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 일기
삐리리-
알람 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의 느적이는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고 새벽임에도 밝은 눈이 어둠 속에서 반짝인다. 명령어가 입력된 로봇처럼 준비되었던 행동을 막힘없이 해치운다.
가볍게 세안을 하고 전날 미리 챙길 수 없었던 폼클렌징을 포함한 각종 메이크업 용품 및 강아지 용품들을 가방에 쑤셔 넣는다. 꽉 들어찬 가방을 한 번 더 점검한 후 문자를 보낸다.
- 짐 내리기 시작할까요?
6시 52분. 너무 이른가 싶어 의자에 앉았다 곧장 일어나 전화를 건다.
“출발했어요?”
살짝 당황한 듯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제 출발해.”
“몇 시쯤 도착할 거 같아요?”
“7시 30분, 35분 정도에 도착할 거 같아.”
“짐 내리기에는 너무 이르겠죠?”
“응. 7시 10분쯤부터 시작하면 될 것 같은데?”
순간, 내 목소리만 울리던 공간에 잡음이 섞인다. 부스럭. 끼익. 발이 바닥에 닿으며 나는 어딘가 물기 어린 소리와 옷 스치는 소리가 섞인다.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네.”
어느새 재킷을 입은 부모님이 거실에서 인상을 쓰며 읊조린다.
“얼른 짐 내리자.”
“어..?”
“얼른 해치워야지, 원. 시끄러워서.”
“아니, 지금은 너무 이른데.”
“뭐가. 지금 시작하면 딱 맞겠구먼.”
가볍게 내 말을 무시한 부모님이 쌓인 상자를 구루마에 싣는다. 서둘러 전화를 끊고 옆에 있는 짐을 들곤 그들을 뒤따랐다. 한 번, 두 번. 세 번이었을까. 단숨에 겹겹이 쌓여있던 상자들이 모습을 감추었다. 휑한 방을 괜히 이리저리 둘러보다 짐이 놓인 일 층으로 향한다.
노트북 등 귀중품도 있기에 10여 분 가량 남은 그의 도착을 짐 옆에서 멀거니 기다렸다. 그나마 추위가 어느 정도 가신 날이라 다행이다. 폰을 하고, 커피를 끓여 내려온 부모님과 농담 어린 말을 주고받자니 멀리서 익숙한 포터가 보였다.
방긋 웃는 포터가 스르르 앞에서 멈추고, 검은 옷을 입은 커다란 체구의 남성이 내린다. 살짝 고개를 숙여 부모님께 인사한 그에게 강아지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간다. 왜 이제 왔냐고,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느냐고 힐난하는 듯한 강아지에 그가 웃었던 것도 같다. 그의 쓰다듬은 그래, 꼭 웃음 같았다.
부모님이 들어간 후 그는 재빠르게 짐을 실었다. 강아지를 잡고 있느라 도와주지 못한 것도 있지만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게 외레 방해일 만큼 재빠르고 정확한 움직임이었다. 사이사이의 빈틈, 정갈하게 쌓여 올라가는 상자와 구석에 자리한 가방. 짐 위에 놓인 초록색 그물과 엇갈리게 자리한 끈. 포터를 가득 채웠음에도 안정적인 모양새였다.
짐을 실은 후에는 한 시간가량의 드라이브였다. 이러저러한 노래를 듣고 가벼운 감상을 나누고, 시원시원한 하늘과 건물들의 움직임을 응시한다. 낑낑거리는 강아지를 다독이고 설렘에 대해 논한다. 부드러운 적막 사이로 첫 목적지에 도달했다.
“안녕하세요.”
멀리 서 보면 언뜻 머리가 짧은 여성으로 보이는 사람과 주춤거리며 인사를 나눈다. 지하주차장이 떠나가라 짖는 강아지를 일별 하곤 그의 집으로 향했다. 호수가 많은 깔끔한 오피스텔. 엘리베이터에서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그의 방이 나왔다.
