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 후기
※ 해당 글은 저자의 기억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구체적인 대사는 영화와 상이할 수 있음을 알립니다.
여느 날과 다름없는 날이었다. 넓은 초원 위로 펼쳐진 하늘이 옅게 빛나고 보일 듯 말 듯 바람에 풀잎이 살랑거리는 날. 목가적인 풍경 사이로 한 남자가 장작을 팬다. 땀에 젖은 머리와 해진 상의. 일에 집중하던 남자가 문득 고개를 든다.
고요한 초원에 다그닥 말 걸음소리가 울리고 무장한 군인과 능글맞은 표정의 한 사람이 다가온다. 당황하는 딸을 진정시킨 남자, 라파디트가 군중 사이로 향한다. 능글맞은 얼굴의 남성, 란다가 군인들을 정렬시킨 후 라파디트에게 묻는다.
“이 농장이 라파디트의 것이라더군요.”
“제가 라파디트입니다.”
“오! 반갑습니다.”
만개한 웃음을 지으며 란다가 묻는다.
“이 근방에 세 가구의 유대인이 살았다죠?”
“네”
“두 가구는 잡혔고, 드레퓌드 가문은 도망쳤다는데 드레퓌드를 아시나요?”
“뭐.. 잘은 모릅니다.”
“뭐라도 좋습니다. 들어가서 제게 말씀해 주시죠.”
라파디트의 집 안으로 자리를 옮긴 라파디트와 란다. 우유 한 잔을 청한 란다는 라파디트에게 묻는다.
“영어를 할 줄 아시나요? 제가 프랑스어에 그리 능통하지는 못해서요.”
“네”
“제 별명은 들어 보셨을 겁니다.”
“…”
“그들이 뭐라고 저를 부르던가요?”
“….”
“오, 말해보세요.”
“유대인 학살자.”
란다가 호쾌한 웃음을 터뜨린다.
“학살자, 좋죠. 다들 이걸 싫어하곤 하던데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노력해서 따낸 이름인데 안 좋을 이유가 없죠.”
“…”
한참을 혼자 떠들던 란다가 굳어있는 라파디트에게 묻는다.
“쥐를 보면 어떤 기분이 들죠?”
“…”
“소름 끼치죠. 싫을 겁니다. 만약 쥐가 당신의 집 안을 돌아다닌다면 어쩌겠습니까?”
“쫓아내겠죠.”
“그럼 다람쥐는 어떻습니까? 다람쥐가 당신 집 앞에 온다면 그렇게까지 싫어할까요?”
“… 아뇨.”
“왜 그렇죠? 쥐나 다람쥐나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
“자, 그럼 이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당신이 쥐를 수용해 줄 수 있을까요?”
“…”
웃음 짓던 란다가 라파디트에게로 얼굴을 들이민다.
“아니죠. 그냥 싫은 겁니다. 본능적으로요.”
다시금 웃음을 머금은 란다가 농담하듯 말한다.
“유대인 학살자. 제가 어떻게 그렇게 잘 잡는지 압니까?”
“…”
“사람들은 유대인을 찾을 때, 자신의 입장에서 찾곤 하죠. 벽장, 침대 아래 등등. 자신이 숨을 법한 곳을 찾습니다. 그런데 저는 유대인의 입장에서 찾죠.”
“…”
“저는 압니다. 사람이 인간이길 포기하면 얼마나 비굴해지는지”
란다가 웃음을 거두곤 라파디트의 눈을 응시한다.
“어딨습니까? 이 마루 아래?”
눈이 붉게 충혈된 라파디트가 기어코 눈물을 떨군다. 어렵게 끄덕이는 그를 보며 란다는 그들이 있는 곳을 가리키라고 명한다. 라파디트의 떨리는 손이 창가 근처의 바닥을 향한다.
“이렇게 말하는 데도 반응이 없는 걸 보니, 영어를 못 하나 봅니다?”
“…. 네”
“좋아요. 지금부터 프랑스어로 인사하겠습니다.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겠죠?”
“…네”
란다가 순식간에 낯빛을 바꾸며 과장스런 몸짓으로 인사한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라파디트 씨. 그럼 저는 이만 떠나보죠. 아가씨들, 이제 들어오세요.”
무장한 군인들이 집안을 메우고 바닥에 총구를 겨눈다. 지휘하는 듯한 란다의 손짓에 굉음이 터지고 바닥이 갈라진다. 이윽고 바닥을 적시는 붉은 액체.
그렇게 이야기, <바스터즈>는 시작된다.
짐작한 바와 같이 <바스터즈>는 나치즘과 그에 대항하는 세력들의 이야기이다. 란다를 필두로 한 독일군과 그들에 대항하는 미군과 영국군, 그리고 유대인 세력들. 부제인 ‘거친 녀석들’은 이들을 의미한다.
