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명의 수감자들이 이곳을 통해 장시간의 고된 노동이 기다리는 작업장으로 향했다.
저녁에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수용소로 돌아왔다.
살해된 시체를 들고."
여기는 폴란드 오시비엥침,
더 이상 아우슈비츠가 아닌 오시비엥침으로 불려야 한다.
독일어가 아닌 폴란드어로
자유를 희생당한 그들을 추모하고, 그들을 기억하는 방향으로.
첫 전시관에 들렀을 때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유대인을 강제 이송한 기차들이 출발했던 가장 중요한 지점들이 표시된 유럽 지도이다.
우습게도, 유럽의 정 중앙에 위치하여 강제 이송하기에 가장 ‘효율적’이라고 ‘그들’이 판단한 위치
바로 이곳 오시비엥침
이 마당 경계벽에서 5천 명 이상이 SS친위대에 의해 무참히 총살당했다.
대체로 정치범 수감자, 독일즉결심판소의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 그리고 11블록 감옥에 수감되었던 수감자들이 그 대상이었다.
1944년 독일군이 허물었다가 전쟁이 끝나고 복원된 상태이며 현재 이곳은 추모의 공간이 되었다.
그 누구도 쉬이 지나갈 수 없는 이곳은 마치 통곡의 벽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제1 오시비엥침 수용소가 세워진 첫 한 달 동안 수감자들은 바닥, 밀집이나 깔개 위에 밀집해 밤을 보냈다.
점차 깔개들을 3단 침상으로 대체하였고 이 수용소는 수용 한계를 넘게 되었다. 그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
이론적으로는 수감자 약 700명을 수용하도록 계획된 복층 건물이었지만 실제 수감자 수는 두 배 이상이었다. 수감자 수에 비해 건물 내 위생시설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용할 수 있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그리하여 생리 현상을 해결하는 시간을 아주 짧게 제한하는 등 수감자들 인권은 유린당하기 일쑤였다.
그들이 숨기려고 했지만 결코 숨길 수 없었던 범죄의 증거들
수감되기 전 그들의 모든 것을 빼앗아, 이곳 안에 놓아두었다.
그렇게 숨기고자 하였으나, 결국 드러난 진실 앞에 남은 것은 참혹함이었다.
어린아이에서 몸이 불편한 자까지 그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못했던 자유라는 마땅한 권리
만만치 않게 늘어져 있는 수용소를 둘러싸고 있는 철조망들
내가 방문했던 날
날씨가 너무 좋아서, 하늘이 너무나도 맑아서 내가 있는 이 공간과의 괴리를 더욱 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 맑은 하늘 아래에서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희생되었을까 하는 한탄과
그들에게는 이 잠깐의 하늘을 볼 수 있을 만큼의 여유도 없었을 거라는 마음에 깃드는 슬픔.
그리고 도착한 가스실과 화장장
학습 자료를 수집하기 위한 차원에서
기억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사진을 하나하나씩 남겨두었던 나지만
도저히 이 사진을 찍는 것에 집중할 수 없었던 곳이 바로 이곳 가스실이다.
공간 안에 들어가자마자 느껴지는 감정이란 정말 평상시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던 낯선 것이었다.
그저 슬픔, 아픔으로 간단히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절망, 말할 수 없는 아픔, 죽음 끝에서까지 생을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간절함과 절규
그동안 가이드를 통해 엿보았던 그 과거의 이야기를 들을 때와는 또 다른 것으로,
내 온몸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경험할 수밖에 없는 그런 필연적인 것이었다.
이곳에 더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공간 안에서 답답함을 느끼고,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나오고서는 정말 숨이 터질 듯 울었더랬다.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이 울음은 나에게도 생경하고, 참아낼 수 없는 것이었다.
무슨 마음이었을까?
그렇게 하늘을 바라보고 자연을 바라보며 어떻게든 울음을 삼키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참을 수 없이 딸꾹질을 해대는 아이의 모습처럼, 꺼억꺼억 쉬이 멈춰지지 않았다.
알고 있었지만 눈앞에 펼쳐진 실제적 '앎'이 주는 충격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과거의 끔찍한 행적.
100년도 지나지 않은 인간들의 참혹한, 끔찍한 흔적을 마주하자 믿을 수없이 힘들었다.
그 자리에 있었을 사람들이 느꼈을 감정을 한참 시간이 흐른 지금. 그 공간에서 미약하게 느꼈을 뿐인데도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그 당시 어떻게 그들은 이것을 경험하고 감당할 수 있었을까.
그동안 보고 듣고, 공부해 왔던 것을 모두 새롭게 뒤엎어 버리는 이 공간
그 누구도 감히 예상하고 상상할 수 없었을 아픔이 묻어있는 공간
다시 갈 엄두는 나지 않지만 그래도 꼭 한 번은 가야만 했다고, 잘 다녀온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앞으로 우리가 해나가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기억하는 것', '바르게 바라보는 것'
두 번 다시 그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나도 모르게 방관으로, 무관심으로 일조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판단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겠지.
그러니 이름부터 명확히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아닌 오시비엥침 수용소로,
이렇게 우리가 과거의 이야기를 하나하나씩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길.
추모합니다.
그리고 기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