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17>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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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하얀 눈밭, 홀로 회색빛을 머금은 남자가 눈을 뜬다. 고글 위를 덮은 눈을 쓸어내리며 주위를 살피는 그. 그의 위로 비행기를 닮은 기계가 지나간다. 겨우 몸을 일으킨 그가 누군가를 찾으며 부르짖는다.
-티모! 티모-! 여기야!
남자의 외침을 들은 듯, 곧 비행물체에서 사람이 내린다. 로프를 타고 내려온 상대는 그와 유사한 옷차림이다. 회색 군복에 고글을 쓴 상대가 움푹 파인 곳에 떨어진 그를 내려다본다. 생존에 대한 확신인가. 안도의 숨을 내뱉는 그와 달리, 상대는 그의 위쪽에 떨어진 무기를 주워 들곤 이리저리 살펴보기에 바쁘다.
-화염방사기가 멀쩡하네. 내려오길 잘했군.
연신 미소 짓는 상대를 보자 그의 얼굴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상대가 고개를 돌린다. 그를 바라보는 상대는 여전히 웃음으로 가득하다.
-오, 이런 미키. 삐지지 마. 넌 내일 다시 프린트되지만 나는 아니라고. 게다가 줄이,
상대가 자신의 몸을 감싼 로프를 튕긴다.
-여기까지밖에 안 내려온다고.
어깨를 으쓱이며 상대가 몸을 낮춘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상대. 미키를 바라보며 상대가 까맣게 웃는다.
-그런데 미키,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
<미키 17>의 시작이다. 죽음의 위기에 처한 미키를 비추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2054년, 인류는 지구의 종말을 앞두고 있다. 연이어 발생하는 커다란 모래 폭풍. 살결이 닿는 순간, 재가 될 듯한 강력함. 생명체가 살고 있는 곳으로는 보이지 않는 지구. 지구의 끝물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행성, 니플하임으로의 이주를 모색한다. 첫 이주자들을 실은 우주선이 떠나기 전, 정부는 대대적으로 인원을 모집한다.
그 무렵, 미키는 사채업자에게 쫓기고 있었다. 마카롱 사업이 곧 부흥할 것이라는 친구, 티모의 말만 믿고 크게 사업을 벌여버린 그는 크게 실패하고 만다. 망한 사업의 결과, 그것도 땡전 한 푼 없던 이의 사업 실패의 결과는 뻔하다. 미키와 티모는 납부일로부터 4일 전 사채업자들에게 납치된다. 그들은 미키에게 기간 내에 금액을 납부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겠다며 연체자의 몸을 절단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이자를 비롯한 재화가 아닌 누군가의 비참한 죽음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산 채로 절단되는 연체자를 보며 미키는 겁에 질린다. 지구 끝까지 쫓아오겠다는 사채업자들의 말에 티모와 미키는 식민 행성 원정에 참여하기로 한다.
비행 능력이 있어 파일럿이 된 티모와 달리, 내세울 만한 자격도 능력도 없었던 미키는 지원자격에 제한이 없는 ‘익스펜더블’에 지원하게 된다.
‘익스펜더블’이란, 쉽게 말해 실험용 인간이다. 인간 복제술이 실현된 2054년. 정치인 마샬을 비롯한 몇몇 이들은 인간 복제술을 이용해 이주 행성의 대기 등을 실험하자는 상당히 비윤리적이고 잔인한 결정을 하기에 이른다. 설명서를 제대로 읽지 않고 무작정 어서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던 미키는 그렇게 갑작스레 자신을 복제당한다. 미키의 기억, DNA, 신체 구조는 정교한 과학기술을 통해 칩에 저장되고, 언제고 복사가능한 상태가 된다.
그렇게 복제 가능하게 된, 영생 아닌 영생을 살게 된 미키는 수십 번 살해당한다. 니플하임의 대기를 마시게 하고, 죽은 미키의 몸에서 바이러스를 추출한다. 이를 바탕으로 만든 진통제와 백신을 주입하고, 죽어가는 미키를 관찰하며 성패를 논한다. 우주 중앙에서 죽음을 강요당하는 미키는, 그렇게 죽고, 죽고, 또 죽는다.
