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형을 선고합니다?

연극 <12인의 성난 사람들>을 보고

by 하난

문현동에 위치한 소규모 극장이었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야 하는 작은 규모의 공연장. 너무 일찍 도착해 그 앞에서 한 시간 가량을 기다렸다. 생각보다 작은 규모에 벗겨진 건물 내부, 휑한 복도가 큰 기대감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공연장에 1번으로 들어가 세 번째 줄 중앙에 자리잡았다. 무대는 늘어선 12개의 의자와 작은 테이블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검은색과 짙은 갈색으로 채워진 무대는 우중충했고, 관객들은 어수선했다.

웅성이는 소음 사이로 어둠이 내렸다. 조명이 어두워지고 오른쪽 측면의 문이 열리며 법복을 입은 사람이 등장했다. 그녀는 오늘 연극의 시작을 알리며 간단히 규칙을 소개했다. 배심원들의 판단을 다루는 공연이니만큼 법조문 형식으로 전해지는 공연 내 규칙은 꽤 신선했다.

그녀가 떠난 후 연극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다시금 어둠이 내려앉았고 여러 발소리가 울렸다. 조명이 밝아지며 잠시 제각각 늘어선 사람들의 모습을 보였다 다시 어두워진다. 이내 완전히 빛을 입은 무대. 12인의 배심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의 시놉시스는 단순하다. 한 소년이 있었고, 그의 아버지가 있었다. 소년은 아버지 살해의 피고인으로 기소되었고 배심원제에 의해 판결받게 되었다. 목격자, 무기의 소유자 등 대다수의 정황증거가 소년이 살인범임을 가리키는 상황. 11인의 배심원은 소년을 유죄로 판단했고, 1인의 배심원만이 조금 더 고려해 봐야 할 부분이 있다 주장했다. 정장을 차려입은 여성, 8번 배심원은 성급히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에게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며 한 사람의 인생이 달린 일이니만큼 더 신중히 결정을 내리자고 한다. 이때 배심원제의 규칙은 독특하다. 배심원제에서의 결정은 만장일치로 이루어져야 하며, 소년이 유죄로 판결받을 경우, 소년은 사형에 처해진다.

8번 배심원의 질문과 11인의 질문 및 주장으로 극은 채워져있다. 12인의 사람들의 각기 다른 주장과 근거, 논의 끝에 한 소년의 생사를 결정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결론부터 놓고 보자면, 연극은 훌륭했다. 별다른 액션 없이 오롯이 말과 표정만으로 진행되는 연극이다보니 시놉시스와 배우들의 연기력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조명이 다소 늦게 켜지거나 꺼지고, 조도 조절의 이슈로 눈이 시린 순간이 있었다는 점, 심각한 이야기에 웃음을 주고 환기를 시키기 위해 넣은 개그 포인트가 다소 난데없었던 점, 몇몇 어색한 연기부분이 아쉬움으로 남으나, 그게 다였다.

2시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오직 말이 오가는 것으로 진행되는 연극에서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집중이 깨지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이 극의 훌륭함은 입증되었다 본다. 배우들의 딕션과 표현력이 굉장히 뛰어났고, 그것은 뒤로 진행되며 점점 강화되었다. 특히 가부장적인 중년 남성을 연기한 3번 배심원, 주연으로서 가장 많은 발언을 한 8번 배심원, 상대의 말에 귀기울기고 가장 먼저 8번 배심원의 말에 귀 기울인 노인 배심원인 9번 배심원과 히스토릭하고 편견에 가득 찬 기득권을 연기한 10번 배심원이 기억에 남는다.

그중 3번 배심원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3번 배심원은 처음부터 강력하게 소년의 유죄를 주장했다. 소년이 아주 몹쓸 아이이며, 그런 애가 범행을 저지르는 것은 당연하다며 분노한다. 여러 반증들이 나오거나 의심의 여지가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그는 온종일 유죄를 주장한다. 그는 극의 중반쯤 그의 아들에 대해 언급하는데, 아들이 보다 적극적이고 호전적이길 바랐던 그는 싸움을 피하는 어린 아들을 크게 훈계-혹은 학대-했으며, 그 결과는 아들의 자신에 대한 폭력이었다 말한다. 분노에 차 요즘 애들이 그렇다고 하는 모습은 참 보기 껄끄럽다. 흔한 기성세대 남성을 표현하는 것 같았고, 흔히 ‘꼰대’라 불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 불편했다. 순간 그에 대한 감정이 식으며 그의 말이 모두 비합리적이고 제 성을 못 견딘 악에 불과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극의 마지막. 10인의 배심원이 8번 배심원에게 설득되어 자신만이 소년의 유죄를 주장하던 그는 악에 받쳐 그런 아이들이 어떻게 가슴에 칼을 꽂는지 아냐고 한다. 매일매일, 가슴에 칼을 박는다며 외치는 그의 턱이 떨린다. 울분에 찬 눈빛과 흘러내리는 땀, 떨리는 볼.


