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놀음의 종결 1화
이건, 흔한 촌부의 시시한 사랑 놀음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되고서, 그를 죽이기까지의 이야기.
그와 만난 건 우연이었다. 촌이라 하기에도, 도시라 하기에도 애매한 그저 그런 동네였다. 야성적인 사람이 많은 탓에 동네의 집들은 대부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느 기업의 이유 모를 아파트 건설을 제외하고는 칠이 벗겨진 벽, 투박한 생김새의 창문, 끼익- 경첩소리가 요란한 문짝들 투성이. 때문에 그와 같은 업에 종사하는 이를 본 건 생전 처음이래도 빈말이 아니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랬나. 요즘엔 별에 별 게 다 디자이너다 싶었다. 건축가면 또 몰라, 그냥 벽지 붙이고 페인트칠 좀 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디자이너 씩이나. 피식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흘리며 옆집 철민이 아저씨 얘기를 들었다.
일의 발단은 이러했다.
여느 날과 다름 없는 날, 찌는 듯 더운 여름날이었다. 이제 100일이 조금 넘게 남은 수능 공부에 짜증스러워할 무렵, 옆집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쿵- 위잉-
어디 건물이라도 하나 무너졌나 했다. 고요한 동네에는 듣기 어려운 굉음에 창문을 열었다. 웬 아저씨들이 트럭에서 짐을 옮기고 있었고, 옆집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집 안으로는 벽을 뜯어낼 듯 두드리고 뚫는 이들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생소한 광경에 이웃 주민들이 하나 둘 나왔다. 몇몇은 이게 뭔가 신기해하는 듯 했지만 대부분은 짜증스런 얼굴이었다.
"이게 다 뭐요?"
앞집 사는 할아버지가 물었다.
"아이고, 영감님. 오랜만입니다."
집 안에서 아저씨들에게 뭐라뭐라 외치던 철민 아저씨가 바람 같이 나와 굽신거린다.
"이게, 그, 인테리어 공사를 해야 해서요."
"인테리어 공사?"
"예예, 내부를 예쁘게 바꾸는 건데, 왜 얼마전에 제 딸아이가 결혼했지 않습니까. 그 애가 조용한 데 살고 싶다고 내려오려는데 집 구조가 마음에 안 든다지 뭐예요. 그러면서 자기 마음에 들도록 집을 좀 바꾸겠다고.. 인테리어 디자이너 분을 불러서 리모델링 하는 중입니다."
아저씨가 어딘가 뿌듯한 듯 어깨를 으쓱인다.
"아니, 그럼 미리 말하기라도 해야지. 이렇게 소란스러운데, 그냥 제멋대로 해버리면 어떡해요?"
윗집 아줌마가 신경질적으로 아저씨를 노려봤다.
"여기 수능 준비중인 애들 많은 거 몰라요? 한창 중요할 때에 이러면 어떡해?"
그제서야 아차 싶었는지 철민 아저씨가 식은땀을 흘린다.
"아이구.. 맞네. 죄송합니다. 제가 인테리어 공사는 처음이라 이게 이렇게 시끄러울지 모르고.."
아마 진심일 거다. 평소에도 그렇게 주위의 시선을 신경쓰던 아저씨인데 알면서 모른 척했을리가. 필시 아저씨의 히스테릭한 딸이 예고 없이 인테리어 공사를 통보한 것이겠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탐탁치 않은 듯했지만 별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그렇게 한참의 소음과의 동행이 시작되었다. 덕분에 강제 도서관행도 시작됐고 말이다.
도서관은 옆집을 지나 대로변 우측으로 빠지면 있었다. 크게 멀다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가깝지도 않은 정도. 때문에 더위를 피하기 위해서는 새벽같이 나가 밤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인테리어 공사는 신기했다. 새벽부터 오가는 트럭이 보였는데, 밤에 돌아가는 길에 봐도 뭔가를 뚝딱거리고 있었다. 인테리어에 동원된 사람은 열 정도였다. 그중에서 그는 유난히 눈에 띄였다. 아마, 아저씨들 사이에 있는 유일한 총각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를 처음 제대로 본 건 인테리어가 시작된 지 열흘 정도 지났을 무렵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그는 도로에 서 있었다. 담배를 피며 하늘을 바라보는 게 일에 지친 노동자 같기도 했고, 여름에 취한 시인 같기도 했다.
