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쎄븐>을 보고
피곤한 나날이 이어졌다. 일 년을 책상에만 앉아있던 몸이 갑작스레 알바 두 개를 시작하며 이리저리 움직인 탓도 있고, 알바 시간이 식사시간이라 식사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 탓도 있다. 연말 연초라 약속이 연이어 잡힌 탓도 있고 새로운 곳으로의 이주에 신경 쓴 탓도 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지하철에 타면 잠들어 종점까지 가고, 서서 졸기를 반복하던 요즘. 모처럼 휴식다운 휴식을 취하고자 애인과 집에서 영화 데이를 즐겼다.
영화데이의 첫 영화이자 마지막 영화로 채택된 영화는 -영화 하나를 본 게 다 이기에 영화데이라 하는 것이 우습긴 하지만, 내가 중간에 자 버린 탓에 어쩔 수 없었다- 95년도에 개봉한 범죄 스릴러 영화 <쎄븐>이었다. 영화 <쎄븐>은 신중하고 연륜 있는 나이 든 형사와 젊고 열정적이지만 거만한 새내기 형사가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내용의 작품으로, 7개의 대죄에서 영감을 받은 듯했다. 범인은 7개의 대죄, 교만, 탐욕, 질투, 분노, 음욕, 식탐, 나태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한 명, 한 명 살해한 뒤 그들의 시신 근처에 죄목을 적어 둔다. 범인이 한 것은 그냥 살인이 아니었다. 식탐을 범한 인물에게 12시간가량 식고문을 하기도 하고, 나태를 범한 이에게 약물을 투여하여 1년가량 침대에서 움직일 수 없게 만드는 등 잔혹한 방식으로 살인을 범한다.
식탐, 교만, 나태, 탐욕, 음욕에 해당하는 인물을 처단한 후, 범인은 그를 쫓던 형사들에게 찾아와 제안한다. 나머지 두 구의 시신이 있는 곳을 알려줄 테니 자신과 그곳에 가든지, 심신 미약으로 풀려나는 자신을 보던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말이다.
두 구의 시신을 확인하고 싶었던 형사들은 제안을 받아들이고 범인이 말하는 곳으로 향하게 된다. 범인이 이끈 곳은 건물 하나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
그곳에 한 차량이 들어온다. 젊은 형사, 밀스가 범인을 지키는 동안 나이 든 형사, 소머셋은 차량 운전자를 포박하고 그에게 여기에 온 이유를 묻는다. 범인에게서 배달을 부탁받았다는 운전자의 말에 소포를 얻어낸 소머셋은 내용물을 확인하곤 곧장 밀스에게로 달려간다. 총을 내려놓으라는 이상한 외침에 당황해하는 밀스에게 범인은 끔찍한 정보를 전한다.
소포의 내용물이, 밀스 부인의 머리라는 것을.
자신이 밀스를 시기했음을 시인하며 얼른 자기를 죽이라는 범인의 말에 밀스는 혼동에 빠진다. 떨리는 화면이 그의 분노와 고민, 슬픔을 비추고, 곧이어 총이 울린다.
영화 <쎄븐>은 긴박한 움직임과 글로테스틱한 범죄 현장, 스릴 있는 액션씬으로 스릴러 특유의 긴장감을 부여하면서도 우리가 한 번쯤 고민해봐야 할 과제를 제시한다.
범인은 두 형사와 이동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한 행위의 정당성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평범한 방식으로는 귀 기울여주지 않기에, 극단적인 방식이 필요했다고. 혼자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살을 찌우고, 돈을 받고는 돼먹지 못한 이들을 변호해 그들을 풀어주고, 외면을 꾸미곤 아름답지 않은 이는 가치가 없다는 추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죄를 지은 거 아니냐고, 자신은 죄를 범한 이들을 처단한 것이라고, 범인은 말한다.
