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어휘력>을 읽고
“나의 세상은 언어의 한계만큼 작거나 크다.” -어른의 어휘력, 유선경-
오랫동안 펜을 잡았다. 다시 책을 펼쳐보고 좋았던 문장을 되짚었다. 무얼 쓸지 나열해 보고 마인드맵을 적었다. 나만의 문장을 만들어보고 다시 책을 열었다.
책이, 이야기가 마음에 들면 늘 이게 문제다. 너무 좋아서, 좋은 만큼 잘 표현하고 싶어서 각을 재고 부풀리다 아무것도 적지 못하게 된다.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하나의 사랑이 스러진다.
때문에 그냥 적기로 했다. 두서없는 잡담에 불과할지라도 엉망인 글일지라도 우선 무어라도 적어보기로 했다.
<어른의 어휘력>은 제목처럼 어휘력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어휘력이 없어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점, 어휘력 부족으로 생기는 일상 속 어려움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대부분에 공감했지만 특히 어휘력이 부족한, 말귀 못 알아듣는 사람들에 대해 논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말귀 못 알아듣는 사람과 말귀 못 알아듣게 말하는 사람이 만나 말해봐야 복장 터질 일밖에 없다. 어휘력이 부족해서일 뿐인데 ‘그 인간 문제 있다’로 비화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어휘력과 인격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이 경우 어휘력 ‘부족’보다 ‘잘못’에 가깝다.) 이런 일을 반복적으로 겪다 보면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 느낌 등을 표현하는 데 자신감을 잃는다. 어휘로 생각하고 정리해 표현하지 않는 게 일상이 되면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자기가 파악할 줄 모른다.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 자신이 없다. 간혹 성격에 따라 미운 일곱 살처럼 공격적이 되는 수도 있다.’
이 부분을 가만히 읽는데 자꾸만 아빠가 떠올랐다. 늘 ‘그거 있잖아’, ‘알잖아’로 상대가 알아듣길 바라던 아빠. 대화의 책임과 의무를 온전히 청자에게 넘기는 대화에 진저리가 났다. 아빠 덕분에 ‘대화는 발화자와 청자의 합작이지만 대부분의 의무는 발화자에게 있다. 때문에 발화자는 자신이 하는 말의 적절성을 끊임없이 고뇌해야 한다.’는 지론을 얻기까지 했다. 알아듣기 힘들고, 알아듣더라도 책임지지 않는 이의 말을 듣고 싶지는 않다. 대개 그런 대화는 지치고 짜증스럽다.
그럼에도 아빠에게 악의가 없었음은 안다. 그저 적절한 표현을 생각해내지 못했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기에 부적절한 어휘, 자극적인 문장을 구사했을 뿐임을 안다. 그럼에도 상처받았고, 그 상처가 오랫동안 곪아 괴롭기도 했다.
어쩌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음’ 혹은 ‘이상함’으로 넘겼던 많은 갈등과 상처들이 어휘력 부족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우리는 ‘사회성’과 ‘대화법’을 논하곤 하지만 어휘력을 논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우리말이기에 잘 안다는 착각으로 우리는 국어 공부를 도외시하며 살아간다. 영어사전을 검색하고 영어단어 어플을 쓰고 영어단어장을 가지고 다니는 이들은 많으나 표준국어대사전에 접속하고 한국어를 들여다보는 사람은 지극히 적다.
‘안다’는 생각으로, ‘대화’하며 는다는 생각으로 어휘 학습은 하지 않는다. 어쩌면 옳은 생각일지도 모른다. 정말 잘 알 수도 있고, 대화가 그 어휘가 사용되는 상황을, 문장에서의 구성을 학습시켜 줌으로써 그 어휘가 내 것이 될 수도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책을 많이 읽고,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자연스레 어휘는 늘 거라고.
수능공부를 하며 그 생각에 오류가 있음을 알았다. 수능 국어의 다양한 영역 중 어휘 파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틀리는 경우도 적었고 어휘에는 자신이 있었던 탓이다. 그런데 복병은 문학과 비문학에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답이 맞아서 답지를 들여다봤는데 설명이 이상했다. 분명 아는 어휘로 가득한 문장인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인과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혹시나 싶어 핵심 어휘를 검색해 봤다. 문맥으로 보건 데 내가 생각한 뜻과는 너무 다른 것 같아서.
아니나 다를까. 해당 어휘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내가 알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 ‘느낌’으로 아는 것의 문제점이었다.
