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2
배경
계시록에서 ‘아시아’ 또는 ‘소아시아’라는 지명은 고대 그리스에서 불렀던 명칭이며 지금의 튀르키예인 아나톨리아 반도입니다. 그곳 서부의 에베소[에페소스], 서머나[스미르나, 이즈미르], 버가모[페르가몬], 두아디라[티아티라], 사데 [사르디스], 빌라델피아[필라델피아], 라오디게아[라오디케 이아] 교회는, 사도 바울과 디모데 그리고 사도 요한이 세우고 섬겼던 교회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로마 제국’에 속해 있었고, 헬레니즘 문화 곧 그리스 신화와 종교가 거대 문명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도시와 같은 배수 시설도 갖추어 잘 정비되고 있었으며, 아파트도 있었으며 수세식 화장실, 공중목욕탕 시설들까지 이미 보급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크로폴리스가 바위 언덕들에 건설되면서 세워진 그리스 신들의 신전이 각지에 있었습니다. 그런 헬레니즘 문명은 '그리스 발칸 반도를 넘어 아시아아나톨리아 반도에서도 크게 발전'했었고, 계시록에 언급된 아시아 일곱 교회 중 대표적인 3개 도시를 예로 들어 당시 그 일대의 주요 문화와 종교를 간추려봅니다.
에베소에서는, 다산을 상징하는 아데미[아르테미스] 신전이 고대세계 7대 불가사의 건물로 유명했습니다. 아데미 숭배 문화가 아주 음란하고 저질스러웠다고 합니다.
버가모에서는, 제우스 신전과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을 중심으로 다른 여러 신전들도 많았습니다. 때문에, 의술과 의료시설이 발달했고, 계시록에서는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라고 묘사했습니다.
두아디라는, 아폴로와 동일시했던 트림나스를 주신으로 섬겼고, 아폴로의 신탁[오라클]을 행하는 여사제[피티아]가 있었습니다. 지역 산업은 염색 모직 산업이 발달해 ‘자주색 옷감’의 생산지로 유명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받아들인 '자칭 예언하는 여자 이세벨의 모티브'가 곧, 그 여사제[피티아]로 보입니다.
필자가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그리스 신화를 만화나 애니메이션으로 접하면서 어린아이 같은 단편적 관점으로 고대 종교를 보면 그것은 단지 재미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러나 내용이 너무 방대해서 상세한 언급은 할 수 없지만, 수메르,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이집트 제국들이 숭배한 고대 종교, 그리고 그 종교의 많은 신들이 정착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실제 모습은 ‘상상 불가의 잔혹한 축제’와 ‘음탕하고 노골적인 숭배 관습’과 ‘인신 제사’들의 향연이었습니다.
일부 권력을 가진 세력은 '주께서 사랑으로 지으신 피조 생명뿐 아니라 사람의 생명까지 '그들의 이권다툼을 위해 쓰고 버리는 일용품 쓰레기처럼' 사용했고, 종교와 문화는 '자기 신들에게 그들의 피를 제물로 드려 살해하고, 그 잔혹성을 보편 문화로 받아들이게 하는 신화와 사상들을 만들어 민중의 정신을 지배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우상숭배'라는 것이 단순히 지금 우리 세대가 아는 '조상 숭배나 제사의 수준'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런 악한 풍습들 때문에, ‘의와 거룩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방의 신들을 섬기지 못하게’ 하셨고, ‘그리스도께서도 교회와 성도들에게 그들과는 구별된 삶을 요구’하셨습니다.
도입
주께서는, 일곱 교회 각각에게 그들이 들어야 할 말씀을 하신 뒤, 그 맺음말에는 반복적으로
"귀 있는 사람은 성령님이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는 명령을 하십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이라는 어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행하는 자를 지목’하신 겁니다.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임에도 ‘여러 교회들에게’라는 언급을 따로 하신 이유는, 그 일곱 교회만 아니라, ‘초대 교회에서부터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있을 모든 교회를 지목’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령님의 말씀을 듣는 자 곧, ‘신앙의 승리자’에게 주실 ‘하늘 상급’을 언급하십니다.