눈물이 흘렀다. 자신이 잘못된 것만 같았으리라. 소년을, 아들을 원망하는 듯했지만 사실은 가장 슬펐으리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었으리라. 나름 노력한 건데, 방식이 잘못되었을지라도 그게 자신의 사랑이었는데, 그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의 절망과 슬픔, 고통이 가늠되지 않았다.

많은 어른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더 가슴이 무거웠다. 사실은 다들 그저 열심히였을 뿐인데, 그 방향성의 상실로 그 모든 과정이 잘못되었던 것처럼 되는 게 얼마나 많았을까. 얼마나 많은 좌절을 견디며 살고 있을까.

이와 관련해 9번 배심원에 대해서도 논하고 싶다. 사건에는 두 명의 증인이 있었다. 소년의 집 아래층에 사는 노인과 맞은편 건물에 사는 여성. 노인은 소년과 소년 아버지의 다툼을 ‘들었’고, 여성은 맞은편에서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목격하고 보았을 때, 고성을 울리는 열차가 지나갔다. 8번 배심원은 의문을 던진다. 사람들의 말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노인이 얼마나 정확히 윗층의 소리를 들었을지.

8번 배심원이 노인의 증언에 대한 의심을 던지자, 사람들은 노인이 뭐하러 정확하지 않은 사실을 두고 정확하다며 거짓 증언 아닌 거짓 증언을 하냐며 묻자, 9번 배심원이 답한다.

“관심 받고 싶어서겠지.”

9번 배심원은 노인의 외로움을 전한다.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고, 아무도 자신을 봐 주지 않는 외로움을. 서서히 잊혀진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문득 네이버 웹툰 <화산귀환>의 청명이가 생각났다. 일흔이 넘는 나이에 가족을 모두 잃고 죽음을 맞이한 후 다시 회귀한 청명은 자신의 가문을 부흥시키고 비극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지난한 기간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디에도 마음 놓고 기대지 못한 채 더 이상 추억을 얘기할 곳도 없다. 묵묵히 책임을 견디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죽은 자신의 후배의 무덤에 술을 기울이며 홀로 검무를 추는 그의 모습을 보며, 처음으로 노인을 생각했던 것 같다.

더 이상 웃으며 그때 그랬지, 그거 웃겼지, 하는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외로움. 어디에서도 어리광부릴 수 없다는 고독과 괴로움. 가장 최후의 책임을 지고 있다는 부담감. 아무도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사무치는 외로움.

실제의 노인들은 그보다 더한 외로움에 시달릴 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대화할 곳조차 마땅하지 않으니까. 9번 배심원의 말처럼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니까.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말이 많아지고, 듣지 않는다. 일측에서는 자신의 가치관이 지나치게 비대해져서,라고도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그런 면을 일정 부분 인정하나 그보다는 이때가 아니면 아무도 들어주지 않으니까. 지금만이 나의 발언권이 인정되는 순간이니까.

우리는 그들의 상처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세대 갈등이 심해지는 지금, 더더욱 필요한 고민 지점이라 생각한다. 당장 오늘 연극을 끝나고 들른 인쇄소에서만 해도 어르신이 나와 친구에게 긴 이야기를 했다. 인쇄가 되길 기다리는 우리에게 자신의 자녀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자신의 친구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거부감이 들기 쉬운 그 순간, 그러나 그의 말에 귀 기울여보면 크게 이상하거나 이해 못할 것이 없다. 그저 조금 난데없을 뿐이다. 흔한 친구 험담, 자식 자랑이다. 바쁜 사회, 신뢰가 흩어지는 사회에서 조금만 그들의 말을 들어주자. 그들을 위해서, 그리고 이후에 그들이 될 우리를 위해서.

여기까지만 봐도 알 수 있듯, 논의가 진행되며 사람들은 점차 과열된다. 반말과 욕설이 오가고 몸싸움까지 인다. 바로 어제 토론대회에 나갔던지라 참 공감이 많이 되었다. 토론이라는 게 그렇다. 신기할 만큼 사람을 몰입하게 한다. 내 이야기가 아닌데, 당장 내게 어떤 이익이나 불익이 돌아오는 게 아닌데 논의의 주장과 한 몸이 되어 저돌적이리만큼 맞서 싸우게 된다. 여기서 이겨야만 할 것 같은 기묘한 충동에 휩싸이게 한다.

