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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미화 Sep 16. 2024

조건부 확률

최소한의 불확실성을 위한 최선의 방법

 올해 초, 어떤 이의 인스타 게시글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가치 있는 글들이 책으로 나와야 한다. 쏟아지는 쓸데없는 신변잡기 형식의 글들이 너무 많다. 누구나 다 쓰는 그런 글들이 넘치는 통에 피곤하다. 가치 없는 글이 난무한다.’ 이러한 내용이 있었다. 열등감에서 나오는 나의 자격지심이었을까. ‘참 배려 없는 글을 가치 있는 글처럼 써놨구나’라며 한껏 속으로 비꼬았다. 사실은 속이 상했던 거였다. 글을 제대로 써보고 싶다는 마음을 먹고 글쓰기를 시작하려 할 때쯤, 그런 글을 봤으니 얼마나 의기소침해지던지. 맹렬히 비꼬는 그 마음은 상처받지 않기 위한 나름의 방어책이었으리라. 지금 생각하니 부끄럽고 초라하고 못나 보인다. 혼자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상처받고 있었으니.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에 써놓았기에 지나가는 내가 그 말에 휘둘릴 이유가, 상처받을 이유가 없었다.      


 다만, ‘가치 있는 글’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는 있었다. 개인을 위한 글쓰기라면 일기와 같은 신변잡기 형식의 글인들 어떠하겠냐마는, 독자가 있는 글쓰기를  생각한다면 가치 없는 글에 대한 그 비판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단 한 사람에게라도 공감과 감정을 불러일으킬 만한 어떠한 작은 변화라도 주는 글이라면 신변잡기식의 일기 같은 글이라도 가치가 있지 않을까. 그 게시물에 대해서는 표현방식에 있어서 좀 거북한 부분이 있다는 건 짚고 넘어가야겠다. 이건 나의 ‘계속 쓰는 삶’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라고 해두자. 좋은 글은 못쓸지언정 그만 쓰는 불상사는 막기 위해.     


글쓰기 모임에서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음식에 비유하기’라는 주제가 나온 적이 있었다. 그때 이렇게 적었다.      


비 오는 날 생각나는 ‘탁주’ 같은 글을 쓰고 싶습니다.

막 거른 술이라고 해서 막걸리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놔두면 이게 또 맑디맑은 청주가 되거든요.

제가 쓰고 싶은 글이 처음엔 투박하고 혼탁한 글이겠지만,

서서히 불순물이 가라앉아 제가 쓰고자 하는,

제가 쓰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이는 글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랫동안 침전되어야 할 지금, 저는 딱 ‘탁주’입니다.   


 감성에 빠지기 전 이성의 회로가 제대로 작동한다. 다시 읽으니 손발이 오글거렸다. 글의 정체성이 없음을 에둘러 탁주로 비유하는 나의 뻔뻔함이란. 그러나 정말로 내가 쓰는 글들은 혼탁하다 생각했다. 막걸리는 맛있기라도 하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지, 무슨 이야기가 가치 있는 글이 될 것인지 잘 알지 못했다. 멋지고 유려한 문장을 동경해 나도 그렇게 쓰고 싶어서 호기롭게 덤빈 글쓰기였다. 내어놓는 글들의 정체는 진부하기 그지없어 부끄러웠고 화두가 명확하지 않은 나의 글은 탁주보다 혼탁하고 불투명했다. 복기하여 쓴 과거는 무딘 칼이어서 잘 못 다루다간 여기저기 베이기에 십상이었다. 일상의 언어들은 혼자만 보는 일기장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언제까지 침전되어야 할 나의 글쓰기 일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오랫동안 꾸준히 써야 될 일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자기 자신과 싸운다는 건 '이길 수 있다.'라는 조건부가 붙는다. 일종의 확률이다. 이길 수도 있고 처참히 패할 수도 있다. 된통 깨지더라도 그 결과가 나를 갉아먹을지, 새로운 양분이 될지는 나중의 일이다. 일단 해봐야 안다. 그 과정이 치열하다면 목적의식은 조금 더 선명해진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나 해야 하는가 ' 에 대한 물음에 스스로 답을 찾아봐도 지는 싸움, 결말이 뻔한 싸움은 시작하고 싶지도 않다는 게 일반적인 사람 심리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분명한 것, 불투명한 것, 괜스레 덤벼보면 이길 수 있겠다 싶은 것에 덤벼볼 자세를 취해본다. 도대체 이런 비장한 마음으로 '어떤 것' 들과 싸우고 있는 것인지 나에게 질문했다.    