우리는 많은 단어를 ‘느낌’으로 받아들인다. 느낌도 중요하다. 결국 언어는 통용되어야 하기에, 특정 어휘가 가진 말맛이 있기에, 느낌은 사실 굉장히 중요하다. 그러나, 언어는 결국 ‘약속’이다. 어떠한 의미를 내포하기로 한 우리들의 ‘상징’이다. 서로 알기 위해 지정해 둔 의미에서 완전히 벗어나 버린다면 그건 더 이상 ‘말맛’이 아니다. 제멋대로인 혼자만의 감각일 뿐.
비슷한 일례로 ‘인정’이란 단어로 싸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연인이었던 두 사람. 남자는 여자의 뛰어난 능력에 놀라움을 내비치며 ‘인정한다’고 했고, 그것이 싸움의 시발점이었다. 여자는 해당 표현에 불쾌함을 드러냈다. ‘인정’은 하급자를 대할 때나 쓰는 말 아니냐고. 내가 네 하급자냐고 화를 낸 것이다. 남자는 당황하며 인정이 어떻게 그런 의미로만 사용될 수 있느냐고 물었으나 싸움은 더 커질 뿐이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양쪽이 모두 이해되었다. ‘인정’의 사전적 의미는 ‘확실히 그렇다고 여김’. 사전적 의미를 보면 남자의 입장이 이해된다. 정말 너의 능력이 확실하다는 의미로 이야기한 것인데 과도하게 분노하는 여자친구에게 당황했을 그 심정을 알 것 같다. 반면, 여자친구의 감정도 알겠다. 우리가 언제 ‘인정’이라는 말을 사용하는가. 적어도 내 경험을 반추해 보면 대부분 위에서 아래로의 승인의 감정에 대해 사용되어 왔다. 그런 케이스’만’ 보면서 지냈다면 불쾌함을 느꼈을 법하다.
때문에 어휘를 공부하는 것은 필요하다. 사전적 의미가 무엇인지, 대개 어떤 상황에서 활용되는지, 어떤 식으로 사용되는지, 어떤 어감을 가지는지. 상세하게 들여다보며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갈등의 소지를 줄이고 네 말을, 우리의 의도를 보다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애인은 질문이 많은 사람이다. 죽을 때까지 한마디 말만 할 수 있다면 무얼 하겠느냐 물었을 때 “왜?”를 선택할 정도로 질문에 진심이다. 어쩔 때는 물음표 살인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음식을 먹다 어떤 게 싫다고 하면, 왜 싫었는지를 묻는다. 향이 싫었는지, 식감이 싫었는지, 혹은 그 상황이 싫었는지.
노래를 들으면 어땠는지 묻는다. 어떤 부분에서 좋았는지, 왜 좋았는지.
슬프다고 하면 슬픈 이유를 묻는다. 왜 슬픔으로까지 상황이 이어졌는지를 묻고, 그 감정이 슬픔이 맞는지를 묻는다. 기쁨도 마찬가지다.
어떨 때는 짜증 나기도 했다. 맛있으면 맛있고, 싫으면 싫은 거지 다 이유를 말해야 하는 것이 피곤하게 느껴진 적도 있다.
그런데 질문을 받고 나면, 다시 한번 맛을, 음악을, 상황을, 감정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두루뭉술 뭉뚱그려 생각했던 것들을 조각내어 이름을 붙이고 연결해 문장으로 내뱉는다. 그러다 보면 나의 생각을 발견해 내기도 하고, 외면해 왔던 감각을 일깨우기도 했다.
어느 철학자가 모든 사물을 친절하게 바라보라고 했던가.
적어도 그와 있을 때면 나는 나의 세상을 친절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곱씹고 되뇌고 문장으로 적어내며, 소리 내고 나면 후련해졌다. 유유한 구름에 올라탄 듯도 했다.
사고가 확장되고 힘이 생기는 게 느껴졌다. 어휘가 풍부해짐을 느꼈다.
그와는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진심으로 울고 불고 싸운 적도 있고, 토론을 벌인 적도 있다. 그는 꽤 단호한 사람이라 결코 비논리에 져 주는 법이 없었다. 나는 늘 그의 말에 반박하고자 머리를 굴렸고, 그의 주장에 숨은 결점과 내 주장의 핵심 근거를 떠올리려 애썼다.
유튜버 ‘너진똑’이 ‘남 욕하면서 성장하는 법’이라는 제목으로 올린 영상이 떠오른다. 우리의 사고는 평온하고 편안한 상태에서는 잘 성장하지 않는다고, 누군가 싸움을 걸어올 때, 상대방을 이기고 논리적으로 비난하고 싶을 때, 우리는 어느 때보다 적극적이고 효율적으로 학습하고 깊어진다고.
