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를 보고
이건 귀를 막은 세상에서 말하고자 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아서는 흔한 사람이었다. 그는 억울했고, 우울했으며, 아팠으나 노력했다. 그는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다. 웃음을 전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코미디언을 바랐으나 재능의 한계였을까, 시대를 잘못 탄 것이었을까, 그리 많은 웃음을 전하지는 못했다. 광대로 일하는 그는 기분과 관계없이 웃음이 터지는 병이 있었다. 아서는 자주 무시당했으며 종종 폭행당했다. 무시와 조롱이 기본이 된 어느 날, 그는 끝내 살인을 저지르고야 만다.
이건 우리에게 두려운 대상, 광기의 인물, 혹은 매력적인 악인인 조커의 이야기이다.
<조커>를 보며 통쾌함 혹은 쾌감을 느낀 사람들도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보다는 그저 슬펐다. 그의 삶이 슬펐고, 그의 세상이 슬펐고, 그와 같은 사람들이 슬펐다.
“정신질환의 가장 나쁜 점은 사람들 앞에서 아닌 척해야 하는 것이다.”
심각한 정신질환을 가진 아서는 이를 이유로 조롱당하고 폭행당한다. 어린아이를 웃겨주려 했으나 아이의 보호자에게 오히려 아이를 괴롭히지 말라는 소리를 듣고도 웃고, 겨우 자리를 얻은 쇼 자리에서도 끝없이 웃음을 터뜨린다.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그의 모습은 가장 존경했던 프로에서 조롱거리로 소모되고, 그의 첫 살인조차 그의 웃음이 원인이었다.
<조커>를 보면 아서의 웃음을 기묘하게 혹은 불쾌하게 느끼고 그를 피하거나 공격하는 사람들을 목격하곤 한다. 사실, 그들은 당연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행위가 보편적이지 않은 사람은 무섭다. 다소 상이한 방식의 걸음걸이를 가진 사람, 허공에 혼잣말을 하거나 아서처럼 갑자기 박장대소하는 사람을 보면 경계심이 생기고 돌아가게 되고 한다. 이는 생존을 위한 당연한 본능이고 이것이 없다면 사람은 존재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때문에 아서를 피했던 사람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슬펐다. 아서에게는 웃음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고, 사람들에게는 경계심과 불쾌감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누구도 잘못하지 않은 상황에서 누군가는 상처를 받아야 한다. 그게 못내 슬펐다.
정신질환이 질환이며 이를 말할 수 있는 세상이 와야 한다고 말하고 다니면서도 차마 정신질환자가 모두 안전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사실이, 못내 무겁다.
이야기 내내 아서는 참 많이도 웃었다. 갑작스레 터지는 웃음, 광대로서 대중들을 웃기기 위한 웃음 등. 대부분의 시간, 그는 웃었다. 그런데 우스운 점은, 단 한 번도 그는 웃지 못했다는 것이다. 꼭 우울증 환자처럼.
우울증 환자들은 생각보다 자주 웃는다. 아닌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그러하다. 그들에게 웃음은 방어기제이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친근하고 습관적으로 미소 짓는다. 대개 다정한 사람들이 쉽게 마음을 다친다. 노력하는 사람이 자주 아프다.
통계적인 것, 연구 따위를 떠나, 내 주위의 사람들은 그러했다. 잘하고 싶어서 애썼던 사람, 이해하려 노력한 사람, 사랑하려 한 사람, 살고 싶었던 사람들이 고통에 허덕였다. 그것이 고통인지도 몰라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괴로워했다. 그게, 참 서글펐다.
아서가 조커가 된 전환점에는 그의 모친이 있었다. 아서는 모친을 사랑했다. 그녀를 아꼈으며 그녀를 보살폈다. 아서의 모친은 아서를 ‘happy’라 불렀다. 아서가 행복하길 바라서였을 수도 있고, 그가 행복하길 바랐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떤 이유로든 그녀는 그를 ‘해피’라 불렀다. 아서의 모친, 페니는 웨인이라는 남자를 그리워했다. 늘 그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의 답신을 기다렸다.
그날, 아서는 처음으로 그녀의 편지를 열어보았다. 편지에는 아서가 웨인의 아들이라는 것, 웨인은 페니에게 이를 함구할 것을 종용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아서는 웨인을 찾았다. 어느 정도의 기대감을 안고, 어쩌면 어떤 희망을 안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말은 잔인했다.
‘페니는 미친 여자이며, 아서는 페니의 친자도 아니다. 페니가 아서를 입양했을 뿐이다.’
일생을 바친 어머니가 친모가 아니라는 말에 격분한 아서는 입양 서류를 찾으러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웨인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심지어 페니는 남편이 아서를 학대하는 것을 방관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아서의 정신질환이 선천적이었다는 페니의 말과 달리, 아서는 학대에 의해 뇌에 손상을 입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아서는 페니를 살해한다.