휑한 집 안에는 몇몇의 식료품과 커다란 침대만이 자리했다. 그마저도 침대의 상하체가 분리되어 있어 꼭 버려진 방 같기도 하다. 그들은 협업하여 침대를 타고 온 포터 위로 옮겼다. 이미 포터는 가득 차 있던 상태였기에 그 위로 더 커다란 짐을 싣고 끈으로 매어 고정시키는 건, 살면서 볼 것이라 예상치 못한 진기명기였다. 포터 위로 산처럼 쌓인 짐들은, 놀랍게도 안정적이었다.
짓눌린 채 방긋 웃는 포터와 함께 우리는 최종 목적지로 향했다. 지하 5층에 차를 대어 놓고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약간의 상승감을 느끼며 도달한 층. 엘리베이터 바로 옆에 자리한 호에 미리 받아둔 번호를 친다. 띠리리- 경쾌한 음이 울리고 방이 드러난다. 언뜻 보아도 환한 방과 널찍한 내부. 앞으로 내가 살 곳이었다.
포터의 주인-애인이 명한 대로 방을 닦는 사이, 애인과 애인의 친구는 짐을 옮겼다. 먼저 닦아 둔 자리에 침대를 조립해 넣고, 분업하여 방을 청소한다. 애인의 친구는 바닥을, 나는 주방을, 애인은 화장실을 맡아 묵묵히 닦고 또 닦는다. 오도도 돌아다니는 강아지의 발걸음 소리를 배경으로 물 떨어지는 소리, 슥삭이는 걸레질 소리, 애인 친구의 흥얼거림 혹은 혼잣말 만이 공간을 메운다.
생각보다 청소는 즐거웠다. 내가 살 곳이라는 생각도 있겠지만, 애인이 이런 쪽에서는 전문가인 데다 애인 친구의 적극적인 도움 덕에 할 일이 대폭 줄었기 때문이리라.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갈 무렵, 집주인에게서 추천받은 중국집에서 음식을 주문했다. 그들에게는 감사한 것들이 많아 그럴듯한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는데, 애인 친구가 저녁에 일이 있다고 하여 중국음식이라도 여러 가지 먹을 수 있게끔 5개 정도를 주문했다. 이어서 애인이 음료를 주문하고 잠깐의 휴식이 이루어질 무렵, 집주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세면대 아래쪽이 터져 있기에 아침에 문자를 남겼는데 그에 대한 답이었다. 감사하게도 집주인은 당신이 바로 확인하러 오겠다고 해주셨다. 반려동물 금지 조항이 없었고, 공인중개사 측에서도 애견 동반 가능하다고 했지만 우리 강아지의 목소리가 어지간하여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 애인과 애인의 친구는 강아지를 데리고 차로 향해 있었다. 언제 오시나, 살짝 긴장한 채로 상자더미를 정리하고 있자니 먼저 중국음식이 도착했다.
그나마 내가 드릴 수 있는 식사인데 불까 걱정이었다. 이어서 도착하는 음료. 약간의 참담함을 만끽하고 있으니 집주인이 도착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인상 좋던 그분은 감사하게도 화장지를 가지고 와 주셨다. 집 사놓고 당신도 처음 와 본다며 웃은 집주인은 곧장 세면대를 확인하더니 마트에서 장비 사서 교체해 주겠다고 했다.
당혹감과 감사를 안고 그에게 인사한 후 곧장 애인에게 연락했다. 식사 중 다시 내려가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애인이 그냥 자신이 고쳐주겠다고 했다. 어디서 장비가 난 것인지 그날 저녁도 되지 않아 세면대 아래쪽은 새것이 되어 있었다. 이것저것 잘 고치고 설계하는 것이 그의 재능이자 특질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놀라운 속도와 실력이었다.
집주인이 떠나간 후 먹은 중국음식은 엄청났다. 분 탓인지 과하게 많은 짜장면과 짬뽕. 밍밍함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밀가루 맛. 굶주린 탓에 무엇이라도 넣어보려고 쑤셔 넣었지만 끝내 그것들에 패배하고야 말았다. 집주인아저씨의 맛집 리스트는 깊은 곳에 묻어두기로 결심한 순간이었다.