  

12시가 되면 내려오는 눈꺼풀

육퇴 후 맥주캔 뚜껑을 까는 나의 두 손

아이들에게 잔소리로 무장한 나의 입

자꾸만 눕고 싶은 나의 몸뚱이

한껏 올라오는 승모근     


 하루가 너무 짧았다. 일, 육아, 공부, 사람과의 관계. 뭐 하나 쉬운 일이 없지만 정해진 시간과의 싸움은 나를 가장 지치게 했다. 하나도 포기가 안 되는 나의 욕심인가. 때로는 이것이 부족한 자신에 대한 투쟁인지, 일방적으로 맞아 터지는 것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다. 아직 나의 삶이 서툴러 그러려니 하며 ’이길 수 있다. ‘라는 조건부를 앞세워 매일매일 시간과 싸우며 나의 애씀을 글로 남겼다.      


 사실 거짓말을 조금 보태서 위와 같은 싸움은 노력으로 이길 수 있다 생각했다. ‘열심히 치열하게 하면’이라는 조건부에 승산의 확률값이 낮은 것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나왔다. 글을 쓰다 보니 나의 글들은 기념비보다 상흔에 가깝다는 걸 알았다. 있는 그대로 나를 드러내기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타인에게 흉이 되고 약점으로 보일 거라는 생각보다 무딘 칼이 그러하듯 어설프게 꺼내어 휘갈긴 감정들은 나를 다시 베이게 하고 아물었다고 생각했던 상처를 덧나게 했다.      


 기억을 복기하는 일. 잠재되어 있던 감정을 톡톡 건드려 다시 살려내는 일은 에너지 소모가 컸다. 특히나 힘들었던 일에 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글을 쓰는데  '불행을 욱여넣지 말라'라고 하지만 반대로 내 안에 가득 차서 찰랑대는, 그래서 덜어내야 하는 감정임을 쓰면서 알았다. 부정적인 감정에 현재의 내가 잠식되지 않도록 조심하며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복기했다. 그 기억의 파편들은 퍼즐 조각처럼 맞추고 맞춰져서 지금의 내 모습을 만들어갔다. 다듬어지지 않은 괴물과 같은 감정을 글로 유려하게 풀어내겠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모순이었다. 비밀스럽고 어둡고 추악한 존재는 아름답게 쓸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지독하고 비열한 생각들을 어떻게 멋지게 포장할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하지 않았다. 적어도 현실의 나에게는 말이다. 가공한 인물에 상상의 일들을 덮어씌워 내 안에서만  '진짜'가 되게 만드는 일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누구를 죽이는 것도 누구를 살리는 것도 내 상상 안에서만 일어날 일이니까. 다만, 입 밖으로 꺼낸다는 건 윤리의식 혹은 통념과 대면하여 나를 추악한 사람으로 드러내는 일이 되어버리기에 최선을 다해 그 괴물 같은 환상이나 유령 같은 환각들이 절대로 입 밖으로 글로 나오면 안 될 일이었다. 드러내는 행위에 따라오는 것은 책임이었다. 그건 용기였고. 용기 이전에 인간의 도리에 관한 것들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불안한 과거를 들춰내는 이러한 글쓰기기가 어떤 식으로 변모할지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글을 쓰면서 도 몰랐던 나의 세계가 조금은 넓어진다는 것이다. 같이 글쓰기를 하던 어떤 분의 말이 오래 남아있다. ‘타인에게도 자신에게도 어느 누군가에게도 가시처럼 찌르는 글이 아니길 바란다’라는 피드백이었다. 그 당시 가시투성이로 점철된 나의 글을 보며 더더욱 깊이 담아두기로 했다. 부정적인 것도 희석되어 좋은 메시지를 건져 올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언젠가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가치 있는 글을 쓰는 날이 오지 않을까. 아무것도 아닌 행위도 거듭하다 보면 의미가 커진다. 투박하고 혼탁했던 글들도 계속 쓰면서 가라앉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부유하는 생각들이 무게를 가지며 글로 내려앉았다. 더없이 차분하게 쓸 수 있음을. 흉이 될지 표식이 될지. 일단 써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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