처음, 이 영화가 시작하며 마주한 미키는 17번째 미키. 그는 인류의 적이자 몰살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 크리퍼-니플하임에서 사는 외계인으로, 징그럽다는 의미에서 크리퍼라 명명되었다- 무리에 둘러싸이게 된다. 편안히 죽길 바라며 눈을 감은 그.
그러나 세상은 미키의 편이 아니었던 것인가. 눈을 뜬 후에도 미키는 여전히 크리퍼 소굴에 있었다. 그들을 미키의 몸을 감싸고 미키를 지상으로 내보낸다. 그 기이한 행동에 미키는 소리친다.
-왜 안 먹는데? 내가 복제품이라서 안 먹는 거야? 나 맛있어!
크리퍼는 소리치는 그를 뒤로 한 채 유유히 사라진다.
어찌저찌 생명을 구한 그는 우주선으로 돌아가고, 끔찍한 장면을 목도하게 된다.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간 그의 방에,
또 다른 미키가 있었다.
미키 17의 죽음을 상정한 본부에서 미키 18을 프린트한 것이다. 순간 미키의 머릿속에 강렬한 외침이 울린다.
-멀티플!
처음 인간 복제술이 발명되었을 당시, 사회는 시끌했다. 인간 복제가 가져올 이점과 그것이 야기할 다양한 사화 문제들, 윤리적, 법적 문제들. 기술 이용 찬성 측과 반대 측은 극명히 나누어져 격렬히 다투었다. 그러던 중 사건이 발생한다.
기술 연구자였던 자 중 한 명이 복제술을 활용해 연쇄살인을 저지를 것이다. 그는 자신을 두 명 복제한다. 한 사람이 일하는 동안, 다른 이들은 살인을 저지른다. 한 명의 자신이 알리바이를 만드는 동안, 또 다른 자신은 누군가를 찌르고 가르는 것이다.
이 끔찍한 사건이 알려지자 철학자, 법학자를 비롯한 다양한 계층에서 혼란이 일었다. 이들을 공범으로 볼 것인가. 이들은 각각 같은 수위의 처벌을 따로 받아야 하는 것인가. 이들을 하나로 보아도 좋은가.
빗발치는 원성과 혼란 속에서 사회는 협의점을 찾는다.
‘인간 복제술이 가진 문제점을 인지하고 경계하되, 그것이 가진 가능성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러니, 지구 외의 곳에서만 인간 복제술을 가용하며 이때에도 멀티플-같은 사람이 동시간에 여럿 존재하는 것-은 불허한다. 만약 멀티플이 이루어질 경우, 그 즉시 멀티플을 영구 삭제한다.’
이때, 이 복제술의 대상이 되는 자를 ‘익스펜더블’이라 명칭 지은 것이다.
멀티플의 상황에서 보다 호전적인 성향을 가진 미키 18은 미키 17을 살해하려 한다. 그러나 가센 미키 17의 반항과 여러 상황의 중첩으로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미키의 여자친구, 나샤에게 멀티플의 상황을 들키고야 만다. 나샤는 이 상황에 퍽 만족스러워했고 비밀을 유지했다. 그러나 밀폐된 곳에서의 비밀이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까.
얼마 안 가 모종의 사건으로 미키의 멀티플 사실이 발각되고, 인류는 두 마리의 크리퍼를 손에 얻는다. 한 마리를 잔인하게 살해한 인류는 나머지 한 마리를 실험체로 사용하려 하고, 어떻게 그 사실을 안 것인지 수백, 수천의 크리퍼가 우주선을 감싸며 울어대기 시작한다.
총책임자 마샬은, 자신에게 적개심을 품었던, 자신이 보기에는 그저 구제불능의 쓰레기에 불과한 미키 17과 미키 18에게 폭탄을 장착시키고 크리퍼들을 죽일 것을 명한다. 의료연구팀의 도움으로 크리퍼 번역기를 얻은 미키는 자신을 구해줬던 우두머리 크리퍼에게로 향한다. 인류가 크리퍼를 학살할 계획임을 전하며 미키는 크리퍼에게 원하는 것을 묻는다.
크리퍼는 코끼리를 닮은, 그러나 조금 더 느리고 뚜렷한 눈으로 말한다.
-아기 조코를 데리고 와라. 그렇지 않으면, 있는 것은 죽음뿐이다.
미키 18이 묻는다.
-아기면 충분한가?