<바스터즈>는 영화보다는 연극에 가깝다. 일정 에피소드 후에는 검은 화면 위로 새로운 제목이 떠오른다. 꼭 연극 중 막이 내려오는 것처럼 잠시간의 조정 후에 다음 장면으로 이어진다. 카메라의 움직임과 연출도 뮤지컬과 흡사하다. 세 사람이 이야기할 때면 셋 모두를 비추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을 따라 카메라가 빠르게 움직인다. 카메라 전환이 아닌, 말 그대로의 회전. 따라서 카메라의 움직임이 빨라질수록 정신없고 극적인 감각이 든다. 이는 연극에서 대사를 던지는 배우들에게 조명을 비추는 듯한 효과를 자아낸다. 장면과는 다소 결이 다른 듯한 음악 연주와 툭 끊어지는 음, 갑작스러운 중앙 삽입 장면, 배우들의 과장된 놀란 표정 또한 극에 가깝다.
B급 감성의 장면들은 자칫 유치하고 흔히 ‘깨는’ 장면일 수도 있지만, 도리어 그런 장면들과 효과 덕에 이야기를 계속 지켜볼 수 있다. 소재가 소재이니만큼 <바스터즈>는 잔인하다. 유대인을 생명 이하로 보는 나치군들과 그런 나치군에 대한 분노를 잔인함으로 드러내는 반대 진영. 살인은 그들에게 한낱 유희에 불과하다. 이어지는 총성과 살이 터지고 갈라지는 효과음, 터지는 피와 흩어진 시신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몸서리쳐지게 하는 장면들은 끔찍하게 사실적이다. 때문에 익살스런 효과들이 없었다면 웬만한 사람들은 영화를 끝을 포기했으리라.
그럼, 애초에 덜 잔인하게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늘 말해왔듯, 나치즘이라는 비극적 역사를 다룬 영화는 편안하면 안 된다. 전쟁과 고통을 담는 이야기가 쉬우면 안 된다. 자극적이어야 하고, 잔인해야 하며, 자칫 더 나아가면 구토가 날 법한 이야기여야 한다. 고통의 역사는 쉬이 미화되고 간소화된다.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그 역사들의 잔인함을 마주해야 한다.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그런 맥락에서 <바스터즈> 속 히틀러의 모습은 꽤 충격적이었다. 전체주의를 이야기할 때면 늘 나오는 이야기가 ‘카리스마’이며 드문드문 마주하는 히틀러의 생전 모습은 무서우리만치 멀끔하다. 때문에 때때로 걱정이 되었다. 히틀러를 카리스마 있는 독재자로서 존경하는 이들이 생겨날까 봐. 그의 일생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생겨날까 봐.
때문에 모순적일 수 있지만, 찌질하고 추잡하게 드러난 <바스터즈> 속 히틀러가 마음에 들었다. 생각보다 더 ‘정상적’으로 보이는 이들이 악인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나, 악인을 미화하는 것은 더 위험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바스터즈> 속 조연인 한 독일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는 전쟁 영웅으로, 많은 유대인을 사살한 것으로 칭송받는다. 그는 쇼사나라는 프랑스인을 연모했는데, 사실 쇼사나는 첫 부분에서 등장한 드레퓌드 가문의 딸로 유대인이다. 살아남은 그녀는 프랑스인으로 위장하여 생을 영위하고 있었다. 전쟁 영웅은 쇼사나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그녀에게 구애한다.
그러다 한 번은 쇼사나의 극장-쇼사나는 극장을 운영중이었다-에 좋은 기회를 주겠다는 명목으로 그녀를 납치한다. 일언반구 없이 군인을 보내 그녀를 나치군이 모인 곳으로 끌고 온 것을 초대라고 말하긴 했지만 말이다.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전쟁 영웅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 그것을 방영할 예정이며 이에는 히틀러가 참석하기에 좋은 극장을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래는 다른 예정된 극장이 있었는데 전쟁 영웅의 간청으로 높으신 분들이 쇼사나의 극장을 염두에 두게 되었으며, 히틀러가 오니만큼 극장 주인을 한번 만나보고자 한 것이다.
가벼운 에피소드에서도 알 수 있듯 전쟁 영웅은 자신의 업적에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오만하다. 타인을 고려하지 않고 제멋대로 굴면서 도리어 자신이 열과 성을 다함에도 왜 고집을 부리냐며 화를 내기도 한다. 그런데 우스운 점은, 그런 전쟁 영웅이 자신의 영화를 보면서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는 듯이. 자신의 행위가 온전히 정당화될 수도, 영웅화될 일도 아님을 안다는 듯이.
그게 못내 화나고 안타까웠다. 전쟁영웅의 모습이 꼭 우리들의 모습 같아서.
당장 근래에 인기 있는 작품들만 보더라도 지나치게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다. 여전히 강한 사람, 그중에서도 무력 혹은 지력으로 말살을 행하는 이들에 대한 동경이 남아 있다.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죄인이라는 이유로, 나름의 합당해 보이는 이유들을 만들어 내 누군가를 죽이고 통쾌해하곤 한다.
죽음의 깊이를 알면서도 그를 초래하는 것을 동경하는 것이다.
이 역설적인 현상들이 형언할 수 없으리만큼 기묘하고 무겁다.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지만, 꼭 그 전쟁 영웅과 우리가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는 얼마나 모순적인가. 윤리라는 가면 아래 얼마나 많은 비윤리를 행하며 사는가.
유난히 무거운 하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