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가 첫 방문이라면...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알라, 막스마라 코트 들어봤지?
지나고 돌이켜 생각해 보니 심은 나에게 막스마라 아울렛 매장에 가고 싶다고 최소 세 번 이상 어필한 것으로 보인다. 그걸 두 번이나 눈치채지 못 하고 나는 흘려넘겼다.
심의 첫 번째 어필은 여행 가기 전, 지나가는 말처럼 가볍게 화제를 꺼냈다.
“알라, 막스마라 코트가 이탈리아에서 사면 그리 싸다네. 막스마라 코트 들어봤지?”
“막스마라? 처음 들어보는데...”
“뭐라고? 막스마라 코트를 처음 들어봤다고??”
“그거 유명한 거야?”
“엄청 유명하지. 추도 들어봤을 걸?”
“추, 너도 막스마라 코트 알아?”
“네, 들어봤어요.”
내가 막스마라 브랜드를 처음 들어봤다는 말에 심은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 대화는 금세 다른 여행 일정을 논의하며 자연스럽게 묻혔다.
심의 두 번째 어필은 로마에서다.
“알라, 베네치아 근교에 인트렌드(Intrend)라고 막스마라 계열 브랜드를 판매하는 아울렛이 있는데, 진짜 싸다네. 한국에서 사려면 3백만원이 넘는 코트가 그곳에서는 잘 고르면 5,6십만원에도 살 수 있대.”
“코트가 3백만원이 넘는다고?”
심은 3백만원이 넘는 코트 가격이 5,6십만원에 살 수 있다는 ‘5,6십만원’에 방점을 찍어 강조한 대화였는데, 나는 앞의 ‘3백만원’에 방점을 찍어 놀라 반응한 것이다.
“베네치아 근처라는데 우리 한 번 가볼 시간 될까?”
하지만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 심의 마음을 다시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린다.
“가려면 볼차노로 올라가는 길에 들러야 하는데, 그날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힘들 것 같은데...”
“그래? 아무래도 힘들겠지?ㅠㅠ”
솔직히 이때까지도 심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 했다. 어쩌면 아울렛에 얽힌 나의 안 좋은 기억으로 인해 아예 아울렛 매장 방문을 사전에 차단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파리 근교 라발레 빌라주 아울렛의 나쁜 기억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명품들이 많아 여행 패키지 상품의 경우 꼭 한 군데 이상은 아울렛을 일정에 넣는다고 들은 적이 있다. 나는 개별 여행을 다니기도 하거니와 명품에 별 관심이 없어 혼자 여행을 할 때는 아울렛을 가본 적이 없다. 그런데 몇 년 전 부모님과 여행을 하며 여행 마지막 날에 파리 근교에 있는 ‘라발레 빌라주(La Vallee Village)’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날도 나의 계획은 여행 마지막 날 점심을 미식의 도시 파리답게 레스토랑에 가서 근사하게 코스 요리를 먹으며 여행을 마무리하려고 계획했으나, 며칠 전 엄마가 나의 계획을 틀어버렸다.
“아빠 팔순 선물로 프랑스제 셔츠와 모자 하나 사드리자.” 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백화점에서 사면 너무 비쌀 것 같아 급하게 마지막 날 파리 근교에 있는 아울렛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Made in France’를 원했던 것과 달리 아울렛에 있는 제품의 상당수가 ‘Made in China’가 아닌가. 더 재미있는 것은 버버리 매장이 있어 온 김에 나도 버버리 코트나 하나 살까 해서 매장에 들어가 이것저것 살펴보는데 대부분이 중국산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음에 드는 코트가 있어 텍을 보는 순간 ‘뻥’하고 헛웃음이 터지고 만다. ‘‘Made in Korea’도 아닌 ‘‘Made in Apgujeong(압구정)’이 아닌가. 이날 결국 맛있는 프랑스 요리는 고사하고 아빠의 셔츠도 사지 못한 채 우리의 여행 마지막 날을 그렇게 허비하고 말았다.
알라, 막스마라 코트 사는 게 돈 버는 거야.
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패키지로 간 미국여행에서 아울렛 쇼핑으로 전세버스 한 좌석을 추가 산 물건으로 가득 채웠다는 전설적인 추의 여행 후일담을 다른 이들로부터 전해 들었지만, 그리고 두 번에 걸친 아울렛 갈 계획은 없냐고 은근히 물어보는 심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나는 명품을 살 바에야 그 돈을 모아 여행을 한 번 더 가자는 성향이라, 어필하는 심의 소리가 제대로 나에게 전달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베네치아에 오자 심은 과하지 않으면서도 더 빈번하게 막스마라 코트 얘기를 꺼냈다.
“여기에서 막스마라 코트 사면 돈 버는 거야.”
“뭐라고? 돈을 쓰는데 돈을 버는 거라고? ㅋㅋ”
나는 그제서야 비로소 심이 정말 아울렛 매장을 가고 싶어한다는 것을 눈치챈다. 하지만 나 혼자 결정할 사안은 아니고 추의 동의도 필요한 사안. 나는 안건을 상정해 회의를 소집한다.
“막스마라 코트 파는 아울렛(인트렌드)에 가려면 모두의 동의가 필요해.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가 차량 렌트할 장소인 트레비소 공항에서 채 30분이 안 걸리는 위치에 아울렛 매장이 있어. 하지만 내일은 렌터카를 수령해서 볼차노까지 올라가는 일정이고, 가는 길에 크리스마스 마켓을 두 군데 들르는 일정이라 시간적으로 빡빡해. 만약 아울렛을 가려면 트렌토에 있는 크리스마스마켓은 포기해야 해. 추 의견은 어때?”