-아니.
-그렇다면 무엇을 원하지?
-죽음. 아기 로코가 죽었다.
-우리 중 한 사람의 죽음을 원하는 건가.
-그렇다.
-아기를 데리고 오고, 한 사람이 죽는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평화.
미키 17이 거센 눈바람을 헤치며 우주선으로 향한다. 우주선 앞에서 그가 손을 흔든다. 멀티플에 대한 은폐 등으로 가혹행위를 당하고 있던 나샤는 미키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가 보낸 수신호를 알아챈다.
‘아기를 데리고 오라.’
그들만의 암호에 나샤는 마샬의 아내, 일파가 방심한 틈을 타 그녀를 인질로 조코의 해방을 요구한다. 그렇지 않아도 마샬 일파의 잔혹한 생체실험과 비윤리적 정책 추진에 불만을 품었던 반란군은 이를 기회 삼아 일파를 제압하고 나샤를 돕는다.
베이비 조코를 안은 나샤는 가까스로 미키 17에서 아이를 넘기고, 우두머리 크리퍼는 아이를 안아 든다.
그 모습을 목도한 미키 18. 망설이는 듯하던 그는 마샬에게로 향한다. 벌레 퇴치네 뭐네를 지껄이며 우주선 밖으로 나와있던 마샬. 그에게 뛰어든 미키 18은 망설이며, 그러나 단호하게, 자신의 버튼을 누른다.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퍼지는 붉은 불길.
미키 18은 그렇게 크리퍼의 조건을 충족시킨다.
이후 반 마샬 단체는 미키, 나샤와 함께 체제를 개혁한다. 비윤리적 실험이 자행되었던 복제 머신을 폭파하며, 크리퍼와의 공생을 약속한다.
이제는 제법 친해져 농담도 나누게 된 크리퍼와 인간. 그들의 소소한 입담과 웃음으로 그렇게 이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미키 17>을 읽으며 내내 소설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잘 만들어진 sf 웹소설을 보는 느낌이라 웹소설 덕후인 나는 2시간 반의 긴 러닝타임에도 집중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미키 17>은 한 인간의 삶과 성장을 따라가며 그가 마주한 곳곳의 사회문제를 지적한다. 모래폭풍이 일자 자신들의 과오에 대한 반성과 회복은 외면한 채 새로운 행성을 찾아 식민 개척할 생각에 빠진 이들을 통해 환경 문제와 이를 대하는 현대인들의 불성실, 무책임을 규탄한다. 인간 복제를 통한 사회윤리적 문제를 조명하며 현대 과학 발전의 위험성을 상기시킨다. <미키 17>에서는 주로 여성들이 전투 요원 등으로 활약하게 되는데, 그런 ‘우월한’ 여성마저 하나의 자궁으로 묘사하는 마샬의 대사를 통해 현재 사회에서 대두되는 여성에 대한 차별을 다루고 있기도 하다. 이외에도 다양한 요소들을 다루고 있지만 그중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미키의 문제, 성장과 자아에 대해 논해 보고 싶다.
미키는 자존감이 낮다. 살아있는 자신을 용광로에 버리는 이들에게 괜찮다고 하는 것은 물론, 크리퍼가 자신을 구해주자 외레 자신이 맛이 없냐며, 먹으라고 촉구하기도 한다.
미키가 보육원 출신이었다는 점, 딱히 뛰어난 능력이 없었으며 쉽게 타인을 믿고 사업을 벌이며 놀라울 정도로 무성의하게 자신의 미래를 결정했다는 점을 보면 미키가 애초부터 그다지 자신감 넘치는 이는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미키에게도 죽음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죽음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 괜찮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미키를 도구로 다루었기에, 죽어도 살아나는 하나의 실험체에 불과하다고 보았기에, 수년간 그것이 당연한 것이었기에, 미키는 미키 자신조차도 도구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게 못내 가슴 아팠다.
사회에서는 너무나 빈번히 이런 일이 발생한다. 자존감이 낮은 아이는 흔히 막 대해도 되는 아이로 인식되곤 하고, 그러한 생각들로 인해 스스로도 자신을 아끼지 못하게 된다. 막 다루어도 괜찮은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여림을 무시와 경멸로 누르는 이들의 추악함은 얼마나 잔인한가. 약점을 내비치는 순간, 만만해 보이는 순간, 물어뜯기는 세상이라니, 우리가 21세기를 살고 있음은 분명한가. 씁쓸함과 답답함에 속이 쓰리다.