그 상급은, ‘주께서 다시 오셔서 주님의 심판을 행하시고 이 땅을 새롭게 하실 때’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교회와 성도는 ‘사망을 이기신 어린양 예수의 영생과 권능이 없는 상태'로, 완전한 성취가 있을 그날을 고대하는 역사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연약하고 핍박을 견디는 교회 역사에 대해 주께서 밝히신 이유는, ‘그리스도의 영생에 참예할 성도들의 수가 채워질 교회 역사 기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 시간의 틀에 속박되어 있는 성도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굳은 믿음에 의한 인내와 기다림’입니다.
즉, 어린양께서 다섯 번째 인을 떼시고 요한이 본 이상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다가 죽임을 당한 순교자의 영혼들의 탄원’이었고, 그들의 탄원에 대한 주님의 응답은, ‘흰 예복을 주시며 위로하시기를, 그들과 같이 하나님의 종으로써 순교당하는 자들의 수가 채워질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혹시 어쩌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어떤 신실한 자에게 그날을 알게 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주께서 알게 하신 그것'을 비밀로 간수하면서 주께서 허락하시는 자에게만 공유하는 것이 마땅함을 알 것이고,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달리, '공개적으로 어느 날 주께서 오신다고 떠드는 사람들은' 자신이 주님 앞에서 누구인지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단지 교회와 성도만이 아니라 그 거짓 선지자들 역시,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은 ‘세상에서의 환란과 죽음이 아니라, 심판주로 오실 주님의 심판’인 것입니다.
아시아 일곱 교회를 지목해 그들을 모본으로 삼아 역사 속의 모든 교회에게 전하시는 주님의 메시지에 대한 충분하고 바른 이해는 그러나, '전적으로 개인의 몫'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이른 자는 주님과의 1:1 인격적인 관계에서 성장하고, 나아가 '거룩한 성화의 단계'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구하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것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 메시지를 완벽히 깨달았다 하더라도 ‘그 이해의 본질은 성령님의 역사[works]가 배제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는 타인에게 온전하게 전달될 수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한 개인의 이해는 결코 완전하다 할 수도 없기 때문에 고작해야 참고만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필자는 독자 중 누군가, 되도록 많은 이가 이 정리를 계기로 삼아, 스스로 공부하고 살피면서 성령님께 직접 배우고 바른 이해에 도달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메시지는 숲을 먼저 보고 나무를 살펴야 합니다. 단어 하나하나 만을 중점적으로 파고들면 전체 맥락에서는 벗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고된 수고가 만들어 내는 것은 ‘오역’이고 ‘왜곡’입니다. 그것이 완고해져 고집이 되면 그것이 ‘이단’입니다. 즉 '하나님의 진리는 없고 인간의 해석만 남은 것'이 '이단'입니다.
그러나 바른 이해로 가는 길은 마치, ‘역사 공부’와 같은데, 한 시대의 ‘시대적 배경’과 ‘이후 역사의 흐름’을 알면 그 속에서 살다 간 인물의 인생도 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과거를 알면 미래도 예측 가능할 수 있는데, 사람에게는 그것이 ‘예측’이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는 ‘예언과 계시 그리고 언약’인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보이신 것은, 암호나 코드가 아니라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그 맥락을 잡아 가는데 있어서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교회와 성도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렵지 않게 접근하기 위해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성도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인내하며’, ‘주님의 언약’과 ‘자신의 믿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열 처녀의 비유를’ 주께서 말씀하신 겁니다. 곧 자신의 믿음이 ‘기름병’이라면, 주님의 언약은 ‘등불을 밝히는 기름’입니다.
그가 '신앙의 승리자' 곧 '이긴 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