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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예술가병 초기 증상

by 노미화

얕디 얕은 감성팔이, 자의식 과잉에 논리는 빈약하고, 열정은 넘치는데 방향성을 없다.

‘혼돈의 예술가병 초기 증상’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는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는 데, 정작 실천력은 침대 밑 먼지 수준. “해야지”란 말 백번하기 전에 하나라도 하지. 생각은 많은데 정작 액션은 적고, 상상은 넘치는데 자기 검열이 그걸 다 찌그러트린다. 그 와중에 자존심은 우주 끝까지 뻗쳐 있고, 실력은 아직 지구권에 머물러 있다. 갈망은 높은데, 체력은 따라주지 않고 이상은 선명한데, 실천은 늘 끊긴다. 그래서 계속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미루고 자책만 할 뿐이다. 예민하게 작동해야 할 곳이 번지수를 잘못 찾아간듯하다. 표현은 눌리고, 에너지는 안에서 썩고, 자신감은 점점 약해진다. 이런 모든 감정들이 명확히 언어화하지는 않았지만 몸과 마음은 이미 이러한 갈등을 살아내고 있다. 현재 진행형이라고.



“평생 ‘될 뻔 한 사람’으로 남을래?”

‘그래도 자질은 되어야지.’

“당장 실천으로 때려 박아! 행동할 때만 ‘진짜’로 증명되는 거니까.”

‘그래도 좀 제대로 하고 싶은데’

"제대로가 뭔데? 필요한 건 재능이 아니라 계속 꾸역꾸역 하는 것. 다 필요 없고, 그냥 오늘 뭐 하나라도 써봐. 망쳐도 되니까. 너답게, 네 방식으로!"

'그래도......'


열정과 자기 검열 사이에서 마음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자운동을 한다. 왔다리 갔다리.


연필을 깎으며 생각했다. 마음속에 두꺼워진 나에 대한 혐오도 깎여나가길. 쓱-쓱 깎이는 소리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홀가분했다. 뭔가 다시 시작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망쳐도 될 것 같은 기분. 그게 나다운 거니까. 자의식 과잉과 자기 검열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들인데 그것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었는지. 아마도 나는 내가 대단한 사람인 착각하면서도 허술하고 빈틈투성이인 사람임을 동시에 인지했나 보다. 하지만 나는 오늘 이제껏 내가 나아가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를 제거했다. 아마도 제거했으리라. 그렇게 믿는다. 몇 자 적지 않았는데 벌써 연필심이 줄어들었다. B 심을 샀는데, 너무 빨리 닳아버린다. HB를 살 걸 그랬다. 진하게 그리고 뭉툭하게 적히는 진한 연필심이, 고집스럽고도 투박한 내 마음과 닮아서 별로다. 연필이나 다시 깎아야겠다.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연필을 깎아야겠다. 쓱-쓱. 깎아내고 싶은 것들도 같이 깎여나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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