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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다는 말

영화 <사바하> 후기

by 하난

아이가 태어났다. ‘그것’과 함께.
온몸에 털이 있는 시뻘건 형태의 ‘그것’. ‘그것’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이의 다리를 파먹고 자랐다. 모친의 뱃속에서부터 누군가의 살을 파먹으며 세상에 난 것이다.
모두가 그것이 곧 죽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죽는 것은,
오히려 아이의 가족들이었다.
아이의 모친은 아이를 낳은 후 1주일 만에 작고했다. 아이의 아비 또한 얼마 못 가 세상을 떠났다. 아이는 그렇게 조부모님 아래에 자라게 됐고, ‘그것’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마당에 있는 창고에 그것은 가둬져 있다. 밤마다 기이한 울음소리를 내는 ‘그것’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박웅재는 목사이다. 하느님을 믿는 그에게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가 사이비를 잡아내는 전문 사이비 헌터라는 것?
박웅재는 사이비를 찾아내어 고발한다. 그러나 돈을 받고 기사를 써주고 동료에게 이번 몫이 짭짤하다는 등의 대사를 하는 것으로 보건대 목사로서의 사명감, 종교 모독 방지 등 어떤 숭고한 뜻이 있다기보다는 돈이 목적인 듯하다.
그가 이번에 파헤치는 것은 ‘사슴동산’. 사슴 무늬를 새긴 종교단체로 얼핏 보면 건전한 모임처럼 보인다. 박웅재는 이들이 사이비임을 본능적으로 직감하지만 사이비의 가장 중요한 것이 결핍되어 있음을 알아낸다. 그들은 신도들로 하여금 ‘금전’을 지급받지 않는다.
사이비가 금전을 받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저 믿음으로 뭉친 건전한 종교 단체가 아닌가. 하지만 그렇게 넘기기에는 찝찝한 것들이 남는다.

사슴동산의 분점들, 사슴동산에서 제작한 네 개의 경전, 각 지점에 걸려있는 그림 등을 조사한 끝에 다다른 것은 한 사람. 이제는 제법 예전의 사람이 된, 완성된 인간이라 불리곤 했던 김제덕.
박웅재는 그를 중심으로 그가 후원한 보육원을 찾는다. 그는 한 보육원에서 무려 네 명의 아이를 입양했는데 그중 세 명이 사망한 상태였다. 그것도 한 명은 연쇄살인마의 피의자 신분으로 자살했다.
기이함을 느낀 그는 끝없는 조사 끝에, 100살이 넘는 김제덕이 살아있으며 그가 영생을 꿈꾸며 특정 해에 태어난 여아를 차례로 천천히 죽여왔음을 알아낸다.
완성된 사람이라 생각되었고, 스스로도 그리 생각했던 김제덕은 거만한 충족감 속에 살았다. 그러던 그가 사슴동산을 만들고 네 명의 암살자를 육성한 것은, 어느 기독교인의 예언을 들은 후였다.
예언자는 김제덕에게 김제덕이 태어난 해로부터 100년 후의 해에 그가 태어난 곳에서 태어나는 여아가 김제덕을 죽일 것이라 예언한다.
김제덕은 자신의 영생을 위해 그 해, 자신이 태어난 지역에서 태어난 여아들을, 보육원 아이들을 활용하여 죽이고, 또 죽인다. 누가 자신을 죽일지 모르니 싸그리 다, 죽여버린 것이다.

박 목사가 이 사실을 알아낸 때, 마지막 남은 암살자이자 김제덕에게 교화된 정나한이 ‘그것’과 함께 태어났던 아이, 금화의 숨을 끊으러 향한다. 쉽게 금화를 포박한 정나한이 땅을 파는 사이, 정나한을 빤히 바라보던 금화는 자신의 언니, ‘그것’에 대해 말한다. 자신과 같은 해에 태어난,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여아가 자신의 집 창고에 있다고. 죽일 것이라면 그녀 또한 함께 죽여달라고.
정나한은 금화의 말에 곧장 ‘그것’에게로 향하게 되고,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가녀린 여자아이 하나가 무서울 정도로 곧은 눈으로 정나한에게 ‘진실’을 말한다. 부처를 상징하는, 김제덕에게 있다고 믿어져 온 여섯 손가락을 보여주며 네가 아는 것이 진실인지 직면하라고 하는 그녀의 말에 정나한은 혼돈에 빠진다.
자신의 손으로 아무 죄 없는 아이들을 죽이고, 그들이 나오는 꿈에 매일 시달리며, 자신과 함께 자라온 형제들의 죽음을 목도하고, 그 스스로조차 임무를 완수하면 숭고하다고 알려진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생각이 과연 아무렇지 않았을까. 어릴 적부터 그것을 들어왔기에, 보육원에서 궁핍하고 소외된 생활을 하던 그를 빛으로 이끈 사람이 전한 말이기에, 믿어왔던 그것에 일말의 망설임도 의심도 없었을까.
‘그것’, 혹은 부처라 말할 수 있는 존재는 정나한의 불편함을 건드린다. 의심을 터뜨리고, 결국 정나한이 진실을 마주하도록 한다.
자신이 가장 믿었던, 삶을 바치는 게 당연하다 생각되었던 이의 끔찍한 면모를 직면하고 정나한은 자신의 손으로 이 끔찍한 살인극을 멈추기로 한다. 김제덕으로 인해 깊게 파인 배를 부여잡은 채 그는, 김제덕의 몸에 불을 지른다.

