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작가 시작할 때의 이야기를 꺼내어본다. 말하자면 고백이다. 그것도 부끄러운 고백이다. 브런치 작가가 되고 싶은 이유가 ‘글을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프로필에 ‘이력을 추가하고 싶어서’였다. 입시 수학을 가르치면서 글을 쓴다는 건 뭔가 좀 멋져 보이니까. 너무 속물 같은가. 시작은 그러했으나 현재 나의 글쓰기는 꽤 진지하고 솔직한 단계로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다. 잘 쓴다는 말이 아니다. 적어도 내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으니, 쓰는 사람으로 성장했다는 말은 정말 거짓말이 아니다. 나의 첫 글쓰기는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한 사람의 치기 어린 오만과 허세였다. 사십 평생 글이라는 건 남이 적어놓은 것만 읽었지 남이 읽을 글을 내가 적는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시작은 SNS에서부터였다. SNS를 아이들의 성장 기록용으로만 쓰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다른 삶이 눈에 들어왔다. 멋있게 당당하게 자신을 세우고 사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글도 어쩜 그리도 잘 쓰고 일은 또 어쩜 그리도 다들 전문적이며 멋있는지. 그 공간 안에서 소통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이 성장하고 있는 걸 보고 있으니, 이거 지금 당장이라도 그들처럼 시작하지 않으면 나만 뒤처지는 삶을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꾸어 놓은 예쁜 화단과 같은 모습일지언정. 물론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나 또한 그랬으니.
만들어진 세상이라는 말이 조금은 거북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SNS 세상은 어느 정도는 그러했다. 좋은 것 행복한 것만 가득했고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유리하고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그 공간을 잘 활용하며 즐기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눈에 보이는 인사치레라고 허투루 넘어가는 사람들이 없었고 세상 다정한 사람들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하는 것에 긍정적인 영향이 미치길 원하는 것만 같았다. 그것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좋은 것은 좋은 것을 끌어당긴다는 법칙이 완벽히 적용된 공간. 그것이 큰 장점이자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 단점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소외감, 박탈감, 우울감으로 연결되는 것 같았다. 나 또한 그랬으니.
열심히 마음을 다해 사는 사람들도 보였고, 사람 가려가며 이익을 저울질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그러한 것들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온전히 나의 편협한 판단임을 안다. 나 역시 겉으로 좋은 사람으로 비치길 바라며 ‘성장’이라는 공통분모를 만들어 나에게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찾고 있었으니. 보이는 게 다가 아닐 수도 있는 세상에서는 선입견과 오만한 색안경이 자동으로 써졌다. 예쁘고 멋진 것만 쫓는 ‘나’라는 안경은, 아주 거만하고 진실하지 못한 안경이라 생각했다. 진심을 말하는 것도 듣는 것도 이게 과연 진실인가 의심이 드는 날도 많았다. 때로는 타인의 성장과 비교하여 괜스레 주눅이 든 날도 있었고, 아이의 교육과 관련된 정보들을 수집하면서 내가 이렇게까지 극성스러운 엄마였나 싶었고, 육아에 관련 정보를 보다 반성하는 날도, 삐딱한 마음으로 보는 날도 많았다.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면 된다 생각하니 참 정 없는 공간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다 누군가의 프로필에 쓰인 ‘브런치’라는 단어가 눈길을 잡았다. 콘텐츠 생산자를 작가라고 부르며, ‘출간의 기회’를 중심으로 정제된 글이 올라오는 곳. 흥미로운 것은 아무나 글은 쓰지만 아무렇게나 쓰지 않는 이 플랫폼에서는 작가로 승인이 된 후 글을 발행할 수 있는 구조라는 것이었다. 브런치 뒤에 붙은 ‘작가’라는 말이 조금은 생경하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글이 작품이 되는 공간을 만든다.’라는 슬로건과 출판 프로젝트의 ‘브런치 북 공모전’은 내 안에서 묘하게 ‘작가’라는 의미를 희석했고 마음을 붕 뜨게 만들었다. 나도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좋은 이력이 될 수도 있겠다는 마음이 두둥실 떠다녔다. 한 편의 글을 공들여 적고, 연재할 글의 목차와 개요를 써서 신청서를 냈다. 그다음 날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는 메일이 왔다.
한껏 들떠 ‘저 브런치 작가가 됐어요’라고 SNS에 요란스럽게 자랑질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축하한다. 멋있다. 대단하다.라는 말 뒤에 남은 건 써내지 못하고 서랍장에 들어있는 목차들뿐이었다. 알맹이 없는 빈 껍질. ‘네까짓 게’라는 고약한 마음의 말이 스멀스멀 올라와 ‘작가’라는 말을 민망하고 부끄럽게 만들었다. 오만과 허세로 희석된 ‘작가’의 의미가 다시금 선명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되고 나서부터가 문제였다. ‘공개에 대한 두려운 마음’과 ‘계속해서 써내야 한다.’라는 압박감에 얼마 가지 않아 제동이 걸린 깡통 브런치가 되었다. 몇 개월 동안 방치 상태였다. ‘그래서 네가 말하고 싶은 건 뭐냐’라는 질문이 매번 머릿속에 떠다녀도 답은 늘 찾지 못했다. 글의 분량도, 글의 흐름도, 글의 주제도 글솜씨도 모두 엉망진창이었고, 꽤 오랫동안 힘들어했었다. 정말 어디서부터 뭘 써야 할지 몰랐다. 생각의 조각들이라도 있으면 끼워 맞추기라도 하지. 당연한 일이었다. 그만큼 나에게 누적된 그 어떤 것들이 ‘하나도’ 없었다. 무엇을 쓸까를 걱정하지 말고 일단 사소한 일상, 잡다한 감상이라도 남겨놓아야 함을 뒤늦게 알았다. 그것 역시 쉬운 게 아니었다.
