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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이 자라고

by 하난

대학생활도 어느덧 한주가 지났다. 짧다면 짧은 기간, 많은 일이 있었다. OT에서 잠시 만난 친구들과 꽤 속 깊은 대화를 해보기도 했고, 사상가의 주지에 대해 다각도로 해석하는 흥미로운 수업을 듣기도 했으며 간만에 자기소개서를 쓰고 여럿이 모이는 자리에 참석하기도 했다. 제법 재밌었다. 웅얼거리듯 빠르게 말하여 알아듣지 못하겠는 수업의 교수님이 사회를 위해 기꺼이 나선 사람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도, 늘 연장자들 사이에 있었기에 연이 닿지 않았던 어린 친구들의 사고와 그들의 성숙함을 접하는 것도, 과외 알바 외에는 최초로 최고연장자가 되어보는 것도, 모두 뜻깊고 흥미로운 것이었다.


분명 즐거운 나날임이 분명한 하루하루. 그러나 고질적인 불안은 또 한 번 날 괴롭혔다. 수업에서 하나라도 놓치랴 집중하고 끝난 후에는 도서관에 들러 복습하고, 주말에 한번 더 교재를 살펴봤다. 아직 학기 초라 어색한 얼굴이 많고, 낯선 행사와 제도들이 많음에도 그것을 알아볼 시간에 학습하는 것이 학점을 위해 나은 일이라 생각하고 강박적으로 공부했다.


주말, 피곤한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며 교재를 보던 중 문득 두려움이 일었다. 이제는 제법 예전이 된, 중고등학생 시절이 현재와 중첩되어 떠올랐다.


나는 공부를 꽤 잘하는 아이였다. 아니, 그 이전에 배움을 갈망하고 아는 것에 재미를 느끼는 인간이었다. 누군가의 말을 경청하고 그들의 지혜를 전수받고, 이를 바탕으로 사고하는 것이 즐거웠다. 재미를 붙이면 웬만한 일들은 잘하기 마련이다. 당연한 수순으로 가장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되었고, 꽤 긴 기간을 그렇게 지냈다.


고등학교 시절, 대학을 목전에 둔 마지막 학교이기 때문일까. 동네에서는 소위 ‘똥통 학교’로 유명한 학교였기 때문일까. 선생님들은 내게 큰 기대를 걸었다. 단 한 번도 꿈꾼 적 없던 서울대가 나도 모르는 새 나의 목표지점이 되어 있었고, 편집자의 꿈에 대한 발표로 수상하여 대표로 발표했음에도 다음날 그것 말고 보다 학식 있는 것이 네게 어울린다는 씁쓸한 조언을 들었다. ‘잘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는 순간, 그들에게 어떠한 사명감 혹은 편견이 생겼던 듯했다. 단 한번 망친 시험에 선생님들은 돌아가며 내게 창피를 주었다. 스스로의 잘남에 취해 나태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런데, 난 단 한 번도 노력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들의 말을 놓친 적도, 수업 직후에 복습을 생략한 적도 없었으며, 아픈 와중에도 책을 놓지 않았다.


그때쯤에는 이미 많이 지쳐있었던 것 같다. 수시로 열이 났고, 시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늘 두통과 복통에 시달렸으며 짙은 우울감에 허덕였다.


그리고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나는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4인이 한 방을 쓰는 구조의 기숙사는 안타깝게도 엘리베이터가 없었는데 내가 배정받은 층은 가장 높은 층이었다. 어느 날 잠에서 깬 룸메이트가 엄청난 통증을 호소했다. 다리에 이상이 생긴 듯했다. 울먹이는 그녀를 어찌저찌 부축해 1층으로 향했다. 1층 의자에 앉아 같은 방 아이들과 그녀의 부모님을 기다리던 중, 사감 선생이 미대를 준비 중인 학생에게 이렇게 사람이 꼼짝하지 못할 때 빨리 선을 따라고 하는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발언에 화가 치솟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순간 생기부 작성자가 그 선생임이 떠오른 탓이었다. 미대 준비 학생은 주춤거리며 사감에게 해당 발언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부끄러웠다. 수치스러워 참을 수 없었다.
무얼 위해 공부했던가. 좌우명으로 삼은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이 이런 삶이던가. 어쩌면 가장 거리낌 없이 지적하고 비판할 수 있는 나이인 학생 시기에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잘못을 잘못이라 말하지 못하는 비겁한 인간이라면, 커서는 얼마나 더 못나질까. 못내 두렵고 부끄러웠다.