그는 눈이 예쁜 사람이었다. 어둡게 보이다가도 빛을 받으면 호박빛으로 빛났다. 한국에도 저런 눈이 있구나, 멍하니 바라보다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꾸벅, 인사를 하곤 도망쳤던 것 같다.
이후로는 이상할 정도로 자주 마주쳤다. 아니, 옆집에서 일하고 있으니 당연한 거려나. 인사를 한 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 그가 먼저 말을 걸었다.
"매번 어딜 그렇게 가요? 도서관?"
"네.."
낮은 목소리가 톡 튀는 말투에도 불구하고 정중한 느낌을 자아냈다.
"학생인가? 학교는 안 가요?"
"아.. 성인이에요."
"아, 대학생이에요?"
"아뇨. 수능공부중이에요."
"그렇구나. 한창 힘들 때네요."
"네.."
"원하는 과는 어디에요?"
"사범대 가려고요."
"선생님이 꿈이에요? 무슨 과목?"
"네.. 국어 선생님이요."
피상적으로 흐르는 대화가 다소 따분하게 느껴졌다. 슬 땀이 나기도 해 자리를 벗어나려는 순간, 그가 다른 얘기를 꺼냈다.
"지난 번에 가지고 가던 책, 그거 재밌죠."
"어.."
"싯타르타요. 헤르만 헤세가 쓴 거 가지고 가던데."
"아! 맞아요. 읽어보셨어요?"
"읽어만 봤겠어요? 가장 좋아하는 책 중 하나예요."
"책 좋아하시나봐요."
"네. 근데 아직 초짜 독서러예요. 좋아하게 된 지 얼마 안 됐거든요."
수능공부에 치여 한참을 책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못했던 지라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혹시 '이름이 법이 될 때' 아세요?"
"아뇨. 어떤 건데요?"
그의 맑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빛났다.
"누군가의 이름으로 지어진 법에 대한 이야기예요. 이름이 법으로 만들어지는 이유를 아세요?"
"아뇨."
"기억하라고요. 이 법이 왜 만들어졌는지를."
잠시 숨을 고르고 그를 바라봤다.
"그냥 어떤어떤 위반법 이런 것 보다 이름으로 지어진 법을 보면 궁금해지잖아요. 이 사람은 누군데 이름이 법으로 까지 이어졌지? 어쩌다 이런 법이 나왔을까?"
그가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날 바라본다.
"법은 그저 강제하는 게 아니에요. 속박하고자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요. 그저 더 좋은 세상을 위한 울타리를, 선을 만들어줄 뿐이에요. 그래서 그 의미를 좇는 게 더 중요해요. 어떤 신념에서, 어떤 마음으로 이런 룰이 정해진 건지 그 마음을 기억해야 해요."
고작 20대 초반에 일을 하겠다고 나왔다 돌아가지 못한 청년, 학교를 나서다 영원히 사라져버린 아이, 환자를 위해 고군분투했으나 환자에 의해 죽임당한 의사를 떠올렸다.
"사실 그 책에 나오는 법들의 사건을 보면, 되게 흔한 거예요. 그런 게 많아요. 우리가 그냥 뉴스로 접했다 금방 잊어버릴 일들. 혹은 뉴스조차 되지 못할 일들. 그런데 어떻게 그 일이 법이 되었을까요?"
푸른 하늘 아래, 그의 검은 머리칼이 흩날린다.
"내 아이 같았거든요. 내 가족 같았거든요. '나' 같았거든요. 책에서 소개한 김 군 사건을 보면, 하청 업체에서 일하다 사고로 목숨을 잃은 그의 사건은 당시 흔한 일이었어요. 그런데 기사에 어떤 게 보도가 돼요. 그게 큰 풍파를 일으켰죠."
"그게 뭐죠?"
"컵라면. 당시 김 군의 가방에 있던 컵라면이 보도됐어요. 그게 당시의 청년층에게 동질감을 불러일으킨 거예요. 나도 밥이 없어서 컵라면을 먹는데, 내 처지 같았던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나서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요. 법을 바꾸어야 한다고요."
그의 굳은 얼굴을 응시하며 입을 움직인다.
"동질감이, 세상을 바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