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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없는 고민

교양의 이모저모

by 하난

무엇이 옳은가, 옳음이란 존재하는가에 대한 논의는 유구한 역사를 거쳐 오래도록 논의되어 왔다. 수렵채집 사회를 거쳐, 농경사회를 지나 국가가 형성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인간 속에서 생을 영위해왔다. 인간은 어떤 생물인가에 대해 어린아이들조차도 쉬이 '사회적 존재'를 이야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동체를 만들고 안전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규칙은 필수불가결하다.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 옳은가'를 논한다.

옳음, 윤리의 존재와 형태에 대한 관점은 무수하다. 보편타당한 윤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윤리 상대주의부터 윤리의 보편성을 이야기하되, 동기에서 옳음의 근거를 찾느냐, 결과에서 찾느냐에 따라 나뉘는 칸트의 의무론과 공리주의까지. 오랜 시간의 담론이니만큼 막대한 양의 주장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믿고, 무엇을 추구해야하는지 헤매인다.

선에 대한 미아인 한 인간으로서 지금 미흡하게나마 옳음에 대해 논해보려 한다. 이때 논의는 기존의 이론들을 정리한 후 주장을 펼치는 식으로 진행해보겠다.

보편적 윤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선악은 상대적일 뿐이라는 윤리적 상대주의는 다시 그 범위에 따라 주관적 윤리 상대주의와 관례적(사회적) 윤리 상대주의로 나뉜다. 주관적 상대주의는 개개인의 수용정도에 따라 윤리가 정당화됨을 주장하는 반면, 관례적 상대주의는 문화권에 따라 윤리가 달라짐을 주장한다.

고대 소피스트의 궤변이라 불리는 윤리적 상대주의는 여전히 많은 비판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비판을 받았다는 것은 다시 말해 많은 이들이 믿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당장 사람들이 자주 보는 네이버 웹툰에만 해도 '선악이란 호오에 불과하다'라는 대사가 나오며, 많은 이들이 이에 고개를 끄덕이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도덕적 논의에 대한 주장은 대부분의 경우 극단적으로 혹은 미세하게 나뉘고 다르다. 논의가 싸움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또는 상대의 주장과 본인의 주장이 모두 납득이 될 때, 우리는 곧잘 "옳고 그른 게 정해진 건 아니니까" 라는 말을 내뱉곤 한다.

애초에 무엇이 옳은가의 기준이 나뉘고 미정의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는 게 윤리적 상대주의를 긍정하는 근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반면, 모든 곳, 어느 세대에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타당한 윤리가 존재한다는 보편적 윤리주의는 다시 크게 공리주의와 의무론, 덕 윤리와 배려윤리로 나눌 수 있다.

공리주의란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을 이야기하는 이론으로, 쾌락이 선이며 고통이 악이라는 쾌락주의에 그 기원을 둔다. 공리주의는 쾌락과 고통의 양을 측정할 수 있다는 가정하에 쾌락을 증진하고 고통을 감소시키는 정의를 이야기한다.

공리주의는 다시 행위공리주의와 규칙공리주의로 나뉜다. 행위공리주의는 각각의 행위에 대해 쾌락과 고통의 양을 구하여 비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행위공리주의자는 대표적으로 벤담과 밀이 있는데, 벤담은 쾌락과 고통에 양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질의 차이는 없다는 양적 공리주의를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최대한 많은 쾌락을 낳되 최소한의 고통으로 이루어진 행위를 택하면 된다.

반면, 밀은 고통과 쾌락의 양적 차이 뿐 아니라 질적 차이를 주장한다. 그것들에는 질적인 차이도 존재하며, 질적인 우위가 더 중요하기에 양이 적고 질이 좋은 것과 양이 많되 질이 낮은 것이 있다면 전자를 택하라는 것이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유명한 문구의 기원이다.

공리주의의 또 다른 종류로 규칙공리주의가 있다. 실질적으로 행위 하나하나의 쾌락과 고통을 비교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일 분 사이에도 무수한 행위를 하기에 일일이 그것들을 비교하고 택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때문에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들의 쾌락을 이익형량하자는 것이 규칙공리자의 요지이다.

보편적 윤리주의의 또 다른 축으로 의무론이 있다. 칸트로 대표되는 의무론은 이성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여, '그것이 의무이기에 하는 마음'인 선의지의 발현이라면 그것으로 옳다고 주장한다. 즉, 동기가 옳다면 행위가 옳다는 것이다. 결과와 무관한 이러한 주장은 동기론으로도 생각될 수 있다.

그런데 어떠한 의무를 만들고, 그것을 모두 실현하는 과정에서는 불가피한 충돌이 발생한다. 두 의무가 충돌하는 경우가 왕왕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등장한 것이 로스의 조건부 의무 이론이다. 두 의무가 충돌했을 때는 직관과 상식에 의해 하나를 포기하고 다른 하나를 실질적 의무로 여길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렇듯 공리주의와 의무론은 행위자의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행위가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키는지, 혹은 행위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에 시선을 둔다. 반면, 행위보다는 '행위자'에게 초점을 맞추는 윤리학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덕 윤리'이다.

덕 윤리는 인격 수양에 보다 중점을 두며,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될 수 있다.그는 이론적 덕과 실천적 덕을 이야기하며 사고 및 추론 영역을 키운 후 그 추론을 바탕으로 중용을 지속적으로 실천할 때 비로소 덕 있는 사람이 된다고 주장한다. 때문에 우리는 교육을 통해 지적 수준을 향상시키고 지적 판단을 통한 적절한 행위의 반복으로 그것을 습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등장한 윤리로서 배려윤리가 있다. 타인과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타인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중시하며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윤리를 파악하려는 것이다.

각각의 윤리는 우리 생활에 녹아들어 융합되어 있다. 때문에 어떤 것을 들어도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러나 도덕은 인간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로빈슨 크루소처럼 홀로 지내는 사람은 도덕을 논하지 않는다. 도덕은 관계에서 등장한 것이자 관계의 규율을 그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윤리적 상대주의는 윤리의 목적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을 받을 여지가 있다.

그러나 보편적 윤리주의의 모든 것들이 제각각의 문제를 안고 있다. 너무 추상적이거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도 하며, 소수자를 배격하거나 실질적인 결과를 묵과하는 문제를 낳는다.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각각의 논의 속에서 갈팡지팡하며 헤매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무엇이 옳은가, 어떤 논리를 채택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하겠다. 다만, 설령 그 의의에 의문이 있을지라도 윤리적 상대주의를 기반으로 윤리적 보편주의를 찾아헤매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무엇이 옳은지 모르기에 보다 개방적인 상태로 이러저러한 것을 고민해보되, 모든 것을 긍정한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부정하지 않도록 어떠한 진리를 궁구하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끝없이 답없는 논의를 이어가야 한다. 답이 없어 답답해하면서, 상대의 논의에 발끈하면서도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고 귀를 열 때, 비로소 어떠한 가치를 발견하고 창출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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