영화, 드라마, 소설 등 대부분의 이야기에서 잔인한 일을 겪는 것은 대개 부모가 없거나, 있더라도 제대로 된 보호자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빨간 구두를 신은 여자아이가 계속해서 춤을 추는 저주에 걸리자 춤을 멈추기 위해 다리를 잘랐다고. 그 이야기를 들은 한 아이가 말했다. ‘그 애 엄마, 아빠는 왜 안 도와줬어요?’ 이야기를 전했던 이가 차갑게 답한다. ‘걔는 엄마, 아빠가 없어. 그래야 막 다루어도 되니까.’ ‘그래서 이런 이야기에는 보호자가 없어’
문득 그 이야기가 생각났다. 우리가 당장 돌아보면 들을 수 있는 범죄에 대한 여론들만 봐도 그러하다. ‘제 부모면 그렇게 할 수 있었나.’ ‘그 사람도 누군가의 딸이며 아들인데.’
그냥, 사람이어서, 생명이라서 아껴주면 안 되는 걸까. 누군가의 사랑이 될 수 없다면, 누군가의 존재의의가 될 수 없다면 그 삶은 무가치한가. 사람이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생명이 생명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중받았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무언가가 아니라, 네가 너여서, 내가 나여서 살아갈 수 있는,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를, 그녀를 보호할 사람이 없다면 마주한 우리가 그들의 버팀목이 되는 사회가 이루어지길, 그 길에 내가 조금이나마 공헌할 수 있길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미키 17과 18을 목도한 나샤에 대해서도 가볍게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미키 17>을 두 번 보았다. 처음 봤을 때, 멀티플에 그저 좋아하는 사람이 둘이 되었다고 방방 뛰는 나샤는 속된 말로 머리 빈 사람으로 느껴졌다. 멀티플이 야기할 수 있는 문제점은 망각한 채 그저 자신의 욕구를 채울 수 있으면 되는 것인가. 천박하고 어리석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두 번째로 이 이야기를 접하며 사뭇 다른 생각을 했다.
미키 1, 미키 2, 미키 3, 그리고 미키 18. 18명의 미키는 모두 달랐다.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같은 신체를 지녔음에도 달랐다. 누군가는 짜증스러웠고 누군가는 우울했으며 누군가는 호전적이었고 누군가는 찌질했다. 이유는 모른다. 기술이 부족했을 수도 있다.
그들의 성격이 사뭇 다른 것을 보며, 18명의 미키를 모두 미키라도 해도 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성격은 사람을 형성하는 것 중 가장 기본적인 것 중 하나이다. 그런 성격이 다르다면, 행동양식과 사고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렇게 차이가 나는 미키들이 모두 미키가 맞는가. 그 한 사람이라 볼 수 있는가. 애초에 자아란 무엇인가. 어떤 육체가 자아를 대변하는가. 어떤 가치관이 ‘나’를 이루는가. ‘나’는 누구이며 누구를 ‘나’라 지칭하는가.
어쩌면 나샤의 태도는 감독의 자아에 대한 생각을 대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샤는 진심으로 미키를 사랑했다. 독가스가 나오는 좁은 방안에 들어가 피를 토하는 그를 보며 방호복을 갈취해 들어가 그의 죽음을 함께하기도 했고, 미키에게 무례한 질문을 하는 이와 전투를 하기도 했다. 나샤는 각기 다른, 모든 미키를 사랑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분명 차이가 있었을 텐데. 가장 가까이 있는 연인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을 텐데.
혹시 그녀는 그 모든 미키가 가진 가장 본질적인, 공통된 점을 봤던 것 아닐까.
다소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한 사람의 다양한 면모를 좋아하듯 그녀는 그저, 다양한 모습의 미키를 사랑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에메랄드빛 바닷속을 유영하는 기분이 들었다. 짜증스러운 나도, 슈가하이에 과도하게 즐거워하는 나도, 우울에 빠져 허덕이는 나도, 승부욕에 불타 앞뒤 안 가리는 나도, 전부 ‘나’라는 것 아닐까. 그 모든 모습의 너도, ‘너’라는 것 아닐까.
