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연휴를 맞이하여 삼촌댁을 방문했다. 자본주의 노예로서의 근무를 마치고 삼촌댁으로 가니, 벌써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삼촌들과 숙모들, 사촌형제 가족들이 기다란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있었다. 어색하게 틈에 끼어 격조하여 낯설어진 이들과 근황을 주고받았다.
내게는 가족이 많다. 삼촌만 네 분에, 사촌 형제만 9명. 사촌 형제 중 결혼하여 아이를 낳은 오빠들도 있으니 그 수가 만만치 않다. 때문에 계약직으로 근무하는 내게 그들 모두의 설 선물을 준비하기란 다소 무리가 있는 것이었다. 핑계 아닌 핑계로 가장 친근하게 왕래하는 몇몇 이들의 선물만 준비해 갔다.
저녁식사 내내 눈치게임이 진행되었다. 이용가능한 곳은 모두가 모여 있는 거실과 갓난아이가 있는 안방. 거실에서 선물 전달식을 할 수는 없으니, 안방으로 불러내야 한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사람들 사이로 첫 번째 타겟이 움직였다. 우리 집의 막둥이, 갓난아이 건우의 엄마이자 사촌 오빠의 아내. 그녀가 아이가 있는 곳으로 향한 틈에 짐을 안쪽에 두는 척 안방으로 향했다. 문을 닫고 속삭이듯 선물을 건넨다. 돈이 없어 모두의 선물을 준비하지는 못했지만 꼭 주고 싶었다는 말에 언니가 웃음 짓는다.
아슬아슬한 첫 번째 임무를 성공한 뒤에는 조금 더 과감해졌다. 타깃은 가장 안쪽에 앉아 있는 넷째 삼촌. 바로 옆에 있던 아빠가 화장실에 간 틈에 삼촌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다른 삼촌들이 앞으로의 계획과 마음가짐에 대해 묻는 것에 성심성의껏 답하고, 잠깐의 정적이 있는 순간. 넷째에게 귓속말로 할 말이 있으니 옆방으로 오라고 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면 보잘것없는 명절날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쓰는 이유는 바로, 넷째 삼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넷째 삼촌에게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선물이 하나 더 있었다. 먼저 몇몇 사람들과 공통으로 준비한 선물을 전하고 그만을 위한 선물을 꺼내 들었다.
삼촌이 웃으며 화장대 위에 올리기에 얼른 뒷 번의 선물은 삼촌만을 위한 거니 삼촌만 보라 일렀다. 더불어 지금 읽어봐도 된다는 말에 삼촌이 한껏 미소 지으며 선물을 꺼내 든다.
어설프게 풀칠한 갈색 편지 봉투.
삼촌에게 준비한 선물은 편지였다.
매년 한 해를 마무리하며, 혹은 새해를 맞이하며 편지를 전할 이들의 목록을 적고는 한다. 나 혼자 일군 삶이 아니기에 연말 연초를 빌미 삼아 그들에게 감사를 전하고자 함이요, 편지로나마 날 기억하고 추억해 주었으면, 가끔 생각나면 불러주었으면 하는 관계에 대한 열망으로 말미암은 탓이다. 그 목록에는 사소한 이름들도 많았다. 다니는 필라테스원의 선생님들, 친절했던 집 앞 편의점 점장님 등. 그저 이어지고 싶다는, 한 명이라도 더 나로 인해 잠시나마 기뻤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생각나는 모든 사람에게 글을 쓴다.
그러나 그 긴 기간 동안 그 목록에 삼촌은 없었다.
유년기,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다 보니 어린이집을 마치거나 학교를 마치면 곧장 외조부님 댁으로 향하곤 했다. 언제나 빼빼로를 들고 기다리던 웃음이 예쁘시던 외할아버지, 무뚝뚝하지만 언제나 우리를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곤 하시던 외할머니,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내 의견에 귀 기울여주던 이모와 웃음밖에 못 짓는 사람마냥 늘 웃고 있던 우리 넷째 삼촌.