눈이 붇도록 울었던 그날 이후 내 안의 무언가가 변했다. 자꾸만 어릴 적부터 꿈꾸었던 사람이 어떤 인간상이었는지가 떠올랐다.
타인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 선할 수 없을지라도 그러려고 노력하는 사람. 이기심을 이타심으로 넓혀 나가는 사람.


많은 언어로, 제각각의 시기에 다르게 표현되었을지언정 나의 꿈은, 내가 되고픈 ‘어른’은 그런 사람이었다.


학교에서는, 우수생이 될지언정 사람이 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때, 나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이후로 많은 과정을 겪었다. 독학사로 법학사 4학년 1학기까지 학점이수를 하고, 여러 유형의 알바를 했다. 반려동물에 대한 관심이 커져 동물관리사 자격을 취득하기도 했고 독서모임, 영어모임 등 갖가지 모임에 참석했다. 짧게나마 오스트레일리아로 워킹 홀리데이를 다녀오고, 브런치 작가가 되어 연재를 시작했다.


이러저러한 경험을 하던 중 더 배우고 싶은 것, 더 기여하고 싶은 것이 공고해졌고, 이를 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 대학교라 생각했다. 학문을 파고들고 외부에서 그저 한 인간으로서 행하기 힘든 다양한 활동들을 하며 사람들을 더 진솔하고 직접적으로 만나 의견을 주고받기에 가장 좋은 곳.


때문에 대학에 온 여러 목적이 있지만 가장 큰 목적은 ‘배움’이라고 생각했다. 학문을 탐구하는 것만을 일컫는 게 아니다. 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 귀 기울여보고, 나와 다른 사람들과 억지로나마 묶여서 그들을 이해해 보고, 여러 활동들에 고군분투하며 그 속에서 사고를 확장시키고 세상을 넓혀나가는 것. 그게 가장 본질적인 목적이었다.


그런데 학점에 목매어 다른 활동들은 도외시한 채 벌써부터 강박에 사로잡혀 불안해하는 꼴이라니. 우습지 않은가.

여유로움의 결핍을 깨닫게 된 건, OT에서 만나 친해진 한 동기의 영향이 컸다. 그녀와 수업을 듣던 중 자주 웃음 짓는 그녀의 눈이 반짝이는 걸 봤다. 흥미와 호기심으로 가득 차 ‘배우고’ 있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알아가는 게 즐거워서 궁구 하는 그녀의 모습은 나로 하여금 현재의 문제를 일깨워 주었다.


그러고 보면 짧은 기간 동안 동기들과 선배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자신이 가진 정보를 기꺼이 라이벌이라 볼 수도 있는 상대에게 알려주고 함께하길 독려하는 한 친구의 모습에서 공정함과 다정함을 엿보았고, 나서서 인사하고 밝게 소통하는 이로부터 유쾌함과 활기를 느꼈다. 내향적이라 친해지기 어려워하는 이들이 잘 소통할 수 있도록 부러 광대 포지션을 맡는 선배로부터 책임감을 보았고, 기꺼이 자신의 속내를 내비치는 이로부터 솔직함의 힘을 전해 받았다.
새삼 좋은 사람들이 많음을 느낀다. 새삼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한참은 더 남았음을 느낀다.

드문드문 비치는 주택가들의 자그마한 빛만이 전부인 밤하늘 아래, 부디 나 또한 그들에게 그런 사람일 수 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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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