 불 꺼진 까만 세상에 응원봉의 불빛만이 그득한 광경을 박문대에게 보여준다. 네가 보여준 세상이라며.


데못죽을 사랑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이야기가 사랑에 의한, 사랑을 위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선의가 악의로 돌아오는 것이 보다 더 빈번한 세상에서 꽤 자주 권선징악을 꿈꾼다. 아니, 징악까지는 아니어도 선한 사람들이 더 자주 웃을 수 있는 세상이길 바란다. 우리의 짧은 삶에서는 어쩌면 불가능할 지도 모를 그것을, 데못죽은 보여준다. 한 번의 생애를 거쳐 이어지는 선의, 그 선의로 인해 변화한 것들, 그 속에 피어난 따스함을 이야기한다.


혹시 여기까지 보고 데못죽이 과하게 진지하고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했다면 그것 또한 오산임을 밝혀두고 싶다. 이 이야기의 또 다른 뛰어난 점은 완급조절이 좋다는 것이다. 독자가 슬프게 두지 않는다. 이야기가 무거워져 슬프고 우울해졌다면 기다렸다는 듯 사소한 농담과 재밌는 에피소드로 소소한 웃음을 제공한다. 약 650화, 대략 20권 분량의 장편소설이 루즈해지지 않는 이유이다.


더불어 이야기의 궤도가 일차함수가 아닌, 무수한 곡선으로 이루어진다는 점 또한 좋아한다. 주인공의 성장, 시원한 이야기 진행을 바라는 독자들의 성향에 맞추다 보면 이야기가 일차함수 모양을 그리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런 소설 또한 그 나름의 특색이 있지만 사실 사람이 어떻게 전진만 하며 살겠는가. 후퇴하기도 하고 다시 나아가고, 어느 날 넘어졌다 일어서고 다시 다리가 꺾이고 어떻게든 일어나 보고. 괜찮아지다가도 아프고, 도저히 안 될 것 같다가도 어느 날 깨닫고 보면 한 보 전진해 있는 게 사람 아니겠나. 막연히 '나아지기만 하는' 삶이 아니라 수많은 굴곡 속에서 올랐다 내렸다 하며 그 과정 속에서 종국에는 한 걸음 나아가는 이야기, 정말 '사람'의 이야기라서 더 사랑하게 되는 듯하다.


이야기하고자 하면 끝이 없으니,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덧붙이며 해당 글을 끝맺으려 한다.

박문대(류건우)가 활동 중 모종의 이유로 인해 가족의 죽음을 상기하게 되는 에피소드가 있다. 해당 이야기에서 그는 어떻게든 원만하게 일을 해내려 하지만 문득문득 떠오르는 부모님의 죽음, 그때의 감각에 도저히 집중하지 못한다. 이후 리더와의 진솔한 대화와 몇몇 사건을 통해 극복하게 되는데 그 뒤 다른 멤버가 혼란을 겪을 때 있었던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문대는 그 친구, 큰세진-본명은 이세진으로, 멤버 중 동명이인이 있어 큰세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큰 체구 덕에 큰세진이 되었다.-을 위로하고자 자신의 과거 전적을 밝히며 그때 자신이 쓰레기처럼 굴었다며 너도 조금은 그래도 괜찮다는 투로 위로를 전한다. 합리적인 그의 말에 위로와 깨달음을 얻은 큰세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상황이 어느 정도 해결된 듯하자 박문대는 자러 가겠다며 자리를 뜬다. 그때, 방을 나서던 박문대를 잡고 큰세진이 한 말이 마음에 맴돈다.


너 그때 그렇게 태도 쓰레기 같지 않았어, 문대야. 그냥 아픈데 열심히 했지.

-데뷔 못하면 죽는 병 걸림 5권 p.129-


문득 '내가 키운 S급들', 속칭 내스급의 한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내스급의 주인공 한유진은 어떤 이유로 자신의 삶이 화면을 통해 낱낱이 밝혀지는 것을 보게 된다.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 까닭이 저가 대단치 못한 사람이기 때문이라 생각하며 자기혐오에 빠져있던 그는 화면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짓는다. 늘 구차하다고 생각했던, 구질구질했던 자신의 삶은, 사실 그저 열심히였을 뿐이었던 것이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고서야 그는 그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살아가다 보면 삶이 역겹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만 어딘가 모자란 것만 같고, 아등바등하는 꼴이 그저 우습게만 여겨질 때가 있다. 그동안의 삶이 구차해 가끔은 지워버리고 싶기도 하다. 그런데 어쩌면 그런 하루하루가 그저 열심히였던 날들은 아닐까. 그저 최선을 다했던 생이 아닐까.


사실 데못죽을 끝까지 읽고 쓰려던 이 후기를 지금 쓰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2023년이 채 일주일도 남지 않은 오늘. 크리스마스 캐롤이 세상을 메우는 날.

지난 한 해가 부끄러워 고개 숙이고 있을지도 모를 누군가에게, 고생했다고, 당신의 생각보다 당신의 지난날은 더 치열하고 아름다울 것이라고 감히 단언해보고 싶어서.






사람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과정을 거치고 놀랄 만큼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든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걸 해냈을 뿐만 아니라 저마다의 염원을 꿈꾸고, 노력해 봤잖아요?

그 노력은 열정적인 행동일 수도, 부던한 마음고생일 수도 있을 거예요.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온 당신께,

감사와 격려를 전하고 싶습니다.

올 한 해, 고생 많으셨어요.










데뷔 못하면 죽는 병 걸림 [카카오페이지 | 웹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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