슬프게도 그것이 진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애초에 ‘험담 이론’이라는 것이 있을 만큼 인간은 험담과 비난에 익숙하고, 이를 통해 성장해 온 존재가 아닌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인류의 진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니, 문득 인간 ‘본성’에 대해 질문했던 사람이 떠오른다. 보드게임 카페 점장은 사유가 많으신 분으로, 커피를 타다 갑작스레 인간 본성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시곤 했다. 아직 친밀한 사이가 아니고, 체리콕 타면서 할 정도의 수위를 찾지 못해 웃음으로 무마하곤 했지만 하고픈 말이 너무 많았다. 그걸 여기서 실컷 해볼까 한다.
인간 본성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정말 무수한 학자들이 다양한 지역과 시간대에서 끊임없이 이야기해 온 것이다. 윤리에 관심이 많았기에 이와 관련된 서적도 꽤 보았고 공부해 봤지만, 지금의 나는 인간은 ‘이기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순자가 말한 악한 이기심과는 사뭇 다르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이다. 동물이기에, 생명이기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기심은 나쁜 것인가.
이기심으로 고른 아이의 빵을 빼앗을 수도 있다. 이기심으로 이간질하고, 이기심으로 전쟁을 벌이며, 이기심으로 착취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기심으로 누군가를 돕고, 이기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
이타심은 타인을 포함한 이기심이다. 누군가의 행복을 바람은 그것이 나의 행복이기 때문이며, 누군가의 미소를 바람은 그것이 나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결국 나의 감정을 위해, 누군가를 ‘나’의 범위에 포함시킨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기심이 나쁘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이기심을 악으로 단정하고, 지양해야 할 것으로만 여긴다면, 사실상 나가 죽으라는 지나친 이상주의자의 비현실적 선언이나 다름없다.
<어른의 어휘력>은 공감되는 문구도, 색다른 관점이라 흥미로운 부분도 참 많은 책이었다. 한 줄, 한 줄이 가슴에 와닿았고 많은 생각이 들게 했다. 하지만 때문에 외레 감상문을 쓰기가 참 어렵다.
너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서, 놓치고 싶지 않은 부분이 많아서 무엇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횡설수설 생각나는 대로, 손이 가는 대로 낙서 같은 글을 남긴다.
책의 좋았던 부분을 설명 없이 무작정 적어 게시하는 것을 지양하지만, <어른의 어휘력>에는 감히 공유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문장이 너무나 많아 인상 깊었던 문장들을 나누어 보고자 한다.
이러다 아무것도 안 쓸 것 같아 어영부영 반쯤 감긴 눈으로 쓴, 아마 나중에 다시 고쳐 쓸 어설픈 초안이 발췌문으로 조금이나마 채워지길 바라는 바이다.
“어휘력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힘이자 대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며 어휘력을 키운다는 것은 이러한 힘과 시각을 기르는 것이다. 동시에 자신의 말이 상대의 감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인간이 서로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낱말 50만여 개, 5,500만 여 개 따위가 무슨 소용일까. 말과 글은 우리가 서로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증표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낙인찍으면 말과 글은 효용을 잃는다. 말과 글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숨이며 희망이다.”
“더 이상 한이라는 어휘로 체념하지 않기 바란다.”
“울지 마라. 소리 내 말하라. 글을 쓰라. (중략) 그래야 내가 변할 수 있고 상황을 바꿀 수 있다. 내 속을 풀어내는 것도 타인을 설득하는 것도 인간관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설령 말 때문에 사달 날 위험이 크다 해도 결국 말일 수밖에 없다.”
“필사하면서 아주 느리게 지워 나갈 수 있었다. 전형적, 주입식, 세뇌…..
힘센 어른들이 젠체하며 한 모든 말들,
힘없는 어른들이 비겁해서 한 모든 말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배웠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행동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 대해서.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것에 대해서.
내 잘못이 아닌 것에 대해서.
내 맘껏 탓하고 욕해도 되는 것에 대해서.
나는 조금씩 후련해졌고 덜 외로워졌다.”
“당신도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른다. 써봐야 안다. 글쓰기가 우리에게 주는 탁월한 효과 중 하나는 생각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너를 대하는 감정은 지구 역사를 통틀어 유일한데 이 특별함을 표현하기에 사랑은 흔하고 닳은 어휘다.”
“아름다움은 발견해야 한다. (중략) 아름다움은 희귀하지 말아야 한다. 태어난 것은 모두 죽으니 그 죽음의 개수만큼 흔하디 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발견해야 한다. 아름다움은 레디메이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