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함이 무너진 자리, 나의 케렌시아
강박적인 일상이 무너져버리는 상상을 한다. 어떤 날에는 그저 상상에 그치지만, 또 어떤 날에는 작정하고 가지런한 일상을 흩트린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어떤 장소를 찾아가는 것이다. 가지런한 강박을 위해 아무것도 안 한다는 말은 어쩐지 부조화스럽다.
일상의 모든 것이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때때로 나는 잘 살고 싶어서, 잘 살아내고 싶어서 나도 모르게 온몸에 힘을 주며 일상을 대한다. 한정된 시간 속에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며 팽팽하게 맞선다. 빈틈없는 경계에 놓이는 순간 때때로 답답한 마음이 든다. 식탁 위의 작업공간과 설거지가 쌓인 개수대 사이에 끼어있는 나의 위치로 예를 들 수 있을까. 늦은 저녁, 내가 읽을 책 위로 올라온 그림 동화책은 어떨까. 필사노트 옆으로 내미는 아이의 수학문제집은, 영어녹음시간에 아이가 가지고 온 한글 익히기 책도. 해야 할 일들과 하고 싶은 일들의 균형이 흔들릴 때쯤, 문득 생각한다. 나는 일상을 살아내고 있는 걸까. 아니면 만들어내고 있는 걸까. 어쩐지 둘 다 부정할 수가 없다.
내가 주도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믿지만, 어쩌면 나는 거대한 흐름에 휩쓸려 무언가를 ‘연기’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사회가 정해놓은 ‘성공적인 삶’ ‘성장하는 삶’‘올바른 부모의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나는 나에게 주어진 배역을 충실히 수행한다. 잘 살아내는 사람, 성실한 사람, 부지런한 사람, 무언가를 끊임없이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애써 인증하며 연기한다. 그 배역을 잃지 않기 위해서 나는 항상 긴장하며 일상은 보내는 것은 아닐까. 대사를 까먹지 않으려고 대본을 수십 번 확인하고, 표정을 연기하고, 즐겁고 의미 있는 일상을 채우는 사람으로 보이고. 사실은 게으르고 산만하고 가볍고 쓸데없이 진지하지만, 대충 살고 싶기도 한 사람인데 말이다. 생각과 행동의 괴리감에 좌절하며 하루의 끝에서는 자책하고 반성하는 연기자.
나는 묻는다. 일상이 무대였다면 일상을 무너뜨린 나도 나일 수 있을까. 무대에서 내려와도 나는 내가 될 수 있을까. 하루의 끝, 침대에 누워서도 머릿속에서는 내일의 대본을 만든다. 내일은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할까. 대본을 잊으면 나는 애드립이란 걸 할 수 있을까. 가장 편안해야 하는 시간마저 완벽함과 강박이라는 무거운 이불을 덮고 나는 잠이 든다.
다음 날 아침, 단톡방의 부지런한 아침인사들을 눈팅하며, 시계를 본다. 타인보다 2시간은 더 늦은 삶이라는 압박에 또 고개를 흔든다. 둘째 아이의 등원을 준비하며 개수대에 쌓인 그릇들을 본다. 못 본 척하고 노트북과 필기도구를 가방에 넣고 아이와 함께 집을 나선다. 카페에서 커피 한잔 시켜놓고, 글을 쓰고 단톡방에서 수다를 떨고 노래를 들으면서도 개수대에 쌓인 그릇들이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이 글을 쓰고 나면 집으로 가서 설거지부터 하고 출근해야지라고 생각한다. 해야 할 일들은 매일 쌓이고, 끝내도 끝이 없다. 의미를 찾으려 애쓰지만, 의미를 찾는 행위로 피곤할 때마저도 시간은 흐른다. 일상도 흐른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다르지 않다. 그런 평일을 보내고 맞이한 주말, 나는 아이들과 함께 바다를 보러 간다. 고요하고 잔잔한 바다를 보니 내 마음도 따라 고요해진다. 그저 고개를 들고 멀리 시선을 둔다. 움직임조차 미미한 풍경 속에서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이 든다. 그 순간만큼은 하루를 채워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비워지는 나를 느낀다. 말 그대로 자유롭다. 풍경 속으로 들어온 아이들의 모습도 더없이 평화로워 보인다. 돌멩이를 들추며 게와 고둥을 잡으며 신이 났다. 나는 수평선을 바라본다. 강박도, 역할도, 대본도, 루틴도, 남과의 비교도, 반성도 필요 없는 그 순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곳. 그저 나를 놓아두는 곳. 완벽함이 철저히 무너진 곳.
숨을 고르고 힘을 모은다. 나의 케렌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