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이탈리아 맞아? / 북부이탈리아 (볼차노, 오르티세이, 시르미오네)
남 티롤산맥의 숨 막히는 전망을 자랑하는 살로네토 마을
나는 여행 준비 중 숙소를 제일 신중하게 결정하는 편이다. 그 지역의 문화를 느끼는데 숙소가 중요하게 한몫한다고 생각하기에 획일적인 호텔보다 현지인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에어비앤비 숙소를 선호하는 편이다. 이번 여행에서도 숙소 고르는데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했는데 그중에서 특히 토스카나와 이곳 돌로미티 숙소 고르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내가 돌로미티 숙소를 고르는데 가장 주안점을 둔 것은 이왕이면 알프스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마을이면 좋을 것 같았다. 오르티세이가 비교적 그런 분위기에 가까웠으나 가격이 어마무시했다. 차선책으로 고른 곳이 바로 이곳 남 티롤 산맥의 파노라마 풍경을 자랑한다는 살로네토(Salonetto) 마을이었다. 크리스마스마켓으로 유명한 볼차노와 메라노 사이에 있는 마을인 데다, 나의 기대를 충족하는 알프스 분위기의 예쁜 마을이었다. 순수한 이탈리아인들보다 독일어를 쓰는 오스트리아 계통의 주민들이 더 많이 살고 있어 이정표 역시 두 나라 언어를 다 사용하는 것은 물론 집들의 분위기 역시 이탈리아 보다는 독일, 오스트리아 분위기가 훨씬 더 많이 느껴지는 마을이었다.
첫날 숙소에 밤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제대로 동네와 주변을 보지 못한 채 잠들었는데 다음 날 테라스에서 바라본 사우스 티롤 산맥의 모습은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제공한 사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담아내기에는 인간이 만든 기계(카메라, 스마트폰)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이곳에선 아무것도 안 하고 하루종일 테라스에 앉아 멍 때리고 있어도 좋을 것 같아.’ 테라스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자연풍광에 홀딱 반해 잠깐 스친 생각이었는데, 그 말이 현실이 되어 돌아온 줄이야...
둘째 날 밤 10시쯤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우리는 놀라 테라스에 나가 밖을 보았다. 마을 전체가 캄캄하다. 조금 있으니 주인이 와서 설명해 주었다. 폭설이 내려 전신주가 넘어져 마을 전체가 정전이 되었다고... 그러면서 초를 주고 간다. 이들에게 겨울에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나는 일인 듯 아무렇지 않게... 폭설로 인해 전신주가 넘어져 정전 사태를 다 경험해 보다니. 부산에서는 절대 겪어보지 못할 이런 경험이 불편하기보다 재미있게 다가왔다. 덕분에 촛불 아래에서 분위기 있게 와인도 마시고...
다음 날 새벽 6시경에 눈이 떠졌다. 밖은 아직 캄캄하다. 이왕 이렇게 눈이 떠진 거 동네나 한 바퀴 돌아보려고 집 밖을 나왔는데 세상이 온통 새하얗다. ‘맞아, 어제 폭설이 내려 전신주가 넘어지는 사고가 있었지?’ 깜박 잊고 있었다. 밤새 내린 폭설로 마을 전체가 하얀 눈으로 감금되었다. 우리 차 지붕에도 30센티미터 넘게 눈이 쌓여 있다. 부산에 살고 있어 눈을 볼 기회가 거의 없는 나에게 이곳은 겨울왕국이다. 새하얀 눈길에는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다. 신이 난 나는 뽀드득뽀드득 발자국을 남기며 열심히 나의 흔적을 남긴다. 마치 ‘내가 이곳에 다녀갔음.’이라고 방명록을 쓰는 마음으로...