고민의 나날들이었다. 주제도 스타일도 방향성도 없는 초짜의 고독한 글쓰기. 그러다 올해 3월 박애희 작가의 SNS 게시물에서 <쓰기의 책장> 1기 모집 예고를 보게 된다. ‘글쓰기를 위한 독서 모임’. ‘바로 이거다!’라는 느낌이 왔다. 지금 나의 상황에 딱 맞는 글쓰기. 하나의 돌파구일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들었다. 글 쓰는 사람들은 어떻게 쓰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쓰는지 궁금했고, 같이 글을 쓰고 공유한다는 것이 유익할 것 같았다.
‘글쓰기’에 대한 막막함과 두려움이 몰려올 때 그 고민을 누구와 어떻게 나누면 좋을까요? 홀로 글쓰기와 씨름하다 찾아오는 모든 질문과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경험이 담긴 조언과 다정한 격려를 해줄 글쓰기 선배와 동지를 만나 ‘쓰는 마음’을 더 단단하게 지켜나갈 수 있습니다. <쓰기의 책장> 박애희 작가
홀린 듯이 모임에 들어갔다. 다른 이의 글쓰기를 접하고 그 속에서 나의 문제점을 찾고, 무엇보다 매일매일 쓰는 습관으로 글감을 찾고 글이 쌓이길 바랐다. 쓰는 동안 외롭지 않았다. 한두 달을 지나면서 글쓰기에 대한 부담이 많이 내려놓게 되었다. 잘 쓰기 위해서 욕심부렸던 마음들을 내려놓으니 글에서 불필요한 것들이 빠지고 긍정적인 것이 하나둘씩 채워지기 시작했다. 3기부터는 나도 조금씩 즐기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것이 또 운명적인 이유가, 3 기수 멤버들의 에너지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이었다. 조금 양념을 쳐서 이야기해도 거짓말은 아니다. 모임의 분위기가 전복될 정도로 활력을 불어주는 멤버들이었다. 활자 중독자들, 키보드 입담꾼들, 그리고 출간 작가들이 쓰는 글들은 읽을 것도 많아 피로감이 심했지만, 신기하게도 정말 기분 좋은 피로감이었다. 자신들의 글을 쓰기에도 에너지가 모자랄 텐데 다른 사람의 글에 하나하나 피드백을 해주는 다정함을 기본값으로 장착한 글쓰기 신인류들이었다. 쓴 글도 값진 피드백도, 모든 글에서 배울 것이 넘쳐났다. 모임이 마치 ‘퀼트’처럼 변화되고 있었다. 알록달록 개성을 가진 조각들이 모여서 만든 따뜻한 이불 같이 말이다. 그중 한 조각이 되는 일은 나의 글쓰기를 신나고 재미있는 작업으로 변모시켜 주기 충분했다.
누군가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안다. 그 엄청난 에너지를 무엇을 위해서 서로가 내고 있는지도 가끔은 이해 안 될 때도 있었지만, 글쓰기에 대한 나의 내면의 변화가 이 말도 안 되는 과정의 이유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매일 쓰고 매일 서로의 독자가 되어 호응해 주는 이 과정이 사실은 힘든 일인 걸 알기에 서로에게 고마워했고 의지했고 더 열심히 쓰려고 했던 것 같다. 만들어진 세상이라도 이렇게까지 완벽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가도, 이렇게까지 해야 어떻게든 의미가 남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는 사이 정말로 나는 매일 쓰고 있었고, 오만과 허세가 아닌 다정하고 따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었으며 욕심이 아닌, 꿈도 다시 꽃피듯 피어났다.
나를 구한 그 다정함은 매일 차곡차곡 쌓이는 파일 속 글들로 나를 웃게 했고, 함께하는 사람들의 응원과 활력으로 나를 나아가게 했으며, 혼자가 아닌 같이 나아가는 그 한 걸음 한 걸음으로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글쓰기는 미치도록 힘들고 미치도록 설렌다는 걸 온 감각으로 느꼈다. 그러면서 배워나갔다. 쓰면서 진심으로 알게 되는 나의 마음. 가식적으로 포장할 수가 없다는 걸. 내가 아닌 것만 같은 내면이 포장되는 순간, 그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재빨리 지워버리며 또 나를 알아갔다. 나를 표현하려면 나와 같은 것을 내어놓아야 내가 날 허용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나를 구한 다정함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또한, 받은 만큼 베풀어야 함을 매일 확인하며 다짐한다. 그러니, 나는 앞으로 부끄러워하지 않고 계속 써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