“여러분들이 원하시면 저는 아울렛에 들러도 괜찮아요.”
“그곳에는 모두 여성용이라, 추가 쇼핑할 게 없을텐데? 그래도 괜찮겠어?”
“저는 차에서 드라마 보고 있을게요. 막스마라 코트 사면 돈 버는 거라고 하잖아요.ㅋㅋ”
“추가 마음에 걸렸는데 추만 괜찮다면 나도 동의할게.”
그렇게 모두의 동의를 얻어 그 유명한 막스마라 아울렛 매장을 방문하게 된다. 이미 심은 인트렌드의 위치와 막스마라 코트 선별법(텍이 없는 상태에서 판매하기 때문에) 등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조사 작업을 마친 상태였다.
당시 들은 심의 심경을 이러했다. 정말 가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의 개인적인 욕심에 전체 일정을 망치고 싶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의견을 최대한 어필해 보지만 반영이 안 돼도 괜찮다고...
그런데 그런 심이 보인 행동은?
아울렛 매장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심은 쏜살같이 내린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천천히 와. 나 먼저 가서 고르고 있을 게.” 하며 거의 뛰다시피 잰걸음으로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여행 와서 이렇게 자기주도적인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우리들로서는 뒤에서 그런 심의 모습에 배를 잡고 웃었다.
뒤늦게 매장에 도착했으나 심은 온데간데 없다. 막스마라 코트에 대한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는 나에게 심이 건넨 말이 있었다.
“알라, 막스마라 상표가 다 떼어져 있을 거야. 인트렌드에는 막스마라 계열의 옷이 다 진열되어 있기 때문에 그 중에서 막스마라를 찾으려면 안감을 보면 돼.”
“응, 알았어.”
그런데 심으로부터 정보를 듣기는 했으나 막상 보니 아무리 안감을 봐도 아무런 표시가 없는 상태에서 막스마라 코트를 감별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그런 내가 건성으로 코트를 보고 있는데 심이 흥분한 상태에서 두 벌의 옷을 들고 나타난다.
“알라, 막스마라 코트를 찾았어. 가격이 정말 싸.”
“심, 나는 아무리 안감을 봐도 텍이 없어 못 찾겠는데...”
그러자 심은 자신이 찾은 막스마라 코트의 안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안감에 선명하게 막스마라 글자가 무늬로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심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이후 어떻게 됐을까? 건성 건성 보던 나의 발걸음과 손길은 어느새 바빠지기 시작한다.
“심, 나도 찾았어.” 조금 있다가 “심, 또 찾았어.”
나는 어느새 심보다 더 적극적으로 막스마라 코트를 찾는데 혈안이 된다. 보물찾기 놀이에서 숨겨놓은 보물을 찾았을 때의 쾌감을 느끼며...
“알라, 너무 잘 찾는 거 아냐?”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듯이 심의 칭찬에 나는 더 적극적으로 찾아나선다. 나중에 추가 차를 매장 정면에 주차하며 우리들의 모습을 차 안에서 보았다고 한다. 둘이서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더니 어느새 나의 얼굴이 코트에 가려 더 이상 보이지 않더란다. 양손 가득 들고 있는 막스마라 코트에 가려져서...ㅋㅋ 그런 우리들의 모습에 추가 한 말이다.
“둘이서 막스마라 코트를 막~스러(쓸어) 담고 있던데요~~ㅋㅋ”
그리고 ‘이곳에서 막스마라 코트 사는 게 돈 버는 거야.’라는 심의 주술에 나는 걸리고 만다. 심이 언니 것과 자기 것 두 벌을 사겠다는 소리에 “그럼, 나도 우리 언니 것 하나 사야겠다.” 그러다가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도 하나 살까?”로 바뀐 것이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지켜보았던 추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 심이 오자고 해서 할 수 없이 온 것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내가 너무나 적극적으로 옷을 고르고 있더라는 거다. 이렇게 우리들은 각자 자신과 언니 코트 두 벌씩을 샀다. 이제 시작된 여행에 그렇잖아도 짐이 많았는데 부피가 나가는 두 벌씩의 코트는 그 이후 여행에서 짐을 싸는 내내 부담이 되었다. 그렇다고 비싼 코트를 아무렇게나 보관할 수도 없고... 그후 매번 숙소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막스마라 코트를 옷걸이에 걸어두는 일이었다. 짐 아닌 짐이 되어 버린 막스마라 코트...
그럴 때마다 심은 나에게 주술을 걸었다.
“우리 진짜 싸게 잘 산 거야. 우리 돈 벌었다니까...”
정말 돈을 번 것이 맞는 말일까? 돈을 썼는데 돈을 벌었다니 이건 역설법이잖아? ㅋㅋ
언니 코트를 갑자기 구입한 것이기 때문에 언니에게 원하는 디자인 등을 묻지도 못 했다. 카멜색의 가장 스탠다드형으로 언니 코트를 산 후 나중에 언니에게 사진을 찍어 보내주자 너무 좋아한다. 그러면서 내가 언니에게 묻는다.
“언니, 막스마라 코트 들어봤어?”
그러자 언니 왈 “당연히 들어봤지.”
언니마저 막스마라 코트를 알고 있다고?
이날 나는 심의 주술에 의해 여행에서 처음으로 약 150만원에 달하는 흥청망청 쇼핑을 했다. 나의 여행 철학을 깨고...
하지만 괜찮다. 캐시미어 100%로 윤기가 좔좔~~ 흐르는 막스마라 코트를 보고 언니가 좋아하면 됐지 뭐~~
조안나 여행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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