얕디 얕은 감성팔이, 자의식 과잉에 논리는 빈약하고, 열정은 넘치는데 방향성을 없다.
‘혼돈의 예술가병 초기 증상’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는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는 데, 정작 실천력은 침대 밑 먼지 수준. “해야지”란 말 백번하기 전에 하나라도 하지. 생각은 많은데 정작 액션은 적고, 상상은 넘치는데 자기 검열이 그걸 다 찌그러트린다. 그 와중에 자존심은 우주 끝까지 뻗쳐 있고, 실력은 아직 지구권에 머물러 있다. 갈망은 높은데, 체력은 따라주지 않고 이상은 선명한데, 실천은 늘 끊긴다. 그래서 계속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미루고 자책만 할 뿐이다. 예민하게 작동해야 할 곳이 번지수를 잘못 찾아간듯하다. 표현은 눌리고, 에너지는 안에서 썩고, 자신감은 점점 약해진다. 이런 모든 감정들이 명확히 언어화하지는 않았지만 몸과 마음은 이미 이러한 갈등을 살아내고 있다. 현재 진행형이라고.
“평생 ‘될 뻔 한 사람’으로 남을래?”
‘그래도 자질은 되어야지.’
“당장 실천으로 때려 박아! 행동할 때만 ‘진짜’로 증명되는 거니까.”
‘그래도 좀 제대로 하고 싶은데’
"제대로가 뭔데? 필요한 건 재능이 아니라 계속 꾸역꾸역 하는 것. 다 필요 없고, 그냥 오늘 뭐 하나라도 써봐. 망쳐도 되니까. 너답게, 네 방식으로!"
'그래도......'
열정과 자기 검열 사이에서 마음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자운동을 한다. 왔다리 갔다리.
연필을 깎으며 생각했다. 마음속에 두꺼워진 나에 대한 혐오도 깎여나가길. 쓱-쓱 깎이는 소리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홀가분했다. 뭔가 다시 시작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망쳐도 될 것 같은 기분. 그게 나다운 거니까. 자의식 과잉과 자기 검열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들인데 그것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었는지. 아마도 나는 내가 대단한 사람인 착각하면서도 허술하고 빈틈투성이인 사람임을 동시에 인지했나 보다. 하지만 나는 오늘 이제껏 내가 나아가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를 제거했다. 아마도 제거했으리라. 그렇게 믿는다. 몇 자 적지 않았는데 벌써 연필심이 줄어들었다. B 심을 샀는데, 너무 빨리 닳아버린다. HB를 살 걸 그랬다. 진하게 그리고 뭉툭하게 적히는 진한 연필심이, 고집스럽고도 투박한 내 마음과 닮아서 별로다. 연필이나 다시 깎아야겠다.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연필을 깎아야겠다. 쓱-쓱. 깎아내고 싶은 것들도 같이 깎여나가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