아직 동이 트기 전, 오직 소리라곤 뽀드득 거리는 내 발자국 소리뿐인 마을에 어디선가 침묵을 깨고 ‘쓱쓱~’ 하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의 자취를 따라간 곳에선 부지런한 가족이 다 같이 나와 집 앞의 눈을 치우고 있다. 어린 손자부터 시작해 할아버지까지... 나와 눈이 마주친 할아버지가 손을 흔들어주신다. 삼대가 함께 눈을 치우는 모습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지나가던 할머니가 가던 길을 멈추고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데 도통 못 알아듣겠다. 할머니는 내가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전혀 개의치 않고 독일어로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하셨다. 대충 몸동작을 통해 짐작을 해보면 밤새 눈이 너무 많이 왔다는 내용인 듯했다. 비록 알아듣지는 못 했으나 스스럼없이 이방인에게 다가와 말을 건네는 할머니에게서 당신의 마을에 찾아온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듯한 따뜻한 환대가 느껴졌다.
7시가 되자 성당의 종소리가 은은하게 마을 전체를 감싸기 시작했다. 새벽길에 잠깐 만난 어르신들의 따뜻한 환대와 함께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성당의 종소리가 하나로 어우러지며 이 마을이 따스하게 다가온다.
아침 7시가 넘고 날이 밝아오자 제설차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마을 사람들도 일제히 나와 자신의 집 앞에 쌓인 눈을 치운다고 여념이 없다.
오늘 일정을 어떻게 하지? 오늘은 카레자 호수, 카나제이, 파소셀라를 거쳐 산타 막달레나 성당까지 드라이브할 계획이었는데 갈 수 있을까? 길이 미끄럽지는 않을까? 주인은 10시 전에는 제설 작업이 모두 끝나 큰길을 다니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안심시킨다.
하지만 심과 추는 굳이 위험하게 차를 끌고 가지 말고 그냥 이 마을에 머물며 여유롭게 보내자고 제안한다. 쌓인 여독도 풀고... 이 마을에서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동네 산책하며 테라스에 앉아 멍 때리기만 해도 좋을 충분히 힐링이 되는 곳이니까...
그럼 럭셔리한 아침부터 준비해 볼까? 심은 크리스마스 리스 모양의 샐러드를 비롯한 소시지와 계란프라이까지 가미해 유명 브런치 카페에서 파는 메뉴에 뒤지지 않을 화려한 조식을 준비한다. 오늘의 커피는 모카 포트로 끓인 커피다. 이탈리아에 왔는데 모카 포트로 끓인 커피 정도는 먹어줘야지.ㅋㅋ 테라스에서 아름다운 남티롤 산맥을 바라보며 마셨던 커피맛이 커피 향과 함께 생생하게 내 마음속에 살아 있다. 커피 맛도 커피 맛이지만 아마 아름다운 자연의 품 안에서 시간에 쫓기지 않고 여유롭게 즐길 수 있어 더 오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들은 마을도 산책할 겸 이 마을에 있는 유일한 카페인 비스트로에 가기로 한다. 가는 길이 너무 예쁘다. 알고 보니 남 티롤의 고원지대인 이곳은 봄과 가을에는 자전거 하이킹으로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겨울인 지금은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덮여 있지만 봄과 가을에는 짙푸른 대지에 온갖 야생화 등이 피는 아름다운 마을이라고 한다.
심과 추는 이 마을이 너무 마음에 드는가 보다. 어떻게 이런 마을을 알아 숙소를 구했냐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내가 생각해도 이 마을에 숙소를 구한 나 자신이 대견하다. 알프스의 분위기를 느끼기에 이만한 숙소가 또 있을까?
비스트로 카페는 호텔에 딸린 카페로 주로 호텔 손님들이 이용하는 듯 보였다. 이곳에도 카페 주인인지 호텔 주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빠와 아들이 카페 앞마당에 쌓인 눈을 치운다고 여념이 없다. 채 10살이 안된 남자아이가 아빠를 따라서 얼마나 열심히 눈을 치우는지... 그 모습에 자꾸 눈이 가 나도 모르게 카메라로 도찰을 한다.ㅠㅠ
마을 위쪽으로 올라가자 사방이 확 트인 고원이 펼쳐진다. 하얀 눈으로 덮인 고원, 그 위에 한 그루 나무가 서 있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아름다운 장면에 감탄해 카메라로 찍어보지만 내 눈으로 보이는 모습이 카메라 렌즈로는 담아내지 못한다. 이럴 때마다 나는 창조주의 대단함에 감탄하곤 한다. 아무리 카메라 기술이 발달해도 신이 만든 인간의 렌즈를 뛰어넘을 수 없음을 느낀다. 그렇다면 카메라를 내려놓고 눈에 담을 수밖에...