아서가 어떻게 코미디언을 꿈꿨는지 모른다. 그가 왜 하필 그렇게 웃는 모습으로 살았는지도 정확히는 모른다. 그러나 그곳에 페니의 영향이 있었으리라 장담한다. 늘 아서를 행복한 아이라 칭했던 페니. 모친의 말에 따라 아서는 스스로에게 행복하길 강요했던 것은 아닐까. 그게 너무 어려워서 다른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 싶었던 것 아닐까. 자신이 웃고 싶어서, 남에게 웃음을 주길 택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아서에게 페니는 “네가 행복한 아이였기 때문에” 학대를 방관했다 말한다. 아서의 일생을 지배했던 ‘happy’가 최초의 불행이었던 것이다. 내 삶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었으리라. 내 생을 지배했던 말의 오염은, 삶 자체에 대한 오염이 되었으리라. 그곳에서 오는 절망과 고통을, 감히 예측할 수 없어 슬펐다.
<조커>에서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참 많은데, 마지막에 경찰에 의해 수송되던 조커를 사람들이 구출해 내 열광하는 장면이 유난히 눈에 밟힌다. 웃음 짓는 조커의 눈은 구슬펐다. 늘 그러했듯, 아니, 그 어느 때보다 절망적이었던 것 같다.
아서는 늘 말하고자 했다. 강도를 당해 일할 때 쓰는 소품을 잃었을 때도 경위를 설명하고자 했고, 그의 말은 묵살당한 채 도둑으로 몰렸다. 첫 살인 때, 자신의 웃음이 원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설명하려 했으나 무시당하고 폭행당했다. 상담사에게 자신의 일상을 말하고자 했을 때에 조차도 상대는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무도 그를 봐주지 않았다.
아서의 상담사를 보면, 모두 흑인 여성이다. 아직 흑인에 대한 차별이 있었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니만큼 이도 시사하는 바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사회의 이방인인, 그러나 사회적 용인을 받은 흑인 여성 상담사마저도 아서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는다. 같은 소외된 사람마저도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단 것이다.
철저히 외면당하던 그가, 살인마가 되고서야 시선을 받게 된 것이다. 기어이 극단적인 일을 저지르고서야 마침내, 그토록 원하던 시선을 받게 된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들어주는가. 우리는 얼마나 말하고 있는가. 사람들은 자신에게 피해가 생기지 않으면 들어주지 않는다. 그렇게 관심이 많으면서 막상 털어놓고자 할 때면 외면하곤 한다. 모두가 목말라 있다. 모두가 자신의 말을 들어줬으면, 나를 봐줬으면 하는 바람에 상대를 보지는 못한다.
대학에 와 사귄 한 친구가 떠오른다. 여러모로 많이 공부하고 생각도 깊은 아이다. 가끔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냥 묻히기엔 아까운 생각들이 많다. 그러나 막상 상황이 주어지면 그런 말을 하지 못한다.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애가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는 이가 없어서, 말하는 법을 잊은 것이다. 어차피 들어주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입을 닫고 속을 썩여가고 있는 것이다. 안타까웠다.
그 아이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그러고 있는 것 같아서. 당장 나조차도 그런 경우를 많이 겪어봐서. 그게 얼마나 아픈 일인지 알고 있어서 속상하고 안타까웠다.
더 많은 대화의 장이 생겨야 한다. 기다리는 법을 알고, 상대의 말에서 요지를 끌어내고, 공감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상대를, 우리를, ‘나’를 위해서. 우리가 서로 털어놓고 수용하며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더 많이 말하고 더 적극적으로 들어야 한다.
누구도 들려주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지 않아도 되도록.
먼저 우리가 들어주길 간절히 바란다.
살인을 하고, 세상을 불바다로 만든 아서는 춤을 추며 웃는다. 구슬픈 눈빛으로 스텝을 밟고 몸을 흔든다.
가장 큰 절망은 환희를 닮아있다.
작중 아서는 ‘센트’를 활용한 농담을 한다. 생과 사에 대한 이야기 중 활용되는 단어이다. 그리고 아서의 어머니는 페니. 모두 동전을 의미한다. 이어지는 이야기인 <다크나이트>에서도 동전은 핵심적인 오브젝트로 활용된다. 선과 악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동전은 각기 다른 면을 가지고 있으나 결국 하나이다. 삶과 죽음처럼, 절망과 환희처럼. 우리는 극단적으로 기쁠 때 울며, 극히 슬플 때 웃곤 한다. 몸이 극에 치우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반대쪽 극을 불러오기 때문이라 한다.
이 모든 게 다 이어짐을 뜻하는 것 아닐까. 한 끗 차이로 선이 악이 되는 상황을, 절망이 기쁨이 되는 상황을.
<조커>는 이렇듯 삶에 대해, 사회에 대해 이야기한다. 불행이 일상이 된 사회를 고발하고 판단을 유보시킨다. 잔잔하지만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연출과 진행. 다양하고 깊은 메시지는 한참 동안 후유증을 남긴다.
어느 날 문득 우울에 대해 고민해보고 싶을 때, 압도되는 감정에 사고가 막히고 싶을 때, <조커>를 재생해 보길 추천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