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으로 기억하는 이탈리아 / 젤라토
16 젤라토 맛집 찾아 삼만리 / 로마, 베네치아, 피렌체
25년 기대를 와장창 무너뜨린 젤라토
25년 전 가난한 배낭여행객 시절... 거의 매 끼니를 저렴한 맥도널드 햄버거를 먹고 다녔던 그 시절에도 나의 지갑을 무장해제시킨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젤라토였다. 그 당시 난 이탈리아 젤라토가 유명한 지도 몰랐다.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햅번이 스페인계단에서 젤라토 먹는 장면을 보고 다음에 로마에 간다면 나도 저 장소에서 오드리햅번처럼 젤라토를 먹어봐야지 정도... 그저 오드리햅번처럼 따라해보고 싶었을 뿐 별 기대는 없었다. 아이스크림이 거기서 거기지...
그런데 한 입을 먹는 순간 탄성이 절로 나왔다. ‘이게 뭐지? 뭐가 이렇게 맛있는 거야? 레몬을 갈아 넣은 맛이잖아.’ 그 당시 6월의 더운 한낮, 레몬맛으로 기억한다. 그동안 내가 먹은 아이스크림은 아이스크림이 아니었다. 이날 이후 피렌체, 베네치아에 머무르는 동안 먹을 수 있는 한 흥청망청 먹고 또 먹었다.
25년 전에 먹은 젤라토의 향수는 그렇게 내 안에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여행을 시작하는 공항에서부터 나는 심과 추에게 이런 말을 자주 했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커피를 마시자는 심의 제안에 “커피는 비행기 탑승 후 마시고, 우리 커피값 아껴서 그 돈으로 로마에서 젤라토 한 번 더 먹자.”
로마에서 다리가 아프니 택시를 타자는 추의 제안에도 “이 돈이면 젤라토를 한 번 사 먹을 수 있잖아. 조금만 더 힘내서 걸어가고 대신 젤라토 한 번 더 먹자.”
베네치아 바포레토 승차권을 인터넷에서 구매하면서도 “인터넷으로 미리 구매해 젤라토 한 번 사 먹을 수 있는 돈을 아꼈어.”
그런 나였다. 그런데 로마에서의 첫 젤라토와의 상봉에서 그동안 25년 동안 품고 있었던 젤라토에 대한 향수가 와르르 무너졌다. 로마 숙소 도착 후 채 30분이 지나지 않아 수퍼를 가기 위해 나왔는데 집 근처에 젤라토 집이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침 문을 닫기 일보 직전이었다.
“얘들아, 우리 젤라토 먹고 가자. 내가 말했지? 베스킨라빈스와는 비교가 안 되는 맛이라고. 너희들도 먹으면 왜 젤라토, 젤라토 하는지 알게 될걸?”
그런데 젤라토를 한 입 먹는 순간 너무나 당혹스럽다.
“이게 뭐지? 이건 내가 기억하는 젤라토 맛이 아닌데...”
뭐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이다. 25년 전의 기억이 너무 왜곡되어 있었던 것일까? 내가 젤라토를 너무 미화시켰나?
심과 추의 첫 젤라토 반응 역시 시큰둥하다. 그저 비싸다는 반응만 할 뿐 맛에 대한 평가가 없다. 한 스쿱 스몰 사이즈가 한 개당 4유로. 한국돈으로 약 육천원에 달한다. 이건 내가 알고 있는 금액과도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맛도 실망, 가격도 실망.... 그토록 내가 그리워했던 젤라토가 아니다.
이탈리아 젤라토라고 모든 집이 다 맛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우리는 그때부터 맛있는 젤라토 집을 찾아 삼만리 길을 나선다.
이탈리아 최고의 젤라토는?
로마를 시작으로 북쪽으로는 볼차노, 남쪽으로는 레체까지 20박 22일 동안 이탈리아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젤라토를 먹고 또 먹었다. 여행 후 심과 추에게 물었다.
“최고의 젤라토 맛집을 뽑으라면 어디를 선정할 거야?”
추는 베네치아의 수소 젤라토를 꼽았다. 심과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로마의 파씨를 선정했다. 참, 여기에서 추는 여행 마지막 날 몸이 좋지 않아 숙소에 머무르느라 파씨 젤라토를 맛보지 못 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들이 뽑은 최고의 젤라토 맛집은 단연코 파씨(G. Fassi)다.
여행객들 사이에서 로마 3대 젤라테리아로 알려진 곳은 지올리티(Giolitti, 판테온 신전 인근), 올드 브릿지(Old Bridge, 바티칸시국 인근), 그리고 파씨(G. Fassi, 테르미니역 인근)라고 한다. 다른 두 군데는 가보지 못 했고, 한국으로 떠나는 마지막 날에 그것도 시간에 쫓기며 겨우 찾아가 먹은 곳이 파씨다. 당시 보르게세 공원에서 버스킹 하는 멋진 남자에게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그래도 3대 젤라테리아 중 한 곳이라도 못 먹어보고 가는 것은 두고 두고 후회로 남을 것 같다는 심의 간절함이 있어 뛰다시피하며 찾아간 곳이었다. 숙소에 있는 추는 왜 안 오냐고 보채고... 젤라토는 먹어야겠고... 마침 나의 배터리는 방전되기 일보 직전이고... 그런데다 젤라토 3대 맛집이 있다고 하기에는 인적이 드문 한산한 길로 안내하는 네비. ‘길을 잘 안내하고 있는게 맞아?’ 하는 순간 심이 나에게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알라, 저기야.”
