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푼, 두 푼 모아, 사실은 은행이라는 임대인에게 월세를 내며 마련한 집. 완전한 내 집이라기에는 갚아야 할 것이 더 많지만 어찌 되었든 온전한 ‘나의 집’이 생겼다는 기쁨은 주체할 수 없었다. 매매 사실을 알게 된 회사 녀석들이 당연한 듯 마련한 술자리. 괜히 싫은 척 빼놓고서는 막상 입에 술이 들어가자 녀석들을 붙잡지 못해 안달하는 건 나였다.
정 없이 도망치는 녀석들에 씁쓸함을 삼키고 흐느적대며 집으로 돌아갔다. 아, 나의 집. 우리의 집. 곤히 잠든 아내와 아이의 얼굴을 보고, 오는 길에 산 간식을 선물처럼 놓아둔 뒤 베란다에서 홀로 한잔을 더 들이켰다. 이제는 음료처럼 마실 수 있게 된 술을 삼키며 멋들어지게 자리한 집 앞 산과 하늘을 바라본다.
한 여자가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진 것도 그때였다. 기어가듯 아슬아슬하게, 그리고 간절하게 움직이는 여자. 그 뒤에 따라붙은 검정 투성이의 남자. 모자를 쓴 남자가 팔을 올린다. 내린다. 올린다. 내린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둔탁한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퍽. 퍽. 남자의 손에 들린 망치가 사정없이 여자를 가격한다. 피투성이가 된 여자의 움직임이 멎는다.
떨리는 손을 부여잡으며 112를 더듬는다. 어서. 어서. 어서.
그때.
팟-
시야가 밝아졌다. 불이, 켜졌다.
황급히 일어나 거실 불을 껐다. 불을 키라며 성을 내는 부인에게 얼버무리며 베란다로 기어간다. 베란다에 자리한 식물들 사이로 범인을 본다.
범인은,
보고 있다,
여기를.
영화 <목격자>의 도입부이다. 목격자는 주인공이 자신의 아파트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목격하면서 시작된다. 새벽에 일어난 잔인한 살인사건. 목격자로서 진술을 할 것인가. 진술을 한다면, 온전히 보호받을 수 있는가. 자신과 가족의 신변에 대한 염려, 어쩌면 유일한 목격자로서 진실을 알리고 범인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교차되어 반복된다.
<목격자>는 그런 주인공의 심리를 기반으로 한 범죄 스릴러 영화이다. <목격자>는 개봉 당시, 영화관에서 한번 보았다. 그런데 근래 넷플릭스를 구독하게 되고 스릴러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에 오랜만에 다시 <목격자>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영화 <목격자>를 보는 내내 긴장감과 죄책감, 갈등과 연민에 빠지게 된다. 목격자로서 진술하는 게 맞지 않을까. 범인을 그냥 내버려 둬도 되는 것일까. 내가 처음 제대로 신고를 했다면 피해자는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 때문에 죽은 건가. 내가 신고를 한다면, 진술을 한다면, 우리 가족은 안전할 수 있을까. 경찰을 믿어도 되는 것일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범인이 나를 지켜보고 있을까. 그는, 내가 목격자임을 아는가.
두려움과 불안함에 불규칙하게 뛰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고민에 빠진다. 우리나라는 얼마나 목격자와 증인을 잘 보호하고 있는가. 신고를 했다는 이유로 곤란해지는 상황은 얼마나 또 많은가. 신변보호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와중에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호의와 정의를 바랄 수 있을까. 신고하지 않은 그들을, 과연 비난할 수 있을까.
어딘가에서의 선인이 어떤 곳에서의 악인이 되는 경우는 흔하다 못해 발에 차인다. 사회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가정에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고, 가정에서는 다정다감한 엄마 또는 아빠가 사회에서는 악랄하기 그지없는 상사인 때도 많다.
<목격자>는 이런 류의 딜레마를 가져온다. 피해자를 위해, 목격자로서의 양심을 위해 신고를 한다면, 사회에서 인정하는 ‘훌륭한 시민’이 될 수 있을지언정 저의 선택으로 가정을 위기에 빠뜨린, 무능한 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점점 더 선의에 인색해진다. 그들이 그러고 싶어서일까? 사람들의 마음에 정의가, 그에 대한 열망이 죽어버렸기 때문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지켜지지’ 못해서, 는 아닐까.
<맹자>를 보다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무항산 무항심’
‘생계가 보장받지 못한다면, 도덕심은 지켜질 수 없다.’는 말이다. 맹자는 무항산 무항심이 당연함을 연설하며, 생계를 보장받지 못해도 도덕심을 지켜나갈 수 있는 ‘군자’가 항산의 보장, 즉 백성의 생계를 보장하려 노력해야 함을 역설한다.
