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셉션>을 보고
종종 꿈과 현실이 부분 되지 않을 때가 있다.
대학에 와 가장 존경하는 교수님으로부터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지 들었다. 그리 친하지는 않은 친구로부터의 연락이 발단이었다. 그녀는 이른 새벽 교수님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렸다. 짧은 문자는 제대로 떠오르지도 않으나, 그 충격만은 생생했다.
이른 아침 교수님을 찾았다. 이러저러한 얘기를 들었는데 그것이 맞는지를 물었다. 경멸 어린 그의 눈빛은 인간 이하의 것을 보는 듯했다. 그는 내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하나하나 짚으며 그런 사고를 하는 인간은 평생 그렇게 살뿐이라고 했다. 많은 배움을 주신, 존경하는 분의 눈빛과 말은, 존재를 허물어뜨리는 듯한 충격이었다.
고통에 허우적거리던 때, 꿈에서 깼다. 식은땀으로 눅진하게 들러붙은 옷을 신경 쓸 틈도 없었다. 머리맡을 뒤적거렸다. 겨우 끝을 잡은 폰을 들어, 카카오톡에 들어간다. 연락을 준 친구의 이름을 찾는다. 클릭. 그리고 목도했다.
꿈과 같은 내용의 문자를.
교수님에 대한 분노와 친구에 대한 원망, 스스로에 대한 실망으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나름 노력한다고 했는데, 그래도 제법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허상뿐이었던 걸까.
그 순간. 다시 눈이 떠졌다.
물기 어린 시야. 저미는 듯한 가슴을 부여잡고 다시 머리맡을 뒤진다. 손에 잡힌 폰을 열고 다시금 그녀의 이름을 찾는다.
아무것도 없었다. 새로운 연락 따위, 교수님의 이야기에 대한 것 따위, 아무것도 없었다.
주변을 둘러봤다. 고요한 방안, 간간이 들리는 어항 속 물소리와 어둠에 잠긴 식물들, 소파 위에서 깊은 잠에 빠진 강아지.
진짜, 현실이었다.
한참을 고민했다. 어디까지가 꿈이었을까, 어디서부터가 현실일까.
반대로 현실이 꿈 같이 느껴질 때도 있다. 경제학원론 강의를 위해 오르막길을 오르던 때, 경제통상관을 눈앞에 두고 문득 이게 진짜인가, 의문이 들었다. 사실은 이게 꿈이고 나는 자고 있는 게 아닐까. 일어났을 때는 이미 시간이 지나 수업을 듣지 못하는 게 아닐까. 감각이 이상한데, 이게 정말 현실일까.
꿈과 현실의 경계는 교묘하다. 대개 명료하게 구분 가능하나, 가끔은 꿈속 이야기가 현실이 되고, 현실이 꿈이 되기도 한다. 너무도 생생한 꿈에 침대에서 한참을 누워있던 경험을, 한 번쯤은 했으리라.
영화 <인셉션>은 이러한 꿈과 현실의 경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는 꿈속에 들어가 다른 사람의 꿈을 훔친다는 특이한 발상으로 시작된다. 늘 꿈-생각-을 훔치기만 했던 전문 꿈 추출자인 주인공은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겠다는 한 사업가의 제안에 평소 하던 훔치기가 아닌, 인셉션, 즉 꿈속에서 새로운 생각을 심는 것을 시도하게 된다. 꿈이라는 무의식, 그 꿈속의 꿈, 그 속의 꿈은 무의식과 닿아 있을 것이라는 사고. 무의식의 변경, 가장 깊은 생각과 믿음의 변경은 곧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행위들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사고는 참신하다.
<인셉션>은 제법 예전 영화임에도 영화를 보는 내내 예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전자기기 등장의 부재, CG의 최소화 등이 시청자로 하여금 ‘생동감’과 ‘새로움’을 불러일으키는 듯했다. 참신한 소재와 뛰어난 연기력, CG가 없는 만큼 생생한 연출은 제법 어려운 내용에도 불구하고 집중을 놓지 않게 만든다.
내용적 측면으로도 이야기할 거리가 많지만 그중 ‘인셉션’이라는 행위 자체에 대해 말해보고 싶다. 인셉션은 말 그대로 생각 심기이다. 다른 사람의 믿음과 근간을 흔드는 행위. 주인공 코브는 이러한 믿음의 변형으로 아내를 잃었다. 아내를 위한 행위가,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우리는 종종, 아니 거의 항상 누군가의 믿음과 생각에 도전한다. 그것은 자신 내부에서 일어나는 여과의 과정일 수도, 상대에 대한 도전과 자아 확립의 과정일 수도 있다. 그중 후자는 상당한 파급력을 지닌다. 누군가의 사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 자신의 가치관을 설득하는 것. 그 논의의 과정은 발전을 낳고, 다양성을 촉진한다. 사고에 대한 도전은 대화 참여자 모두의 사고회로를 회전시키고 사고를 확장시키는 데 이바지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누군가의 존재를 훼손할 수 있다. 비교적 준비되지 않은 이, 아직 미숙한 쪽은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존재의 강력함에 자신이 파훼되는 고통을 겪을 수 있다. 이것이 새로운 자아의 정립과 향상된 사고로 이어진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때때로 사람들은 그대로 부서져 버리기도 한다.
새로운 생각, 전혀 다른 관점은 그래서 위험하다. 준비되지 않은 이에 대한 강압적인 믿음 투입은 받는 사람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폭력에 불과하다. 설령 그것이 선의에서 비롯된 것일지라도.
약 반년 동안, 싸움의 필요성을 느꼈다. 논쟁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논쟁 없는 삶이 얼마나 무료하며, 굳어진 생각이 어떻게 썩어가는지도 봤다. 때문에 우리가 보다 적극적으로 반박당하고, 얘기하고, 논의하며 고통스러워하고 또 고통을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않다.
논쟁은 싸움의 과정이며, 자성의 과정이다. 자성은 성찰의 다른 말로, 성찰은 스스로에게 가하는 자의적 고통의 과정이다. 논쟁이든, 자성이든 지나치게 아프다. 지치고 괴롭다. 그러나 그것을 거치고서야 나아지는 것이 있다. 그것을 하고서야 이후의 고통을 덜어낼 수 있다. 그 과정을 거치고서야 ‘나’는 ‘우리’가 되곤 한다.
하지만 늘 그렇듯 논쟁과 성찰에도 중용이 필요하다. 과도한 성찰이 자해에 가깝듯, 함께 성장하고자 하는 논쟁과 설득의 과정은 종종 상대에 대한 비폭력적 폭력이 될 수 있음을, 늘 상기해야 한다.
우리 모두를 위한 노력이, 모두에게 상처로만 남지는 않도록.
그리하여 우리가 정말 ‘함께’ 나아갈 수 있도록.
영화 <인셉션>은 뛰어난 연출과 연기력, 신박한 소재와 내용으로 깊은 메시지를 던진다. 비교적 난해한 내용이지만 생각할 거리와 재미는 어느 정도 머리를 쓸 때 제대로 얻을 수 있곤 하다는 점에서 용인할 법하다.
어느 날, 문득 온 정신을 다 모아 집중해서 볼 만한 대작이 궁금할 때, <인셉션>을 선택해 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