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되기로 각성한 때는, 2015년 봄, 고도원의 아침편지를 쓰시는 고도원 작가님께서 충주에서 운영하시는 명상센터 깊은산속옹달샘에서였다. 2014년 가을 조울증이 재발했다. 2000년 스무 살 조울증이 발병하고, 2009년 재발에 이어, 나의 조울증 인생 3대 위기 중 하나였다. 정신병원에 3개월 강제입원하고 퇴원하니, 조증 증상은 조절이 되어 일상생활은 가능해졌으나, 몸무게는 5kg가 늘어 둔해졌고, 눈빛은 총기를 잃었다. 낮에는 마루에 나와 TV를 보았고, 밤에는 내 방에 박혀 스마트폰을 보았다. 어머니 마음엔 피눈물이 났을 것이다. 큰고모의 추천으로 어머니께서 나를 명상센터 옹달샘의 명상치유 프로그램에 보내주셨다.
프로그램은 훌륭했으나, 조울증의 마수의 손길이 한 번 훑고 지나가 얼이 빠져 있던 나에게,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밥이 맛있었고, 쉬는 시간 같은 기수참가자와 어울려 명상센터 뒷산을 오르내리며 이바구를 나누는 게 좋았다.
"최 선생, 시 한 수 외우는 것 있으면 읊어봐요. 노래 한 곡 뽑아보던가."
"외우는 시나 노래는 없고요. 제가 지은 시가 하나 있어요, 그 시를 가사로 작곡한 노래도 있고요. 그거 해도 될까요?"
"당연하지요. 더 좋지요."
"브라보"
그날 저녁 프로그램은 고도원 작가님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앉아 한 사람씩 마음속 깊은 곳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내 순서가 되자 산행 일행들이 내가 지은 시와 노래가 좋다고 들어보자고 했다. 고도원 작가님도 좋다고 멍석을 깔아주셨다.
그날밤 나는 옹달샘 시인이 되었다. 객석의 관객보다 무대의 주인공이 더 큰 감동과 황홀감에 빠지는 법이다. 이런 경험을 할 때 나르시시스트가 되지 않을 방법이 없다. 필을 받아 내가 명상센터에 오게 된 사연을 나누게 되었다. 그 프로그램이 끝날 때 나는 작가가 되기로 했다. 사람들 앞에서 내 시를 발표하며 작가가 되기로 했는데, 처음부터 시인이 아니라 에세이스트가 되기로 했다. 작가가 되기로 했으면, 아직 정신건강이 사회생활을 하기 힘들고, 책임질 가정이 없었을 때, 골방에 들어가 글을 썼어야 했다. 나는 작가가 될 때까지 동생 사업장에서 알바를 하기로 했다. 2021년부터 동생 회사에서 일하기 훨씬 이전에도, 동생 사업장에 왔다 갔다 했다.
시 하나가 처음 나를 찾아온 것은 조울증에 걸려 정신이 붕 뜬 2000년 가을이었다. 2008년 아직 대학 다닐 때 전공 수업 대신 국어국문학과 문예창작 수업을 들었다. 시창작 수업은 A+을 받았고, 소설창작 수업은 A0를 받았다. 그때는 순수문학을 하는 시인이나 소설가를 꿈꾸는 문학소년이었는데. 그 꿈은 그때 완전히 소멸이 되어 지금 꾸는 작가의 꿈과 연결성은 전혀 없다. 나의 글쓰기 인생의 시작은 고2 때 시작된 짝사랑 소녀에게 보낸 많은 편지와 보내지 못한 더 많은 편지로부터였다.