안다. 얼토당토 않는 얘기다. 자신이 무엇이기에 그들의 행위를 죄로 단정하고 처분한단 말인가. 무엇이 죄인지 모른다고 상대를 비난한다면, 자신은 무엇이 죄인지를 어떻게 알고 있다 자신한단 말인가. 그것이 설령 죄라할 지언정 그들을 벌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가 의문을 가진 것, 죄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 우리가 범죄로 규정하지 않은 행위의 비도덕성, 그것을 바꾸고 변혁시켜야 할 필요성 따위는 타당하다. 충분히 가질 법한 의문이고 고민해 나가야 할 과제이다. 어쩌면 그의 생각이 옳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죽인 사람들이 사실은 죄를 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언정 누군가를 처단하며, 피로 물들인 채 쟁취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갈퉁이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를 말한 것은, 우리가 평화라는 이름으로, 정의라는 이름으로, 온갖 좋은 것들을 목적으로 잔혹하고 이기적이며 불합리한 희생을 정당화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한 결과가 얼마나 비참하고 무가치한 것인지 봐 왔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가 칼을 들고, 누군가의 숨통을 끊은 그 순간, 그의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행위가 부적절했다 할지언정 그의 질문과 사정은 충분히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다. 작품 속, 두 형사의 이야기 신을 보면, 소머셋이 무관심한 사회에 대한 회의를 느낀다. 그가 오랜 형사 생활을 하며 느꼈던 그것. 그것이 결국 이 사건의 시발점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얼마나 타인에게 귀 기울이며 사는가. 우리는 얼마나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부여하는가. 피곤하다는 이유로, 내 삶이 바쁘다는 이유로, 무섭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외면을 당연시하며 살았는가. 관심과 나섬을 얼마나 무시하며 살았던가.
현대 사회로 들어서며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이 문제를 스릴러 영화라는 상업 영화가 언급한다는 것은 꽤 유의미하다. 흥미 위주로 시작된 것이 남기는 묵직함만큼 예상치 못한 무거움은, 타격은 드물기 때문이다.
너무 피곤했던 탓에 중간에 잠들긴 했지만 한숨 자고 일어난 뒤에는 입을 벌린 채 집중해서 봤던 것 같다.
애인은 카메라의 무빙에 집중해서 보라고, 엄청나지 않냐고 했는데 사실 어떤 게 대단하다는 것인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알아채지 못했다. 영화가 주는 의미와 구성이 좋다는 건 알겠는데, 카메라의 어떤 것을 보라는 것인지도 알지 못하겠었다.
영화를 본 후, 애인은 곧장 한 해설을 들려주었다. 주인공 소머셋의 변화와 그 변화를 극적으로 드러낸 카메라의 각도, 움직임에 대한 해석이었다. 놀라웠다. 그냥 스쳐가듯 봤던 것에 저런 의미가 있었구나, 이런 앵글이, 이런 흔들림이 그걸 표현한 거였구나.
생각해 보면 그렇다. 영화나 드라마는 각본과 배우, 그리고 카메라의 합이다. 각본을 받은 배우가 전체적인 것을 보여주지만 결국 우리가 따라가는 것은 카메라의 시선이다. 우리의 시야는 카메라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느끼자 이제껏 영화를 반만 보며 살았구나 싶었다.
동시에 웹소설을 보면서는 SNS나 댓글을 보며 소감을 나누곤 해놓고 영화와 드라마에서는 누군가의 해석을 보는 것이 나의 주관을 해친다는 생각에 멀리했던 게 얼마나 모순적인 행동이었는지 깨달았다.
우리가 ‘국어’라는 과목을 통해 작품을 감상하는 법을 전문가로부터 배우는 것처럼, 영화와 드라마, 연극도 많은 해석을 봐야 한다. 생각보다 자연스레 무언가를 체득하기란 어렵고,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감상’도 배워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해석을 듣고, 보고, 곱씹으며 해석하는 법을 배운다. 감동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을 찾게 된다. 어떤 저명한 철학자가 모든 사물에 친절하라고 했던가. 영화 또한 그러하다.
‘잘 보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 적극적으로 찾고 모색하고 발견해야 한다. 그것에 담긴 의미를, 그것을 표현한 방식을, 그것에 내포된 의도를.
영화 <쎄븐>은 그 자체로도 흥미롭고 뜻깊은 영화였으나 영화에 대한 관점을 새롭게 바꾸어줬다는 점에서 특히 더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
이 영화를 추천해 주고, 새로운 깨달음으로 이끌어준 애인에게 감사를 전하며, 소소한 감상을 끝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