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의 폰(pawn)
고요한 전진 그리고 성장가능성
추석 연휴를 앞두고 마트에 갔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날 수가 있나. 아이들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장난감 코너로 향했다. 마침 명절 용돈까지 받았으니, 호주머니에 노란색 지폐를 넣고 장난감 코너로 향하는 모습이 흡사 위풍당당한 개선장군과 같았으리라. 이것저것 들어보고 만져보고 한참을 구경하던 아이들은 보드게임 진열장 앞에 멈춰 섰고 첫째 아이는 체스 게임을 카트에 담았다.
“너 이거 할 줄 알아? 엄마는 오래전에 했는데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나 할 줄 알아, 엄마. 앱에서 다 배웠어. 내가 가르쳐 줄게.”
알파 세대의 위엄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위풍당당한 열 살의 위엄에 때아닌 격세지감을 느끼며, 요즘 아이들은 정말 쉽고 빠르게 습득하는구나, 우리와는 속도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구나 싶었다. 나는 어릴 적 아빠에게 장기를 배웠다. 남동생과 분명 같이 머리 맞대고 배웠는데,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린 동생에게 매번 졌던 기억이 난다. 할 때마다 다른 전략으로 수를 놓는 남동생에게 매번 같은 수를 놓는 나는 질 수밖에 없었다. 희생도 공격도 없이 방어하기 바빴으니. 지금도 생각하면 신기하다. 좋은 말을 희생시켜 과감한 공격을 하기도 하고. ‘왜 저런 수를 두는 거지’라고 생각한 바로 그다음 수는 십중팔구 기가 막힌 외통수에 걸리기 십상이었다. 체스는 누구에게 배웠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대충 장기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이름이 다른 말의 게임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엄마, 이거는 킹(king)이야. 앞으로 뒤로 양옆으로, 대각선으로 한 칸씩 움직일 수 있어. 상대방 킹을 잡으면 이기는 거야. 그리고 이건 퀸(queen)이야. 이건 어느 방향으로 마음대로 칸수 상관없이 움직여. 이게 아주 중요하니까 뺏기면 안 되겠지?”
“그렇네, 이거는 천하무적이네! 퀸, 기억하겠어.”
“그리고 이거는 룩(Rook)이야. 앞으로 뒤로, 옆으로만 움직일 수 있어. 장기의 차(車)랑 같다고 보면 돼. 그리고 이건 비숍(Bishop). 얘는 대각선으로만 움직일 수 있어. 나이트(Knight)는 이렇게 움직여.”
“장기에서 마(馬), 상(象)이랑 비슷하네?”
“응, 그런데 얘는 장애물을 넘어갈 수 있어서 장기랑 좀 달라. 그리고 마지막, 역전의 폰(pawn)! 얘가 대박이야. 한 칸씩 앞으로 전진할 수밖에 없는데, 다른 말을 먹을 때는 대각선에 있는 것만 먹을 수 있어. 대박인 게 뭐냐면 엄마? 폰은 장기의 졸병과 같은데, 여기 마지막줄까지 오잖아? 그럼 얘는 엄마가 바꾸고 싶은 걸로 바꿀 수가 있어. 예를 들면 퀸으로 계급이 바뀌는 거지. 졸병이 여왕이 될 수 있다니까.”
“와, 그거 진짜 특별한 능력인데?”
“자, 이제 해보자!”
고수 느낌 물씬 풍기며 열심히 가르쳐줬던 아들은 두 번의 경기를 모두 졌다.
천하무적의 공격수 퀸으로 사방팔방은 공격해 오던 첫째는 포지션을 잡고 가만히 기회를 엿보고 있던 나의 나이트에게 잡혀 먹어버렸다. 혼란의 기회를 틈타 한 칸씩 전진하던 나의 폰은 상대 진영의 마지막 줄에 도달하여 퀸으로 승급까지 해버렸다. 첫째의 전선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고 나에겐 틈을 비집고 들어갈 공격의 기회가 쏟아졌다.