그들과 만두를 빚고, 커다란 강아지를 목욕시키고, 드라마를 보고, 엉망으로 쓴 나만의 소설을 보여주고, 친구들과의 일화를 떠들어대고, 방청소를 하고.. 내 유년기의 기억은 온통 그들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미화된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들과의 추억은, 그래. 목가적이다. 햇살이 좋은 날 드넓은 들판 위에 살랑거리는 풀잎을 친구 삼아 누운 소녀의 사진만 같다.
때문에 몹시 슬펐다. 갑작스레 닥친 외할아버지의 부고와 연이은 외할머니, 이모의 죽음. 내게는 부모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애정했던 사람들이 떠나간다는 건, 그것이 슬픔인지도 모를 슬픔이었다.
내게 소중했던 만큼 삼촌에게도 그들의 죽음은 충격적이었고 슬펐다 보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살던 삼촌은 어느 날 문득 모시고 온 차분한 인상의 여성과 혼인했다. 가정을 꾸린 삼촌은 당연하게도 이전의 삼촌과는 사뭇 달랐다. 그의 애정이 줄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라 생각한다. 하지만, 적어도 나보다 소중한 ‘가정’이 생긴 것은 분명했다.
그를 이해하면서도 그게 못내 충격적이고 서글펐다. 삼촌마저 떠나버린 듯했고, 어여뻤던 기억이 공허해져 갔다. 자연스레 삼촌과는 서먹해졌다. 만나는 횟수도 줄고, 만나더라도 예전만큼 친밀하게 굴진 못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다. 올해의 편지 목록을 만드는데 자꾸만 삼촌이 떠올랐다. 어색함과 부끄러움에 그 이름을 차마 적어 넣지 못하길 며칠.
오빠의 방문일이 다가왔다. 오빠에게 편지를 전했던 그 일이 힘을 불어넣었다. 이끌리듯 삼촌의 이름을 써넣고, 조심스레 펜을 들었다.
어색함에 편지를 쓰지 못했었다는 서두로 시작된 편지는, 온통 엉망이었다. 삼촌과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그날들이 지금의 나를 일구었다며 감사하다, 급작스레 삼촌이 미웠다고 하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고 손이 가는 대로 글을 썼다. 맞춤법을 맞게 썼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10여 년간 묵혀뒀던 생각들, 감정들, 감사와 애정. 그 모든 걸 털어냈다. 전했다.
글을 다 읽은 삼촌은 눈을 붉게 물들인 채 옆에 앉아보라고 했다. 삼촌이 그동안 한 번도 못 물어본 것 같다고, 삼촌이 그렇게 결혼하고 간 게 속상했느냐는 말에 또 한 번 울음이 터졌다. 삼촌의 마음을 듣고 내 마음을 전했다.
이제 어른이 됐다며 안아주는 삼촌에 훌쩍이며 웃었다.
또 하나, 막혀 있던 무언가가 사라진 듯했다.
이번 명절의 짧은 저녁식사는 꽤 특별했다. 넷째 삼촌의 일뿐만 아니라, 늘 꼰대 같다고 생각했던 둘째 삼촌, 내게는 너무 할아버지처럼만 느껴지던 첫째 삼촌, 어느 날부터 멀어진 셋째 숙모를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들이 조금 더 ‘가족’처럼 느껴졌다. 그들을,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느꼈다.
집에 돌아와 한참 생각했다. 내가 성장한 걸까, 그들이 바뀐 것일까. 근무하면서도 계속 생각했다.
아마, 둘 다인 듯하다. 그들은 조금 더 너그러워졌고 나는 조금 더 차분해졌다. 어느 한쪽이 아닌 양쪽이 모두 기울어지고 멀어지다 드디어 한 곳에서 만났다.
그게 벅차고, 기뻐서 도저히 글로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 대한 철학적인 생각, 심리적인 분석. 이성적인 평가. 많은 걸 해봤지만 지금은, 그냥, 그냥 그 감각을 기록하고 싶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기쁨을. 그 평안한 감격의 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