로마 3대 젤라테리아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곳답게 건물이 고풍스럽다. 거리의 한산함과 달리 건물 안은 줄 선 사람들로 북적북적... 다행히 줄은 예상보다 빨리 빠졌고, 어렵게 파씨의 젤라토를 영접하게 되었다. 이 집에서 유명하다는 리조(쌀) 맛을 맛보는 순간... 내가 25년 전 처음 젤라토를 먹었을 때의 감동이 오버랩된다. 나와 심은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며 환하게 웃는다.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찾아온 고생이 한 방에 날아가는 맛이다. 리조맛을 맛보고 내뱉은 심의 첫 마디. “이거 안 먹고 갔으면 어쩔 뻔 했어? 왜 3대 젤라토인지 알겠네. 다른 두 곳을 맛보지 못 하고 로마를 떠나는 것이 아쉬울 뿐이야.” 그리고 누나의 따뜻한 한 마디도 잊지 않는다. “이걸 추도 먹었어야 하는데...ㅠㅠ”
우리나라 여행객들에게만 알려진 로마 3대 젤라토 맛집인지, 아니면 이탈리아에서 인정한 3대 젤라토 맛집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하여튼 심과 내가 먹어본 많은 젤라토 중 이 집이 단연코 1등 젤라토 맛집이다.
가장 특이했던 젤라토는?
“알베르토가 그러는데 감초맛 젤라토 파는 집이 찐이래.”
맛집 검색을 담당한 심이 내놓은 고급 조사 결과이다. 그 결과 심이 찾은 젤라토 맛집은 로마 ‘젤라테리아 프리지다리움(La Gelateria Frigidarium)’ 감초맛 젤라토를 파는 곳이다.
종업원이 무슨 맛을 고르겠냐고 하길래 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감초맛을 골랐다. 추도 나랑 같이 아무런 망설임 없이 감초맛을 선택한다. 진정 궁금한 맛이 아닐 수 없었다. 이탈리아인인 알베르토가 젤라토는 감초맛을 가장 좋아한다고 할 정도이니 맛있겠지 믿었다. 그런데 추와 내가 동시에 맛본 감초맛 젤라토에 우린 둘 다 얼굴을 찌푸린다.
“이거 진짜 감초맛이네...ㅠㅠ”
로마에서 웬 한방 맛~~ㅋㅋ 우리는 동시에 심을 째려본다.
“감초맛 맛있다며...”
“내가 언제? 감초맛 파는 집이 잘 하는 집이라고 했지, 감초맛 젤라토가 맛있다고 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ㅋㅋ”
그런데 더 경악할 일은 우리에게 그렇게 감초맛이 맛있다고 하고선 정작 심은 다른 맛을 골랐다는 사실...ㅠㅠ
이런... 우리는 심에게 속았다. 동물적 감각으로 맛있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보는 심은 감초맛이 아닌 다른 맛을 골랐다.
비록 감초맛 젤라토가 나와 추 입맛에는 소소(SO SO~) 했으나 그래도 먹어보길 잘 한 것 같다. 안 먹어봤다면 두고 두고 궁금했을 맛이다. 그리고 감초맛 파는 집이 잘하는 집이라는 심의 조사는 정확했다. 레몬맛은 정말 맛있었다. 이 집 젤라토 맛집으로 인정!
엄마가 생각나는 맛, 피렌체의 흑임자 젤라토
흑임자는 나에게 어린 시절 엄마의 따뜻한 추억을 소환하는 음식이다. 아플 때마다 끓여주셨던 흑임자죽. 그래서 나는 지금도 아플 때나, 입맛이 없으면 흑임자죽을 사먹곤 한다.
그런데 피렌체 젤라토 중 흑임자 젤라토가 유명한 집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조건 먹어봐야지. 위치는 산타 트리니타 다리 건너편에 있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상호를 다리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산타 트리니타 젤라테리아(Gelateria Santa Trinita).
개인적으로 흑임자를 젤라토로 만들면 어떤 맛이 날까 가장 궁금한 맛이기도 했다. 흑임자 젤라토가 입 안에 들어가는 순간 나는 너무나 엉뚱하게도 백석의 ‘고향’ 시가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백석의 ‘고향’ 시 중 먼 타지에서 만난 의원을 통해 고향을 생각하며 그 의원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 손길을 표현한 시구가 떠올랐다.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백석의 ‘고향’ 시 중)
그렇다. 흑임자 젤라토를 먹는 순간...
고향도, 엄마도, 엄마가 정성스럽게 끓여준 흑임자죽도 다 있었다.
그날의 피렌체는 젤라토를 먹기엔 무척 쌀쌀한 날씨였다. 그런데 차가운 흑임자 젤라토에서 따뜻함이 느껴졌다. 흑임자 젤라토 안에는 진한 흑임자의 구수한 엄마향이 묻어 있었다.
그 외에도 베네치아에서의 일몰 감상 후 먹었던 수소 젤라토, 아말피 해변에서 먹은 레몬맛 젤라토 등 맛있는 젤라토를 찾아 이탈리아 방방곡곡을 다녔던 기억이 새삼 맛있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25년 전에 맛본 젤라토의 기억은 왜곡되지 않았다. 이번 여행에서도 젤라토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다음의 젤라토 여행이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안나 여행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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