우리는 많은 순간 그렇게 상황에 지배당한다. 이와 관련하여 1달간 준비한 토론대회 내내 궁금했던 점을 논의하고 싶다. 우리에게 자유의지란 존재할까. 토론 대회의 주제 대부분이 출산율, 인구 감소와 관련해 국가의 개입이 정당한가,였다. 국가 개입하면 생각나는 자유에 대한 논의. 국가 차원에서 실질적 평등을 이룩하게 해 주어야 자유가 보장된다는 이야기. 그게 진짜 자유일까. 진짜 자유라는 게 대체 뭘까.

우리가 어떠한 것을 선택할 수 있기에 자유가 존재한다고들 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게 과연 ‘나의’ 선택일까. 사회적, 문화적 강요 속에 ‘선택된’ 것은 아닐까. 생각 또한 그러하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지정된 답을 교육받고 생각의 방향성이 정해진다. 어떤 것을 교육받았기에 다른 어떠한 것을 접하게 되고, 그로 인해 다른 것을 또 알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에 ‘진정한’ ‘독립된’ 나의 생각은 존재하는 것일까.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같은 독립적인 ‘나’의 생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까. 나의 사고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 의해 좌우되기만 하는 소극적인 존재에 불과할까. 또 그렇게 보는 것은 지나친 회의주의이다. 우리는 종종 창조, identity를 오해하고는 한다. 아무것도 없는 무언가에서 어떤 것을 창출해내는 것을 창조라 칭하고, 새하얀 백지같은 명확히 나누어진 무언가를 정체성이라 칭한다. 그런데, 그런 건 없다.

창조는 발견의 다른 이름이고, 그저 존재하는 것들을 새로운 시야에서 바라봐 재조립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자아란 각종 사고와 상황의 집합이자 그 안에서 이루어진 주체의 재조립이다. 다양한 색이 칠해지지만, 그중 어떤 것을 얼마나 활용할지는 개인의 역량이자 기호이다. 그게 우리의 자유이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만의 사유는 존재한다 말할 수 있다.

그것이 한 달간 고민한 나의 자아 및 자유에 대한 대답이다. 자유에 대한 논의는 지난하고 복잡해서 이게 정답이라 단언할 수 없다. 언제든 바뀔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한다.

더불어 이러한 자유와 관련된 ‘책임’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극중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해 볼 것을 주장하는 8번 배심원에게 6번 배심원이 묻는다.

“당신 생각대로 다 설득됐는데 걔가 진짜 아버지를 찔러 죽인 놈이라면요?”

우리 모두에게는 ‘말할’ 자유가 있고, 자신의 생각을 관철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늘 자유는 책임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바로 이 책임이 우리로 하여금 자유의지에 의해 자유를 포기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상대를 설득한다는 것은 막중한 책임을 부여한다. 선택이 상대에게 귀속되어 있을지라도 먼저 그들을 설득하는 것은, 그들의 책임을 자신이 나누어질 것이라는 말과도 닮아있다. 때문에 버겁고 무섭다.

9번 배심원 또한 그가 설득된 가장 큰 이유가 혼자서 다수를 설득한다는 부담감과 외로움을 알기 때문이라고 했다. 연극 전 배부받은 팜플렛의 연출 의도 또한 말의 책임을 역설한다. 언제고 발화자의 역할을 중시했던 나였기에 그 주장이 꽤나 마음을 울렸다.

그런데 또 한켠으로는 그게 너무 말을 무겁게 만들지 않을지 염려되기도 했다. 말이 가벼운 세대인 요즘, 역설적이게도 말은 무겁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침묵한다. 그런데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목소리를 내야 소통이 이루어지고, 교정이 가능하다. 침묵만큼 무책임한 자유는 없다. 적어도 민주정을 사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자신으로 서기 위해서 우리는 목소리를 내야한다.

교양수업에서 들었던 이야기 중 충격적인 이야기가 있었다. 우리가 수업에서 소리 내 답하지 않는 것, 어떠한 협의 과정에서 입을 다물고 있는 것. 그것이 소통에 대한 거부이고 그 무엇보다 ‘반사회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오히려 맞서 싸우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는 게 사회적 행위라는 교수님의 말씀에 참 많이 부끄럽고 충격받았던 것 같다.

우리는 책임 있게 말하겠다는 이유로 도리어 책임을 회피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실 <12인의 성난 사람들>을 보며 느낀 것, 생각한 것은 이보다 더 많다. 민주주의와 만장일치에 대해, 자신의 주장이 번복되는 것에 대해, 편견의 필요성과 문제점에 대해 각종 이야기를 더 풀어나가고 싶으나 글쓴이의 체력상 한계로 여기서 감상을 마무리할까 싶다.

울고 웃으며 몰입해 볼 수 있었던 작품 <12인의 성난 사람들>을 볼 기회를 준 음향팀 친구에게 감사를 전한다.

keyword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