“스위스 알프스 산맥도 이런 느낌이겠지?” 심의 감탄 섞인 말에 나는 피식 비웃어준다.
“심, 여기도 알프스 산맥이야.”
“여기가 알프스 산맥이라고?”
“그래, 알프스 맞다고...”
아침까지만 해도 나는 혼자 오후에는 버스를 타고 메라노로 갈 생각이었다. 크리스마스마켓이 오늘까지라... 그런데 동네를 산책하며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에 이 마을을 더 많이 느끼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나, 메라노 안 가도 될 것 같아.”
메라노 크리스마스마켓을 포기하게 만들 만큼 하얀 이 마을이 너무 마음에 든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유럽인의 신앙심
주인의 추천을 받아 아랫마을로 피자를 먹으러 갔다. 마을 이름이 독일어로는 ‘MŐLTEN(묄텐)’, 이탈리아어로는 ‘MELTINA(멜티나)’다. 처음 들어본 작은 마을이다.
우리는 마을 이름이 붙은 피자와 맥주를 주문했다. 숙소 주인아저씨가 맛집이라고 하더니 너무 맛있다. 그러고 보니 이탈리아에 여행 와서 피자를 처음으로 먹는다. 기분 좋게 피맥 한 잔 하고 성당으로 향한다.
성당으로 가는 길에 한 할아버지를 만났다. 나에게 성당에 가는 길이냐고 묻는다.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러면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성당 맞은편 건물 안으로 들어가신다. 어떤 상황인지 염문도 모른 채 나는 기다린다. 조금 있다 다시 나타난 할아버지의 손에는 열쇠가 있다. 알고 보니 성당이 평소에는 잠겨 있는데 우리를 위해 일부러 성당 문을 열어주시려고 한 것이다. 아마 성당을 지키시는 관리자분이었던 것 같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시더니 우리를 위해 제대 불까지 다 켜주시고 사라지신다.
단지 성당인지 알고 들어갔는데 성당을 둘러싸고 묘지가 있다. 유럽의 소도시를 다니다 보면 마을에 묘지가 함께 있는 것은 낯선 장면이 아니다. 혐오 시설이라며 납골당 건립을 결사반대하는 우리나라 문화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기도 하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유럽인들의 신앙심이 부럽다.
마을 안에, 그것도 매주 다니는 성당 마당에 있는 묘지를 처음 본 추에게 이 장면은 강렬하게 다가온 듯하다. 추는 다음과 같이 소감을 밝힌다.
“이 묘지를 처음 보는 순간 ‘너의 마지막을 기억하라.’고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았어요. 성당의 묘지를 둘러보며 나의 마지막의 모습은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며 아름다운 마지막을 위해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성당 묘지는 나에게도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그런데 나에게 건네는 질문이 “나의 마지막의 모습은 과연 어떻게 기록될까? 사람들에게 나의 마지막은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가 아니었다. 이곳 묘지에 묻혀 있는 사람들의 죽음의 과정이 궁금하게 다가오며, 나에게도 언젠가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겠지만 무엇보다 인생을 마감하는 죽음의 과정이 편안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킨슨 병으로 점점 더 몸이 굳어가며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는 아버지를 옆에서 지켜보며 그 마음이 얼마나 두려울까를 생각하곤 한다. 그런 아버지에게 마지막의 모습이 어떻게 기록될까는 어쩌면 사치스러운 질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이라도 고통스럽기 전에 돌아가시기를... 아버지의 마지막 죽음의 과정이 편안하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드릴 뿐...
나 역시 40대라면 추와 같은 질문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50대 중반에 들어서며 죽음에 대한 태도가 변하며 나 자신에게 건네는 질문도 달라짐을 느낀다. 무엇보다 더 이상 죽음은 나와 먼 미래의 일이 아닌 내 가까이에 있음을 느끼는 것을 보니 나도 이제 죽음을 생각하는 나이가 되었음을 실감한다.
조안나 여행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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