유교의 이념을 여전히 계승하고 있고, 민주주의와 복지국가의 원리를 바탕으로 세워진 대한민국에서, 점점 타인에 무감각해지는 사람들이 우리가 흔히 일컫는 ‘정의로운 사회의 정의로운 구성원’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정의롭지 못한 개인을 탓하기 이전에, 그들이 정의를 지켜나갈 수 있는, 양심을 지켜나갈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궁지에 몰아넣고 ‘그래도 지켰어야지’하며 비난하기 이전에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 선의로 나선 목격자와 증인을 지키고, 선의로 피해자가 된 사람들을 지키고, 인과응보, 권선징악이 조금이라도 실현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를 논할 수 있겠지만 ‘동질감’이라 생각한다.
예전에 읽었던 책에서, ‘김 군 사건’을 본 적이 있다.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법을 개정하도록 만든 사건으로, 철도 쪽에서 일을 하던 노동자 김 군이 철도에 치여 사망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많은 국민의 공분을 사게 되고, 노동자에 대한 권리 보장 법안이 만들어지도록 했다.
사실 하루에도 무수한 안전사고가 발생하고, 발생해 왔다. 그 많은 사건들 중 유독 김 군 사고가 주목을 받은 것은 무슨 연유에서였을까?
저자는 ‘컵라면’을 이유로 든다. 김 군이 죽던 날, 그의 가방에 있었던 컵라면. 그것이 대중에 알려지며, 죽은 김 군이 저들과 비슷한 사람임을, 일에 치여 하루를 보내다 컵라면으로 끼니를 면하는, 또 다른 저들이었음을 인지하게 된 것이 계기였다고 말이다.
결국 사회를 바꾸는 디딤돌은, 핵심 추는 ‘동질감’이 아닐까.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생각, 나도 네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
인간은 어디까지나 이기적이어서 ‘내 일’이 되어야 나선다. 그렇기에 우리가 ‘함께’ 누군가를 위하고, 세상을 바꿔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네’가 ‘내’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되는 것이다.
‘너’에서 ‘우리’가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비명 지르는 피해자를 외면하지 않을 수 있고, 쓰러진 노인을 모른 체하지 않을 수 있으며, 권익 보호를 위해 소리 낼 수 있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하자. 담론을 하고, 토의를 하자. 동질감을 가지려면 널 알아야 하니까. 네게서 공통점을 발견하고, 공감하고, 그렇게 ‘나’의 이야기로 들여야 하니까. 더 많은 감정을 나누고, 더 많은 생각을 나누자.
대부분의 문제가 대화의 단절에서 오듯, 우리 사회의 문제도 단절에서 온다고 믿는다. 때문에 조금 더 시끄럽고, 조금 더 열려있고, 조금 더 다정했으면 좋겠다. 신나게 내 얘기를 떠들고, 진지하게 네 얘기를 들으며, 그렇게 동화되는 순간들을 더 많이 경험해 나가고 싶다.
더 많은 이들이 이런 경험을 하고, 또 한다면 언젠가는 다 같이 한 방향의 목소리를 낼 수도 있지 않을까.
영화 <목격자>는 스릴감 있게 주인공의 고뇌를 비춘다. 영화를 보며 한 번쯤은 고민해봐야 할 문제를 상기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끝내 경찰까지 살해한 범인의 동기 혹은 목적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이미 자신의 신분이 드러난 마당에 목격자가 많아졌다는 이유만으로 주인공 가족에 대한 복수를 포기한다는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지만 동시에 범인의 사정을 비추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범인의 사정이 어떠했는지, 그의 동기가,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당연히 중요하다. 같은 범행이라도 동기를 알고 사정을 아는 것은 다음에 발생할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으며, 유사한 범행의 범인을 검거하는 단서가 될 수도 있다. 응보주의와 함께 예방적 효과를 노리는 우리 법이념에도 사정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하지만 근래 많은 서적과 영화, 드라마에서 인물의 입체성을 위해 범인의 사정을 외려 피해자의 것보다 강조하며 범인에게 동조하고 동정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본말전도로 결국 피해자와 목격자 등 무고한 이들이 겪은 고통을 과소평가하게 만들고, 가해자 위주의 사고로 흐를 수 있다는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보건대, 영화 <목격자>는 일부러 범인의 사정을 누락시킨 채 그로 인해 가슴 졸이고 실질적인 피해를 입어야 했던 ‘피해자들’을 보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영화 <목격자> ‘완벽한 영화’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쉬는 시간에 몰입도 있게 보고 생각하기에 꽤나 흥미롭고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킬링타임용 범죄 스릴러 영화를 찾고 있다거나 숨바꼭질 류의 있을 법한 범죄 영화를 추구하는 분들에게 추천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