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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미화 Sep 11. 2024

 변환 공식

천변만화(千樊萬化)를 위한 자강불식(自強不息)

 도마뱀 한 마리를 키우고 있다. 집에 데려온 지 1년이 조금 넘은 크레스티드 게코 종이다.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키우게 되었지만, 작은 케이지 속에 본능만 남아 숨 쉬고 있는 그 작은 생명체가 안쓰럽기도 했다. 집게손가락만 했던 도마뱀은 지금은 손바닥만 해졌다. 도마뱀은 몸집을 키우기 위해 탈피라는 걸 한다. 환경 변화에 적응, 피부 상태 유지, 번식기 등의 이유도 있지만, 성장을 위한 탈피가 가장 큰 이유다. 습하고 어두운 것을 좋아하는, 숨는 습성이 있는 이 생명체는 자기 몸집을 키우는 그 과정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가 잠든 밤에 조용히 몸집을 키우는 일을 한다. 그런데 신기한 건 탈피의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게코 종 도마뱀은 탈피하면서 자신의 허물을 먹는다고 한다. 영양분을 보충하기 위해 혹은 자신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스스로 벗은 허물을 양분 삼아 다시 크는 놈.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 그러한 탈피는 생을 다할 때까지 이어진다.      


 어떤 것에 자꾸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두고 누군가는 ‘참 너도 별스럽고 별게다 진지하다’라는 말을 듣지만 내 안에 부족한 어떤 것을 좋은 의미로 다시 채워놓는 게 나는 유별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과정이 더 재미있게 느껴진다.  ‘그렇지? 눈치 없이 내가 좀 말이 많아.’라고 분위기를 반전하면 그뿐이다.


 생각해 보면 나 말고도 별스럽게 말이 많은 존재가 주변에 있다. 끊임없이 말하는 것도 모자라 상상에 공상을 더해 생각의 허물을 벗는 존재. 바로 아이들이다. 본인들은 전혀 힘들지 않은, 어쩌면 호기심과 즐거움으로 충만한 그 생각의 탈피가 나는 때때로 귀찮고 힘이 든다. 하지만 허물을 양분 삼아 다시 크는 도마뱀처럼 아이들이 스스로 벗어놓은 생각의 껍데기를 야금야금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게 부모의 역할이지 싶다. 시종일관 종알대는, 시끄럽고 귀찮고 귀엽고 하찮기까지 한 그 생각의 질문들을 들어주지 않을 방도가 없다.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까지는 아니더라도 살면서 마주할 세상의 말도 안 되는 일에, 상상과 공상의 껍데기는 어느 정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좋은 양분으로 쓰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한 생각의 탈피라면 기꺼이 도와주고 생각의 덩치를 키워주고 싶다. 어두운 것을 좋아하고 숨는 습성을 가진 도마뱀과 달리 아이들은 밝고 따듯한 기운이 충만한 곳에서 생각의 껍질을 더 잘 벗어냈다. 생을 다할 때까지 몸집을 키우는 도마뱀처럼 생을 다할 때까지 생각의 몸집을 키운다는 것에서 그 둘의 탈피는 참 닮아 있다. 사실 나도 아이들과 다르지 않다. 나 또한  끊임없이 탈피 중이다.      


 우리 집 도마뱀은 나와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남들 다 잘 때 무언가를 사부작거리는 나도 도마뱀처럼 야행성이다. 아이들이 다 자러 들어간 후 거실의 불은 소등되면 그때부터 우리 둘은 각자의 공간에서 활동을 시작한다. 거실 한쪽 테이블에서 글을 쓰고 있던 어느 날 밤 비바리움 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서 가보니, 도마뱀이 열심히 탈피 중이었다. 상체 부분은 다 뗀 상태였고 뒷다리 부분에 있는 허물 껍질을 입으로 물어 당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한동안 조용히 지켜봤다. 뒷다리에 달린 허물 껍질을 입으로 물고 앞으로 쭉 당겼다. 늘어지는 허물을 앞발로 눌러 찢어 버리고, 뜯어진 허물은 바로 냠냠거리며 먹어치웠다. 그러고는 나무껍질 쪽으로 배를 붙이고 기어갔다. 거친 표면에 몸을 쓸 듯이 움직이니 꼬리 쪽에 있는 허물이 나무껍질의 요철에 걸려 자연스럽게 벗겨졌다. 남은 뒷발의 허물은 다시 입으로 뜯어먹어버렸다. 등 부분에 껍질이 조금 남아있었지만, 그냥 내버려 두었다. 알아서 잘 처리할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동공이 한껏 커진 도마뱀은 경계의 태세로 자신의 밤의 영역에 들어온 침입자를 귀여운 얼굴로 바라봤다. 비바리움을 잠시 열어 습도를 체크하고 도마뱀의 은밀한 시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물만 살짝 뿌려주고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와 나 역시 생각의 탈피를 시작했다.      


 어떤 날은 신나게 생각의 몸집을 불려 쉬지 않고 글을 써 내려간 날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날이 그러지 못했다. 탈피 부전. 탈피를 실패한 경우를 말한다. 성장해야 하는 부분의 껍질이 제대로 벗겨지지 못해 피부에 남아있는 경우, 남아있는 껍질이 신체를 압박하여 혈류를 방해해 괴사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한다. 주로 잘 떼어내기 힘든 발끝, 발가락 부위, 눈꺼풀이나 눈 주변, 꼬리 주변에 발생하는데, 염증이 생길 수도 있고 심한 경우에는 탈피 부전으로 수명이 짧아질 수도 있다고 한다. 몸을 불리기 위한 탈피는 생물에게는 매우 고된 과정인 동시에 생존을 위한 꼭 필요한 과정인 것 같다. 괴롭지만 변화되는 과정. 탈피를 마친 도마뱀은 어떤 기분일까. 자신이 조금 더 성장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만족할까. 아니면 이번에도 생존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을 느낄까. 생각의 탈피는 생존과는 직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벗겨지지 않은 생각의 허물 속에 갇혀버리는 것을 상상하니 왠지 모르게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든 불어난 생각을 글로 적어내기 위해 도마뱀이 그랬던 것처럼 요철을 찾아 계속해서 생각의 탈피를 시도했다. 어떻게든 적어내야 잠을 잘 수 있었다.   

   

 어릴 적 말 많고 밝은 나는, 종종 말 없고 움츠린 아이의 가면을 쓰고 이중적인 모습으로 살았었다. 어느 것이 진짜 나인지, 어떤 껍질을 ‘먹고 자라야’ 할지는 어른이 되어서야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사실은 여전히 탈피하지 못한 껍질들을 가지고 사는 중이다. 어두운 과거의 결핍들을 양분 삼아 부정적인 배설이 아닌 의미 있는 이야기들로 탈 바꾸고 싶은 욕망이 글을 쓰면서 생기기 시작했다. 괴롭지만 변화되는 과정이 탈피라 했던가.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꺼내어 놓기가 아직은 두렵고 괴롭지만, 양분이 되어 의미 있는 것이 된다면, 그 결과로 삶이 조금 더 평안하고 충만해진다면  기꺼이 허물을 벗기고 내어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나는 지금  탈피 중이다.



우리집 도마뱀 '코리'의 탈피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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