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죽음들과 달리, 자살만은 '죽음'이 삶을 압도해버린다.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
여러 대중매체를 접하다보면 '극단적 선택'이라는 말을 종종 보고는 한다. '자살'이라는 적나라한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야기될 사회적 문제, 이를테면 자살률의 증가, 부정적인 사회 분위기 조성 등을 최소화하기 위한 고려로 생겨난 대체 용어이다. 그런데, 정말 '자살' 대신 '극단적 선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도움이 될까?
미국 정신과 전문의이자 예일대 정신과 조교수인 나종호 전문의는 색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동조적 자살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인 '극단적 선택'이라는 말이 외레 자살을 촉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는 두 가지로 나뉜다. 우선, 극단적 선택이라는 용어는 자살이 선택임을 나타낸다. 자살자는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자살을-남겨질 주변사람들을 고려하지 않은 선택인- 택한 "이기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허나, 이는 실제와 다르다. 실제로는 대부분의 자살자는 대체로 "이타적"이다. 자살 직전 그들은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짐만 돼. 내가 죽는 게, 그들의 짐을 덜어주는 길이야" 자살자들의 생각이다. 그들은 소중한 이들에게 저가 얼마나 귀한 사람인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자살'은 선택이 아니다. 그들에게 자살은 '유일한 길'이다.
자살자들이 이기적이냐, 이타적이냐와 무관하게 이러한 대중적 생각은 자살자에게 "자살은 나쁜 짓"이라는 생각을 심어준다. 이는 자살의지를 숨기도록 야기하고, 결국 더 많은 자살이 이루어지게 만든다.
'극단적 선택'이라는 용어는 자살자 본인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유가족에게도 크나큰 영향을 미진다. 자살자의 유가족이 들었던 가장 슬픈 질문 중 하나가 "고인은 왜 자살을 '선택'했습니까?"라는 질문이라고 한다. 자살을 막을 수 있었을텐데, 왜 막지 못했느냐, 네가 유발한 것은 아니냐는 책망을 내포할 수 있는 해당 질문은 유가족으로 하여금 죄책감과 수치심을 불러일으킨다. 가족을 잃은 상실에 괴로워하는 유가족들에게 더 많은 짐과 슬픔을 선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극단적 선택' 대신 어떤 용어를 사용할 수 있을까? 단순하다. '자살'이라는 명확하고 직접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미 서양의 많은 국가들은 자살을 의미하는 'suicide'라는 단어를 뉴스 등 대중매체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꾸준히 증가하는 자살률에 경각심을 가지고 실질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우선 '자살'이라는 용어를 명확히 사용하는 것은 어떨까.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의 자살률은 여전히 OECD 1위이다. 명확한 용어 사용 외에 자살을 방지할 방법은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우선자살희망자의 말에 귀기울이고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 전문적 치료를 권유하고 언제나 네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 등 개인적 차원에서의 도움이 있을 수 있다.
더불어 국가, 사회적 차원에서의 방책이 있다. 나종호 전문의는 특히나 이러한 정책적 차원에서의 예방을 강조한다. 정책적 차원의 예방책으로는 방법에의 접근 제한과 정신 건강 서비스의 확충이 있다.
방법에의 접근 제한이란 자살시도에 어려움을 야기시키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에서 번개탄을 이용한 자살이 늘어나자 번개탄 판매를 금지시킨 것이 있을 수 있다. 다른 여러 나라에서 이러한 방법을 시도하는데 예를 들어 자살충동을 느끼는 총기소지자에게 총기 잠금 장치를 제공하거나 끈을 이용한 자살을 시도한 사람의 집에 방문하여 끈을 모조리 치워버리는 것이다.
물론 자살시도자가 다른 방법을 택하거나 새로운 도구를 구매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단순히 자살이 용이하지 않게 함으로도 자살자의 시도를 저지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또한 정신 건강 서비스의 확충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다른 선진국에 비해 정신 건강 서비스가 부족하다. 정신과, 클리닉, 복지 센터 등의 확충이 시급하다.
서비스 확충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최근 정신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따라 정신질환 및 정신과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사회 기저에는 부정적 인식이 존재한다. 정신질환에 대한 교육을 통해 정신과를 이용하는 것이 나약하거나 이상한 것이 아닌, 되레 용감한 결의임을 인식해야한다.
대한민국에는 흥미로운 법이 있다. 자살교사, 자살방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자살교사란 '자살할 뜻이 없는 자에게 자살을 결의하도록 하는 행위'를 뜻하며 자살방조란 '이미 자살을 결의한 자에게, 그 자살행위를 용이하게 하는 행위'를 뜻한다.
생명의 존엄성이 가장 중요한 가치인만큼 타인의 생명에도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생명을 함께 지켜나자는 인간적인 차원에서도, 노동력을 지켜야한다는 국가적 차원에서도 이는 필수불가결한 법안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합의에 의한 공동자살(동반자살)에서 누군가는 사망하고, 누군가는 생존한 경우, 생존자를 자살교사 혹은 방조로 처벌한다는 것이다. 다수 학설과 판례가 "생존자도 진정으로 같이 죽을 의사로 죽음을 약속하고 동반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생존하게 된 경우, 타인의 자살을 방조(교사)한 사실이 인정되는 경우에 한해 자살교사죄 또는 자살방조죄가 성립된다."고 보고 있으며 실제로 동반자살 생존자를 자살방조로 처벌한 사례들이 존재한다.
일례로 트위터에서 동반자살을 할 사람을 찾던 A가 자살기도 후 혼자 생존하여 징역 1년 및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사례가 있다. A는 트위터를 통해 만난 B와 번개탄을 이용해 자살을 시도했다. 수면제를 먹고 기절하듯 잠들어 있던 중 B는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하였으나 B의 누나에 의해 응급실로 후송된 A는 생존했다.
자살교사와 자살방조의 의미를 살펴보면 이를 처벌하는 게 그리 이상하지 않다. 결국 A는 B가 자살을 시도하는 것을 앎에도 함께 방도를 마련하는 등 B의 자살을 용이하게 하였으니 논리상으로는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극한의 상황에 몰려 저의 손으로 제 목숨을 끊어야했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치료도, 도움도 아닌 형사처벌이라는 게 우습지 않은가. 누군가는 이를 처벌함으로써 자살기도를 저지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글쎄. 외레 이번에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반드시 죽어야한다는 협박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 않을까. 겨우 살아난 이들에게 세상에 저의 편은 없음을 더 깊고 선명하게 새길 잔혹함은 아닐까.
극단적 선택이라는 용어 사용도, 동반자살 생존자에 대한 자살교사 및 자살방조 처벌도 저마다 장단이 있기에 전문가들에 의해, 그리고 시민들에 의해 끝없이 논의되어야한다.
누구도 외로운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 날이 오길 간절히 바라고 또 기도한다.
누군가의 자살을 개별적으로 예측하고 정확히 포착해서 막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그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수만, 수십만 명을 대상으로 넓혀서 예방 사업을 추진한다면 분명 차이를 만들 수 있다.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