아직 가구가 다 들어오지 않아 적당히 상자들을 푼 후, 가방들은 한쪽에 몰아넣었다. 애인 친구에게 가벼운 인사를 하고, 애인과 소소한 파티를 했다. 식탁과 스마트 TV는 도착했기에 그것으로 영상을 보며 치맥을 먹었다. 콜라와 위스키를 곁들인 파티는 꽤나 안락하고 즐거웠다. 포근한 새 이불과 온통 내 것으로 채워진 공간, 적응하여 옆에서 애교 부리는 강아지와 영상을 보며 함께 웃고 얘기할 수 있는 애인.
자취 첫날은 꽤나 고되었으나 고됨이 고됨인 지 모를 만큼 즐거웠다.
자취 후 한동안은 택배의 폭격이었다. 각종 가구와 식료품. 정리하고 정리하고 정리하기의 반복. 새벽에 일어나 강아지 산책을 하고 방을 정리한 뒤 조금 쉬고 나면 도착하는 가구들. 가구를 조립하고, 못 하겠는 건 미뤄두고, 바로 옆에 자리한 다이소와 홈플러스에서 장보기의 연속.
본가에서 머물 때보다 바쁜 하루하루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들이 못내 즐겁고 재밌었다. 새로 장만한 식기를 씻고, 매일 주방 쪽을 다시 닦고, 강아지가 적응할 수 있도록 산책과 공놀이를 병행하고, 알바에 나감에도 그 모든 것들이 기꺼웠다.
내 방은 꽤 고층인데 채광이 좋고 경치도 볼 만하다. 낮이면 만연한 구름 아래 산과 건물들이 즐비한 것이 한눈에 보이고, 밤이면 반짝이는 건물 빛이 지상을 메운다. 창가 앞에는 작고 둥근 한지 조명이 길게 늘어져 있는데, 노란빛의 조명은 밤하늘 위에 뜬 달 만 같다. 불을 끈 채 그 광경을 바라보며 은은한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저 세상이 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듯하다.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음에도 세상과 함께 하고 있음이 외레 더 강하게 느껴진다.
좋아하는 책들로만 가득 메운 책장 앞에 앉아 밤하늘을 옆에 두고 침대 위에서 웅크린 채 밤잠을 자는 강아지를 보며 글을 쓰는 것도 꽤나 낭만적이다. 공간분리에 진심인 편이라 학습공간에서 침대가 보이는 것이 괜찮을까 고민을 많이 하였는데, 방 전체가 집이지만 집이 아닌 듯한 느낌이라면, 그 정도로 문제가 되지 않음을 깨달았다.
나의 새로운 자취방은 포근하고 편안함에도 집 같지 않은 면이 있다. 모던한 카펫과 색을 맞춘 이불, 서랍장, 책장. 제법 좋은 스피커 덕에 방을 울리는 노랫소리와 천장에서 내려오는 한지 조명. 살짝 어두운 바에서 볼 법한 스탠드 조명과 고전적인 형태의 책상.
때문에 편하지만 새로운, 깔끔하고 정제된 느낌이 드러난다.
무드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하는 나날이다.
‘분위기’
사실 사람을 볼 때도 우리는 생각보다 더 ‘분위기’에 휩쓸리곤 한다. 같은 이목구비를 가진 채로도 어떤 분위기냐에 호감도가 좌우되고 신뢰도가 달라진다.
방도 마찬가지다. 어떤 분위기, 어떤 느낌을 추구하느냐, 어떤 무드를 드러내는가는 삶에 대한 태도를 재설정하고 경건하게 만들어준다.
자취를 시작하고 이전보다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이에는 내 것에 대한 소유욕과 충만감에서 비롯된 것도 있겠지만, 이 방의 분위기가 큰 몫을 했다고 믿는다. 내가 가장 많은 집중력을 발휘했던 곳, 가장 부지런히 살았던 곳, 카페와 유사한 분위기. 더불어 고전적인 것을 좋아하고 즐겼던 내게 맞춘 각종 가구.
이곳에서의 생활이 퍽 즐거울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적당히 시원한 공기를 맞으며 자취가 처음이라 신난 한 초보 자취생의 자취 일기를 끝맺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