“체크 메이트!”
본인이 직접 가르쳐 준 초보에게 지는 건 조금 자존심이 상한지, 아이는 기권 없이 킹 하나로 줄기차게 도망을 다녔다. 결국은 그것마저 잡혀버렸다. 아이의 설명대로 폰은 정말 ‘역전의 폰’이었다. 공격 행마와 이동 행마가 다른 유일한 가장 약한 기물이지만 퀸으로 탈바꿈한 순간 불리하던 판세가 역전되었다. 앞서 두 개의 폰을 나이트와 룩을 지키기 위해 희생해야 할 때도 있었지만 상대의 진로를 막고 내 기물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며 포지션만 잘 잡으면 나의 전선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어줄 훌륭한 보병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예측하지 못할 판세를 뒤집어엎을 승진(Promotion)이라는 강력하고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 지위에 비해 폰의 가치는 그 능력만큼이나 컸다. 미약함에서 강함으로의 변모는 극적인 교훈까지 줬다.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도 폰(pawn)과 유사한 상징성을 가지는 캐릭터가 존재한다. 그들 역시 처음에는 미약한 존재였지만, 결국 성장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거나 판세를 뒤엎는 큰 변화를 일으키는 인물이 된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장 발장은 사회적으로 폰과 같은 낮은 위치에 있다. 사회적 약자지만, 자기 삶을 재정비하고 점차 이타적인 인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선행과 희생은 큰 변화를 이끌어낸다. 이는 폰이 한 칸씩 한 칸씩 마지막 줄까지 전진하여 퀸으로 승격이 되듯, 그의 삶 역시 끊임없이 전진하여 더 큰 의미로 승격됨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의 삶도 마찬가지다. 체스판의 판과 같은 존재가 ‘선택된 자’로 거듭나는 과정은 매트릭스 시스템의 판도를 바꿔버릴 만한 승격이 아닐 수가 없다. 그만큼 체스의 폰(pawn)이라 기물은 ‘성장의 가능성’을 상징하는 매력 넘치는 기물임이 분명하다. 그런 이유에서 아이와 함께한 체스판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어떤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건 바로, 매일 한 칸씩 전진하는 글쓰기.
어떤 기물로 어느 위치를 잘 선점해야 자신에게 유리한 판으로 만드느냐가 체스 게임의 본질이다. 한순간의 판단으로 판세가 뒤집힐 수도 있는 전략게임인 체스는 판 위에 전술과 공격, 희생이 난무한다. 흔히들 인생을 체스판이라고도 한다. 만만치 않은 인생을 두고 하는 말인듯하다. 몇 수 앞을 내다볼 수 없겠지만 내가 가진 말들을 가지고 계획을 세우고, 때때로 더 큰 이익을 위해 작은 말들을 희생시킨다. 당장은 손해처럼 보이지만 혹시 모른다. 불확실한 미래에 더 큰 보상을 가져올지 누가 알겠는가. 글을 쓰는 것은 체스판의 킹(king)처럼 전략을 짜서 싸워 넘어뜨려야 할 목표는 없다. 삶의 모든 일 또한 체스판 위에 둘 필요는 없다. 다만,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 중 하나가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한다면 전략도, 희생도, 매 순간의 선택과 노력도 체스판 기물들의 움직임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자신을 과대평가하지도 과소평가되지도 않는 폰처럼 한 칸 한 칸씩 가다 보면 나의 체스판의 판도를 바꿀만한 승진(promotion)도 일어나지 않을까.
“엄마! 다시 해! 이번에는 내가 봐주지 않을 거야.”
지금 나의 전략은 체스판 위에서 강력한 능력을 가진 퀸(queen)에만 매료된 내 아이에게 폰(pawn)의 가치를 가르치는 일이 될듯하다. 적진에 깊숙이 들어간 폰의 승진이 얼마나 막강한지를. 한발한발의 위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