이제는 진부해져 버린 이 자기 긍정을, 긴 이야기, 험난한 여정을 통해 깨우치기란 또 새롭지 않을 수 없다. 헤매이고 비관적이었기에 도리어 가슴에 와닿는다.
때문에 나는 <미키 17>을 기나긴 자기 긍정의 여정이라 명명하고 싶다.
<미키 17>은 다소 잔인하고 선정적인 장면들,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계인-사실은 니플하임의 원주민인-은 다리가 여럿 달린, 촉수 같은 것이 있는 콩벌레처럼 생겼는데 몹시 징그럽다. 처음 그것을 보았을 때는 괜히 몸이 움츠러들며 몸을 긁어댔다.
그렇게 징그러워서, 좋았다. 우리가 보기에는 더럽고 추하게 생긴 벌레 같은 것이, 사실은 우리가 교류할 수 있는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점이 못내 좋았다. 우리가 가진 생리적 혐오가, 그로 인해 저도 모르게 ‘죽여도 괜찮다’, 혹은 ‘죽여야 한다’는 생각을 관객 스스로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이야기의 끝에서 변화한 크리퍼에 대한 인식을 보다 절감할 수 있게 한다. 자신의 사고가 얼마나 편향적이고 비합리적이며 가식적인지 안지 하게끔 한다.
자극적인 장면과 내용을 통해 사회의 갖가지 문제를 드러낸 점 또한 높이 평가한다. 도파민에 중독된 현대인들에게 다큐멘터리식, 혹은 신파식 이야기는 따분함을 제공할 뿐이다. 때문에 “이게 뭐야.”가 나올 수 있는 이야기에서 사회, 혹은 개인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관객이 도처 한 문제들을 인식하고 고민하게 하는 방식이 꽤나 효과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미키를 좋아했고 미키의 실험이 그토록 비윤리적이고 잔인한 지 몰랐던 카이가 마샬의 잔혹함에 격분하면서도 끝내에는 순종하고 마는 모습을 통해, 사회에서는 꽤나 인정받는 이들 조차 타인의 문제를 외면하기도 함을, 혹은 우리가 잘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 사실 우리가 모르는 누군가의 희생 위에 발 디디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를, 고민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미키 17이 유난히 순종적이고 순박한 반면, 미키 18이 호전적이고 다혈질적이라는 점 또한 주목할 법하다. 미키 17과 미키 18의 조우로 미키가 미키 반스로 복귀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둘의 만남은 미키 반스라는 한 사람을 구축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이를 내면적인 관점에서 볼 때, 미키 17과 미키 18은 상극인 특성의 충돌로 생각할 수 있다. 이는 근래에 고민했던 중용, 그리고 변화와 깊이 관련이 있다. 미키 17은 얌전하고 순박하며 순종적이다. 늘 위축되어 있고 숨어들어간다. 한편, 미키 18은 나서는 데 거리낌이 없으며 호전적이고 강력하다. 그리고 그런 둘이 만났을 때, 세상은 다른 측면으로 흘러갔다.
<미키 17>을 하나의 내면 성장 이야기로 본다면, 양극단의 성격이 맞부딪힘으로 변화가 생기고, 자아가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두 성질의 충돌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으리라. 두 미키가 치열했기에, 어떤 방식으로든 맞물리고 함께했기에 스스로가 변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게 꼭 마음껏 부딪혀 보라는 것 같았다.
모순적인 스스로에 부딪히고, 이치에 맞지 않는 양면적인 모습에 좌절하고 크게 다치더라도 그렇게 함께 할 때에서야 나아갈 수 있음을 역설하는 듯했다.
그런 면에서 <미키 17>은 충분히 사유하고 고민해 볼 법한,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다만, 인물들-특히 악역-이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악역을 희화화한 다기에는 아동용 만화의 악역 같은 대사와 행보가 아쉽다. 러닝 타임이 길다고는 하나, 한 번에 여러 주제를 담으려는 것이, 다소 잡다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때문에 <미키 17>에 대한 감상은 극명히 갈리리라 생각한다. 재미있게, 그것도 두 번을 본 입장에서는 다소 스토리에 부족함이 있더라도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 아래 펼쳐지는 피폐 하나 정의로운 SF 이야기를 가볍게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