영화 <사바하>는 그렇게 김제덕이 불타는 것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사바하>의 여러 부분이 기억에 남지만 특히 김제덕의 눈물에 대해 논해보고 싶다. 김제덕은 늙지 않는 몸을 지닌 존재다. 이가 범인에게 어떻게 비칠지 알았던 그는 자신의 가장 오랜 제자를 자신의 대역으로 내세우고 자신이 김제덕의 제자인 채 하며 살아온다.
김제덕의 가장 오랜 제자이자 김제덕의 대역은 김제덕인 척해야 한다는 의무만으로 숨이 끊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강제로 생을 연명당한다. 링거를 꽂고 온갖 의학장치를 몸에 붙인 채 가는 목소리로 그는 김제덕에게 죽음을 부탁한다.
영화의 끝무렵, 김제덕은 손수 그의 숨을 끊어주며 눈물을 흘린다. 꼭 그 제자를 아낀 것처럼. 꼭 그것이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던 것처럼. 꼭 그의 희생이 예정된, 대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던 것처럼. 그게 못내 소름 돋았다.

김제덕에게 있어 자신은 정말 ‘신’이었던 것이다.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것, 자신의 생을 위해 강제로 죽임을 당하는 것은 그에게 ‘어쩔 수 없는’, ‘대의를 위한’ 희생이었던 것이다.

문득 ‘믿음’에 대해 논한 너진똑의 영상이 떠올랐다. 우리 삶의 대부분은 ‘믿음’으로 형성되고 유지되며 지탱된다고 하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그러하다. 우리가 가진 돈의 가치, 학업의 가치, 금융기관의 역할, 국가의 존재, 하물며 ‘나’의 존재조차 믿음을 근간으로 하며 믿음으로 인해 완성된다. 이때, ‘믿음’은 ‘믿음’으로 불리지도 않는다. ‘당위’로 여겨질 뿐.
김제덕의 믿음이 그러했다. 그가 신이라는 사실을, 적어도 그에게 있어 ‘믿음’이 아닌 ‘당위’였다.
정나한의 믿음도 그러하다. 김제덕을 신으로 모시고, 그를 위해 피를 바치는 것이 제 생에 가장 숭고하고 당연한 일이라 믿어온 것은, 믿는다기 보다는 당연한 것이었다.

우리는 ‘당연함’이라는 표제의 무수한 ‘믿음’을 유영한다. 그렇기에 믿음은 삶이며, 때문에 믿음은 아름답고 비참하며, 역겹고 고결하다. 필수불가결한 믿음의 늪에서 우리가 제2의 김제덕이, 제2의 정나한이 되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
질문하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론처럼 끝없이 묻고, 또 묻는 것이다. 무엇이 당연한 건지, 왜 당연해진 건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 답이 없더라도, 진저리 나게 불편하고 괴롭더라도 물음표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불편함을 기꺼이 맞이할 때, 적어도 당연함이라는 이름으로 잔혹함을 정당화하는 짓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믿고 싶다’는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예전에 <나만이 없는 거리>라는 애니를 봤다. 그때 들었던 주인공의 대사가 두고두고 기억에 남다 이번에도 머릿속을 메웠다.

“믿는다는 말은, 어쩌면 믿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인지도 모르겠어.”

우리는 이름을 곧잘 착각한다. ‘믿음’을 ‘당연함’으로, ‘믿고 싶음’을 ‘믿음’으로. 진짜 믿는다면 믿는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믿는다는 말은, 슬프고 간절하다. 정나한이 부처의 말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은 채 김제덕에게 달려갈 때의 마음처럼, 박 목사가 ‘진짜’ 신은 존재하지 않는 듯한 빌어먹을 세상에서 ‘진짜’를 만나보고 싶어 ‘가짜’들을 마주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다 한 번이라도 ‘진짜’를 만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처럼.

<사바하>는 불교의 각종 교리를 다각도로 해석한다.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

불교의 핵심 사상인 연기설이다. 모든 것이 무수한 원인과 조건에 의해 서로 상호작용하며 생멸한다는 사상으로, <사바하>에서 김제덕의 진면모를 드러낼 때 활용된다.
<사바하>는 이 말을 악한 것이 있기에 선한 것이 있고, 선한 것이 있기에 악한 것이 있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며 그렇기에 한쪽이 존재한다는 것은 반대쪽이 존재함의 반증이라는 것으로 고려해 보면 그럴듯한 해석이다.
그저 나비효과로만 생각하던 연기설을 이렇듯 상대성의 개념으로 돌린 것은 꽤나 새롭고 흥미로운 것이었다.

영화 <사바하>는 불교의 사천지왕, 기독교의 신에 대한 회의와 믿은, 샤머니즘 등 무속신앙을 결합시켜 오컬트적 요소로 표현한다. 종교적인 것에 큰 관심이 없다면 알아채기 힘든 각종 요소들과 그것을 극대화한 묘사, 연출은 긴장감과 의아함, 호기심과 두려움, 그리고 기이함을 불러일으킨다.
알듯 말듯한 표현의 연속 속에서 관객은 ‘궁금증’이 생긴다. 이야기에 다양한 요소가 있겠지만, 상업 영화에서는 특히 가장 중요한 것은 ‘재미’와 ‘호기심’이라 믿는다. 뒷이야기가 궁금하고, 저 인물이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고, 알고 싶어지는 것. 그것이 이야기에 몰입하게 하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도록 한다. 다시 보게 하고, 분석하게 한다.

영화를 보며 이해가 안 되었던 부분들도 꽤 있었다. 분명 무슨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 무속신앙 등은 잘 모르기에 무슨 뜻인지 알쏭달쏭한 것들. 함께 본 사람이 아는 듯하여 더 궁금해졌던 것들이 있다.-영화에 집중하느라 물어보는 것을 놓쳐버렸다.
때문에 호불호가 극명히 나뉘는 이 영화, <사바하>를 감히 ‘재미있는’ 영화라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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